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뻔뻔하게 여길 왔네. 아, 맞다. 그쪽 특기이자 취미지, 뻔뻔함은.”
“……뭐?”
은호는 엘리베이터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리고 수연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한 번 보더니 제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보았다.
그 핸드폰의 주인은 은호가 아니었다.
수연 역시 이상한 느낌을 느끼고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황급히 내렸다.
은호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었다.
동시에 전화가 끊겼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그래, 뭐. 덕분에 빨리 만나고 잘 됐어.”
은호의 등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수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번뜩이는 눈빛이, 까맣게 물든 채 형형이 빛나는 눈동자가 어쩐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전에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약간의 경계심과 호기심을 보였다면 지금은 명백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전에 봐야 할 게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려.”
“…….”
수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기다릴 생각도 없거니와 당장 은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서가 은호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수연은 은호의 정체를 곧장 조사했다.
명문대 휴학 중인 것으로 보아서는 머리가 제법 좋았으며 집안의 소득 수준은 높지 않았다.
서울에 위치한 오피스텔에서 자취 중이고 아버지는 서울 근교 시골에 홀로 사는 중이며 가족관계 기록에는 한 번도 어머니가 기록되지 않았다.
어쩌다 정서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법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서가 맡았던 사건 관련인도 아니었다.
연예인 지망생으로 보아도 무방한 외모였으나 그쪽으로도 활동한 이력이 없다.
대체 누구지.
누군데 윤정서 일에 오지랖 넓게 나서지.
“왜 대답을 안 해?”
아는 게 별로 없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차은호는 윤정서를 좋아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할 남자는 세상에 없으니까.
“……지금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왜?”
“본부장님이 와계시거든.”
“그래?”
은호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찰나에 스치는 불쾌감을 수연은 놓치지 않았다.
다 들킨 이상 기댈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으니까.
“좋아하지, 윤정서.”
수연이 대뜸 말했다.
은호는 손을 들어 제 눈썹께를 긁적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수연을 보았다.
“그래 보여?”
“모르면 바보 같은데.”
“역시 바보 맞았네.”
“뭐?”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은호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그렇게 보는 게 이상하진 않을 것 같은데.
수연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은호에게서 시선을 떼 병실 쪽을 바라보았다.
오래 머물다간 두 사람이 접촉했다는 것을 들킬 것이다.
그래서 좋을 것은 없었다.
지금 약점을 잡힌 건 명백히 자신이었기에.
“일단 가자.”
“어딜.”
“얘기 나눠야지.”
“기다리랬잖아, 내가 확인할 게 있다고.”
“지금 가 봤자 유쾌한 풍경은 못 봐. 고작 그거 보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거 아냐.”
수연이 손을 뻗어 은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은호가 고개를 내려 자신을 잡은 수연의 손을 가만히 보더니 곧 그 손을 떼어냈다.
잠깐 닿은 그 손에 담긴 열기가 뜨거워 수연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츠렸다.
“유쾌하지 않은 건 이쪽이지. 답게 굴어. 누구 걱정하는 타입 아니잖아?”
“…….”
말끝이 매섭도록 날카로웠다.
아직 경계하는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나올 필요는 없을 텐데.
수연은 저도 모르게 서운함을 느꼈다.
“날 뭐 얼마나 안다고 나다운 걸 운운하지?”
“아, 불쾌했어? 사람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인데 고작 이런 게 불편할 줄은 몰랐네.”
“그게 무슨…….”
“모르는 척은 적당히 해. 어차피 안 통하는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기다려. 그냥 가면 다음번에 우리가 마주 보는 곳은 교도소일 테니까.”
“뭐?”
은호는 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수연을 지나쳐 걸었다.
간신히 어깨가 부딪치는 것을 피했으나, 닿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말투만 장난스러웠을 뿐, 은호는 수연에게 한 번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분노를 품고 있었다.
“멍청한 애는 아닌 것 같은데…….”
수연이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핸드폰을 빼앗겼다는 건 정체가 노출됐다는 건데, 그 입으로 직접 수연의 이름을 말했을 리는 없고.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으려면 찾아야 하는데 연락이 안 되니.
먼저 연락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초조하게 아래로 향하는 수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어떻게 된……. 누구세요?”
― 백영 그룹 하 회장님 비서입니다. 회장님께서 보자십니다.
&
의사가 정서의 눈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상처도 깊지 않아 무리하지 않으면 곧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을 거란 말이 전해졌다.
“처치도 간단했어요. 물론 저희 전문의가 성심성의껏 했으니 흉터도 남지 않을 겁니다. 며칠만 불편하시더라도 상처에 물 안 닿게 조심하시고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하 회장님께서 늘 저희에게 많은 기부금을 내주시는데. 저희야말로 감사하죠.”
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인사만 건넸다.
