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저 새끼가.
견은 명백한 도발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정서는 은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더니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손님인데 선물은 날 위해 준비했어?”
“그러니까요. 병문안 올 때 빈손으로 오긴 뭐 했나 봐요.”
“그정도 염치를 아는 사람이 얼굴 보지도 않고 갔어?”
흰 수국을 가지고 병문안을 올 여자.
묻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다만 견이 궁금한 것은 여기까지 찾아왔음에도 들어오지 않은 것이었다.
어떤 상태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고가 났다면 오히려 좋아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여자의 고약한 성미라면.
어쩌면 이미 상태나 상황에 대해 전부 파악한 것일지도 모른다.
“놓친 게 아쉬우면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만나던지.”
“아직 안 갔어?”
정서의 물음에 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배는 안 고파요? 언제 퇴원할 수 있다, 이런 얘기는 없고?”
“내일이라도 원하면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아.”
“무리하는 거 아닌가? 무리했으니까 못 깨어난 거 아니야.”
“오래 자서 오히려 개운해. 근데 혹시 너…….”
정서는 말을 이으려다 멈칫했다.
사진 찍은 사람들에 관해 혹시 뭐 알아낸 게 있는지 묻고 싶었으나, 어쩐지 염치가 없었다.
그들이 누군지 알아내려다 사고가 났다. 미행이 붙은 것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할 만큼 둔했던 그녀였다.
“사진 찍은 사람들, 번호판이 가짜라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망설이는 그녀 대신 은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가짜 번호판을 쓸 정도면 일반 기자는 아닐 것이다.
사진을 가지고 협박할 생각이었다면 지금쯤이면 연락을 했을 테고, 기사를 낼 예정이라면 형식상으로나마 의견을 물어보기 위해 연락을 했겠지.
“차는? 트럭 운전사 분하고는 얘기해 봤어? 그분은 다친 곳 없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정서가 묻자 은호는 순간 묘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예의 부드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멀쩡해요. 제 차는 엉망이 됐지만 보험도 들어놨고. 트럭은 다행히 별로 안 망가졌어요. 쌍방 과실 인정 돼서 대충 보험사가 알아서 해 줄 것 같던데요.”
“다행이네.”
“결혼 앞두고 다쳐서 어떻게 해요?”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뭐.”
“아픈 신부를 데리고 꼭 결혼을 해야겠대요, 철없는 신랑이?”
은호가 물으며 견을 보았다.
견이 같잖은 도발을 하는 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붙을 것 같자 상황을 환기하려는 듯 정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호와 견이 동시에 정서를 부축하려는 듯 다가섰다.
덕분에 두 사람의 몸이 닿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몸을 떼어냈다.
닿은 부분을 털어내기까지 하는 은호의 모습에 견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정서는 그런 두 사람을 조금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한쪽에 놓여있는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청첩장.”
“청첩장?”
“와도 된다고, 내 결혼식에.”
따로 만나서 전해 주는 것보다, 견의 앞에서 주는 편이 나았다.
괜히 다른 생각을 하고 질투나 불안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묘한 표정으로 청첩장을 받아 든 은호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살면서 청첩장을 받을 일은 별로 없었지만,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정도는 확실히 알았다.
다른 청첩장과 달리 견과 정서의 청첩장에는 부모의 이름이 없었다.
‘하견과 윤정서의 결혼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그 깔끔한 문구가 전부였다.
하 회장은 이 청첩장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서야 적어 봤자 도움이 될 것이 하나도 없는 아버지의 이름을 제한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견의 경우는 달랐다.
오직 초대된 사람만 올 수 있을 이 결혼식은 사실상 하 회장의 인맥을 초대하는 자리나 다름없을 터였다.
“내가 본 청첩장 중 가장 심플하네.”
“장소, 일시, 신부와 신랑의 이름. 이거 말고 필요한 게 또 뭐가 있지?”
청첩장만큼이나 심플한 답변이었다.
견은 심드렁한 얼굴로 은호를 보았다.
은근한 눈빛 안에는 멀쩡한 걸 확인했으면 그만 나가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아, 그것도 말했어요? 부케.”
“아……. 응. 근데 너 진짜 누구 생겼어? 그럼 결혼식에 같이 와.”
정서는 내심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저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던 은호가 새삼 누군가를 사귀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은호의 외모라면 애를 쓰지 않아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겠다 싶기도 했다.
이런 무심함과 무지함.
견은 새삼 정서가 이런 종류의 애정이나 관심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 것을 용케 눈치채 준 것이 다행이었다.
“글쎄요. 밥이 맛있어?”
“응. 맛있대.”
“그럼 생각해 볼게요. 대신 축의금은 안 낸다?”
“이제 그만 가지.”
끝내 이 말을 뱉게 만든다.
정서는 저를 빤히 보는 은호에게 괜찮다는 듯 작게 웃어 보였다.
