소설리스트

69화 (69/85)

69.

“그 사람을 왜요?”

“직접 와서 사과도 안 하고, 무슨 예의인가 싶어서.”

“쌍방 과실입니다, 쌍방 과실. 그리고 요새는 다 보험사 통해서 얘기해요. 누가 직접 만난답니까.”

형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견을 흘겨보았다.

그 같잖은 시선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견이 됐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유난히 예민하게 구는 것 같은 견을 보던 정서는 형사가 떠난 뒤 그에게 물었다.

“뭐 걸리는 거 있어?”

“아니야. 더 안 자도 돼?”

“응. 다 자서 안 졸려. 불편하게 여기서 졸지 말고 들어가서 자. 내일이면 퇴원인데.”

“어떻게 그래? 널 이렇게 춥고 어두운 곳에 내버려 두고 나 혼자 어떻게 돌아가.”

정서는 멍한 얼굴로 견을 보았다.

VIP 병실은 정서가 지내던 방보다도 훨씬 쾌적했다.

따뜻한 것은 물론이고, 조명 역시 은은해서 딱 좋았다.

“왜 그런 얼굴로 봐. 배 안 고파? 지금까지 내내 굶었잖아. 잘 먹어야 상처도 금방 아물지.”

“낯설어.”

“뭐가?”

“그냥 이런 상황이.”

누군가 아픈 자신을 걱정하고 챙겨 주는 게 정서는 익숙하지 않았다.

자질구레하게 다치긴 했어도 크게 아플 일이 없었으니 이런 곳에 올 기회는 더더욱 없었고, 자신을 살뜰히 보살피며 이것저것 챙기는 견의 모습 역시 새로웠다.

일상의 면면이 타인과 맞닿는 일이 좀체 없던 정서라 이렇게 챙김 받는 게 낯설었으나, 따뜻했다.

“익숙해져야 할 텐데. 이런 다정쯤은.”

견은 씩 웃으며 정서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췄다.

“앞으로 일상이 될 테니까. 결혼이란 그런 거야.”

“……꼭 해 본 사람처럼 말하네.”

괜히 부끄러워진 정서가 고개를 돌리자, 견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다가 그녀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뗐다.

놀란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자 연거푸 입술에 입을 맞췄다 뗐다.

“왜, 왜 이래.”

“고마워.”

“뭐가.”

“그냥, 크게 안 다치고 금세 기운 차리는 거.”

“……그게 뭐가 고마워. 나는 미안한 거 투성이인데. 그리고 이럴 시간 없잖아. 얼른 결혼도 하고 백영 엔터테인먼트도 키우고.”

“또.”

“응?”

“복수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잘 키우고?”

“뭐?”

거기까지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빤히 저를 보는 정서의 눈을 가린 견이 정서를 끌어당겨 안았다.

“다시 재워 줄게. 자자.”

“나 하나도 안 졸리다니…….”

“자장 자장 우리 정서. 자장 자장 잘도 잔다.”

막무가내로 등까지 두드려 주는 통에 정서는 더 실랑이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너른 어깨에 턱을 괴고 기대자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천천히 퍼져나간다.

내내 잤는데, 또 거짓말처럼 방심하고 잠기운이 몰려온다.

처방받은 진통제와 항생제 때문인지, 견이 주는 안정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걱정하지 마, 윤정서.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해.”

얌전히 눈을 감고서 잠든 정서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견이 중얼거렸다.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눈치챘어도 괜히 걱정할까 싶어 넘어간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정서가 이전과 다르게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조용히 몸을 떼어내 정서를 침대에 눕힌 견은 이불까지 잘 덮어준 뒤 몸을 일으켰다.

방심한 채 잠이 든 얼굴을, 순진한 아이 같은 얼굴을 될 수 있는 한 오래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여유가 없었다.

“……나예요. 새벽에 연락해 미안합니다.”

― 예? 아, 아닙니다. 본부장님.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박 실장의 것이었다.

견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복도를 걸었다.

“윤 변호사 사고 소식은 들었을 테고. 사고 낸 트럭 운전자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습니까? 될 수 있는 한 빨리해주면 좋겠는데. 합법적인 루트가 안 되면 다른 루트도 괜찮습니다.”

― 가능은 합니다만……. 보통 이런 일은 윤 변호사님이 직접 해 주셨는데, 크게 다치신 건가요?

“아니. 윤 변호사는 알 필요 없는 정보니까 묻는 겁니다.”

― ……알겠습니다. 파악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참고로 단독으로 진행해 주셔야 합니다. 다른 비서진들은 모르게 하세요.”

견은 그렇게 말하며 휴지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으깨어져 떨어진 꽃잎들이 애처로웠다.

&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마세요. 네, 네.”

정서는 몇 번이나 괜찮다고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희는 보양식을 해둘 테니 오늘은 꼭 집에 들어와 밥을 먹으라 수화기 너머로 신신당부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견이 피식 웃었다.

“윤정서 다 컸네, 먼저 연락할 줄도 알고.”

“괜히 연락 안 하고 나중에 알면 더 걱정하실까 봐.”

“대견한데 상으로 뭘 주지?”