의사가 인사를 하고 빠져나가자 정서는 목이 마른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물 갖다줄게.”
“아, 고마워.”
“드레스 입은 모습, 아직 못 봤는데.”
“무슨 드레스, 아. 웨딩드레스?”
“응. 이렇게 다쳐선 불편하겠다. 뭘 입어도 예쁘겠지만, 네가 원하는 거 입혀 주고 싶었는데.”
“그래도 결혼 안 하겠단 말은 안 하네?”
“방금 네가 하자고 했잖아.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해버려야지.”
견이 장난스레 말하며 컵에 물을 따라 정서에게 건네주었다.
정서는 그것을 받아 마시다 거칠어진 견의 입술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한 잔 더 따라 봐.”
“왜?”
“너도 물 안 마셨지.”
“그랬나? 기억 안 나.”
“마셔, 너도.”
“선녀와 나무꾼.”
“응?”
“거기서 나무꾼이 볼썽사나울 정도로 볼품없잖아. 찌질하고.”
“갑자기 웬 나무꾼.”
“근데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방금 네 고백 들었을 때 내 마음이 딱 그랬어. 누구한테도 너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
낯간지러운 소리를 이렇게 잘한다.
이런 사이가 되기 전 장난스럽게 들었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정서의 마음이 조용히 요동쳤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심각한 상황인데 속도 없이 이러고 있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다가도, 견을 보면 이대로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옷이라도 숨기게?”
“아니, 옷 입혀야지. 드레스 입혀서 결혼하고 집에 와서 벗겨야지.”
“미쳤어?”
“그 질문을 살면서 백 번 넘게 들었을 텐데, 진부하지 않게 느껴지는 건 오직 너 하나뿐이야.”
견은 작정이라도 한 듯 간지러운 말들을 쏟아냈다.
사고 난 다음 움츠러들었을 정서의 마음을 나름대로 돌보는 방식이라는 걸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드르륵.
그때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은호!”
정서는 저도 모르게 반가움을 느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얼굴에 작은 생채기가 나고 손등에 반창고를 붙였을 뿐 크게 다치지 않았다.
혹 다쳤다고 자책했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깼네요. 두 분 거슬리니까 좀 떨어지실래요?”
은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실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견의 옆에 나란히 섰다.
견이 고개를 돌려 여길 왜 왔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으나 미동도 없었다.
“괜찮아요, 좀?”
“응. 난 괜찮아. 너는 어때?”
“난 너무 멀쩡하죠. 좀 미안할 정도.”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따라가라고 했다가 사고 났잖아. 다 내 탓이야. 그래도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은호가 무릎을 굽히고 정서가 앉은 침대에 바짝 붙었다.
아래에서 가련한 얼굴로 올려 보며 손을 덥석 쥐자, 견이 손을 뻗어 은호를 저지했다.
“뭐 하는 짓이야.”
“우리 누나가 다정히 말해 주는데, 고마워서 그러죠. 누나 정말 잘못되는 줄 알았어요.”
“누나……?”
은호가 정서를 누나로 부른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말을 낮췄으면 낮췄지, 정서를 연장자로 여겨 준 적은 없었다.
그런 은호의 변화가 낯선 그녀가 멍하니 은호를 내려보자, 견이 억지로 두 사람의 손을 떼어 놓았다.
“떨어져.”
“고작 이런 걸로 질투하고. 속이 종지만 하네, 간장 종지. 그치, 누나?”
“무슨 바람이 불어서 누나 타령이야. 무사한 거 확인했으면 가. 지금도 많이 참아주는 거니까.”
견이 차가운 말씨로 불퉁하게 말했다.
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서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견에게 말했다.
“누가 보러 왔던데.”
“누굴, 나를?”
“응. 손에 꽃다발을 들었어. 흰 수국을.”
견과 정서의 고개가 동시에 갸웃했다.
누가 견을 여기까지 꽃다발을 들고 보러 오지?
“근데 그냥 보냈어. 병문안 오는데 수국은 좀 그렇잖아.”
“수국이 왜?”
정서가 묻자 은호의 시선이 견을 향했다.
견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확인하겠다는 듯 황급히 나갔다 돌아왔으니 빈손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부르게 두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건 알아낸 걸 혼자만 알겠다는 건가?
무엇을 알아냈기에.
사진을 찍은 사람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그게 아니면.
설마.
뒤늦게 무언가 눈치챈 견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서가 다쳤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초조한 마음에 잊고 잇던 것이 떠올랐다.
기자가 아니라면, 누가 정서와 은호의 사진을 필요로 할지만 생각하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것.
“수국의 꽃말이 변심이거든요.”
“……변심?”
“뭐, 예쁘게 생겼으니까 선물하려던 거겠지만. 결혼 앞둔 신부에게 줄 선물로는 적절치 않잖아요?”
은호가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