그 친절과 다정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까지도 정서였으므로 견은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만 갈게.”
“내가 배웅하지.”
“아, 필요 없는데 이런 친절. 사양하고 싶은데?”
“따라 나와.”
견은 은호의 어깨를 툭 쳤다.
은호는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기며 정서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정서는 유순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따라 인사했다.
어쨌든 청첩장도 전달했고, 정서와 은호의 부상이 크지 않고.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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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바빠. 선약 있는데?”
“누구랑.”
“응?”
“나한테 온 손님 만나러 가는 건가?”
어느 정도 병실에서 떨어지자 견이 은호의 앞을 막아섰다.
쓸데 없이 눈치만 빨라서.
짧은 한숨이 입술 새로 샜다.
“바라는 게 그쪽 변심인지 아니면 윤정서의 변심인지도 모를 그 여자?”
“뭘 알아낸 거야?”
“내가 알아낸 게 궁금할 염치가 있나? 내가 말했지. 윤정서가 위험에 처하는 건 모두 그쪽 때문이라고.”
“설령 그렇더라도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닐 것 같은데. 너는 네 할 일에 집중해. 하곤을 무너뜨리는 게 목표면, 하곤을 무너뜨려. 괜히 윤정서 건드리지 말고.”
“…….”
잠깐 침묵이 흘렀다.
견과 은호 누구도 섣부르게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은호가 하 회장을 어떻게 하려드는 건 견의 입장에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의 복수와는 무관하게, 은호는 은호의 복수를 하면 되었다.
물론 은호가 할 수 있는 복수라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은호가 복수할 기회마저 앗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견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거 내가 할 말 아닌가?”
한참만에 입을 연 은호는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은호는 견이 우스웠다.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징징대는 어린애로 보였다.
정말 복수를 하고 싶긴 할까.
그렇다면 아버지의 꼭두각시처럼 백영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자리에 앉지 말아야 했고, 결혼을 빌미로 정서를 잡아두지도 말아야 했다.
“노선 똑바로 정하는 게 좋을걸. 윤정서를 지키고 싶은 건지, 복수를 하고 싶은 건지. 언젠가 선택해야 할 거야. 손 잡고 벼랑에서 떨어지고 싶은 거 아니면 너무 세게 움켜쥐고 있지 마.”
은호는 제 앞을 막아선 견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견이 그런 은호를 돌아보다 핸드폰을 꺼냈다.
수연이 굳이 여기까지 와서 그들을 보고 가지 않았다면, 심지어 은호와 접촉까지 했다면 그녀 역시 사건에 가담했다 보는 편이 옳았다.
차은호만 알고 하견은 모르는 것.
그게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신호음이 한참 가다가 끊겼다.
수연이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먼저 수연에게 연락하는 일도 드문 일이기는 했지만, 찝찝한 일 투성이었다.
“뭡니까.”
그때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남자 둘이 정서의 병실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견은 그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아, 수사 때문에 왔습니다. 사고 정황을 그래도 듣긴 해야 해서요.”
“이 늦은 시간에?”
“깨어나셨다고 해서 상태도 볼겸 들른 겁니다.”
“평범한 교통 사고에 유난히도 정성스러우시네요. 공권력이 언제부터 이랬나?”
“그게……. 보통 분이 아니시라고 들었는데요. 하루 빨리 사건 종결시키라고 연락이 와서. 저희도 평범한 교통사고라 오래 끌 생각 없고. 따지자면 쌍방 과실이기도 해서요. 무엇보다 트럭 운전사 분이 꼭 사과를 드리고 싶다고 하셔서.”
설마 하 회장이 별도로 연락을 취했나?
그래 봤자 정서는 차에 동승한 동승자 중 하나일 뿐인데.
“무슨 일이에요?”
바깥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나온 정서가 앞에 선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중 한 남자는 낯이 익은 남자였다.
이전에 정서와 장소영이 얽힌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였다.
“형사님이 여길 왜.”
“그야 이번 사건 담당이니까 그렇죠.”
“이 사건 담당이라고요?”
의아함을 펼치기도 전에 두 남자는 정서를 에워싸고 질문을 해대기 시작했다.
사건의 전후 상황을 묻는 질문에 정서는 자신을 찍던 남자의 존재를 숨기고 차분히 대답했다.
위협 운전을 하며 뒤따르는 차가 있었고, 그 차를 피하려다 사고가 났다는 진술을 하는 정서를 보던 두 남자의 표정이 묘했다.
“그래요?”
“운전한 차은호 씨와 진술이 다른가요?”
“아뇨, 비슷하게 진술하셨습니다. 그럼 완전히 사고인 거죠, 이번 사건은?”
“네. 트럭 운전사 분도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질문을 마친 남자들이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그 트럭 운전사, 만날 수 있나?”
견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