“아무것도 줄 생각하지 마. 애초에 네가 생각하는 상이 나한테도 상일 거라는 건 착각이야.”

“그새 눈치도 늘었네.”

견이 아쉽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며 정서를 보았다.

정서는 집으로 데려다주겠다는 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함께 회사로 향했다.

“근데 말은 왜 안 듣지?”

“드레스 꼭 입어 봐야 돼?”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아무거나 대충…….”

차를 세우고 내려 건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뚝 멈췄다.

정서는 견을 돌아보았다. 잘 가다가 왜 멈추냐는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견이 고개를 흔들었다.

“뭘 입어도 예쁠 거라는 자신감인가?”

“뭐?”

“그게 아니면 결혼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뜻인가.”

어라, 이게 아닌데.

업무에 있어서 늘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그녀였다.

결혼 준비도 될 수 있으면 빠르게 해치우고 싶었다.

결혼에 대해 갖게 되는 기대감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지금 일 분 일 초가 아쉬웠다.

“그런 게 아니라.”

“됐어. 그럼 턱시도 입은 내 모습도 궁금하지 않겠네.”

견은 토라진 얼굴을 하고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지금 이럴 때야? 고작 이런 걸로 삐칠 때냐고?

견을 불러세워 묻고 싶었으나, 벌써 그는 저만치 앞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하견, 너 애처럼 굴 거야?”

“…….”

“하견, 나 안 봐?”

잠시만요!

뭐라 다그치듯 말을 이으려던 것도 잠시 누군가 짐을 들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정서는 얼른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들어오는 남자가 고맙다 인사하는 것에 따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힐긋 견을 보자 여전히 토라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애를 키우지, 애를 키워.

법무팀에 들러야 하는 정서가 먼저 내릴 때까지 침묵하던 견은 그녀가 내리며 저를 한 번 더 쳐다보자 그제야 표정을 조금 풀었다.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는 그를 본 정서가 작게 웃으며 멀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잠시 올라갔던 입꼬리가 다시 내려왔다.

싸늘한 표정이 된 견이 입을 열었다.

“뭡니까.”

“예?”

“층 안 눌렀잖아. 거기 내 방 밖에 없는데, 들고 있는 짐 뭐냐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남자가 놀란 듯 몸을 움찔하더니 그를 돌아보았다.

견은 지체없이 손을 뻗어 남자가 쓰고 있던 모자를 들췄다.

드러난 얼굴은 평범한 삼십대 남성의 얼굴로 그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봤다 하더라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그냥 저는 퀵 기사인데요……. 하견 대표님 되세요?”

순진한 얼굴을 믿어야 하나?

퀵이 들어있다는 상자는 제법 무거워 보였다.

보통 택배처럼 종이 상자에 포장된 것이 아니라 검은색의 상자에 고급스럽게 포장이 돼 있었다.

간혹 캐스팅이나 광고 진행 등을 의뢰하며 금두꺼비, 현찰 다발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에 있던 대표가 그걸 다 받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견은 협업 중인 업체에 경고 아닌 경고문을 보냈다.

업계에 이미 소문이 났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낸다?

그건 대놓고 그와 붙어 보겠다 도발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택배?

“누가 보냈습니까?”

“백영 건설인가. 거기서 보냈는데요.”

“백영 건설?”

건설이면 하 회장의 동생 중 하나가 관리하고 있는 계열사였다.

요새야 건설 시장이 많이 죽었다지만, 전에는 전도유망해 누구나 탐냈던 자리이기도 했다.

“결혼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카드도 있어요.”

“알겠습니다. 실례했네요.”

엘리베이터가 대표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비서진이 전부 일어나 인사를 하는 동안, 남자는 비서 중 하나에게 제가 들고 온 상자를 건넸다.

“오셨어요? 윤 변호사님, 아니 사모님. 아니…….”

“편하게 부르세요. 사모님이라는 호칭은 과소평가지.”

“아, 예. 죄송합니다. 윤 변호사님은 좀 어떠세요?”

“멀쩡해요. 같이 출근했어요.”

견은 그렇게 말하며 수연을 보았다.

수연은 태연한 얼굴로 자리를 옮겨 택배를 가져온 남자에게 서명을 받았다.

서명을 마친 남자가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견이 남자를 불러세웠다.

“잠깐.”

“예?”

“거기 서 있어요. 이 비서, 그거 열어 봐요.”

“이 상자요?”

“응.”

수연은 상자를 묶은 끈을 제거하고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형형히 빛나는 조각품이 보였다.

크기는 작았으나 크리스탈이 알알이 박혀 있어 영롱한 빛을 내뿜는 조각품은 언뜻 보아도 굉장히 고가일 것 같았다.

하.

어처구니없는 숨이 견의 입술 새로 샜다.

이러려고 그랬구나, 처음부터.

“백영 건설 누가 보냈어요?”

“예?”

“보낸 사람 이름이 있을 거 아냐.”

“직원분 이름은 모르는데. 그냥 보내면 될 거라고.”

“그쪽 퀵은 접수할 때 이름도 안 받나?”

“…….”

“아니면 백영 건설에서 보낸 게 아니겠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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