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아.”
가물거리는 시야와 지끈거리는 머리에 정서는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초점을 찾을 때, 지난하게 꾸던 꿈은 모두 흩어졌다.
조금 서늘한 공기와 조용한 사위, 그리고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까지.
낯선 듯 친숙한 감각이 천천히 몸에 전해질 때 고개를 내린 그녀의 시야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견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견…….”
피로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나쁜 꿈이라도 꾸나.
무심코 생각하며 견의 옆얼굴 위로 손을 뻗다 문득 제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을 보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으로 병실 안의 풍경이 비쳤다.
한 번도 입원해 본 적은 없었지만 하 회장이 간혹 아플 때나, 아픈 척을 할 때 와본 적이 있었던 공간이었다.
일영 병원의 VIP실이구나.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다 문득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건 은호의 얼굴이었는데.
그럼 차은호는?
“……윤정서.”
견의 눈썹이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곧 눈이 뜨였다.
멍한 얼굴로 정서를 바라보던 견은 곧장 몸을 일으켜 세웠다.
꿈인지, 꿈이 아닌지 가름하려는 듯 잠시 이어지던 시선이 곧 확신으로 바뀌고.
“왜 불편하게 이러고 있어.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가칠한 목소리가 정서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견의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차게 굳었다.
정서가 손을 들어 흐트러진 견의 머리칼을 쓸어 주려 했지만, 그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닿지 않았다.
“……하견.”
“의사 불러올게. 불편한 곳은.”
“없어. 나 괜찮아. 근데…….”
정서는 자연히 은호는, 하고 물으려던 것을 멈췄다.
견은 지금 화가 난 것처럼 보였고 그건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종륭의 분노였다.
사고가 났고, 사진을 찍혔다.
견은 대뜸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고, 그 순간 정서가 은호가 같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을 것이다.
목적이 있는 만남이었다 하더라도 마냥 제 상황과 마음을 견이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기다려.”
견이 몸을 일으켰다.
등을 돌리는 몸짓은 느긋했으나, 그 안에 꾹꾹 눌러담은 마음이 너른 등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래서, 정서는 가만히 앉아서 견을 보낼 수 없었다.
“……윤정서.”
“잠깐만, 견아.”
급하게 몸을 일으켜 끌어안은 탓에 현기증이 인 정서의 다리가 떨렸다.
견은 그 와중에도 그걸 알아챘는지 손을 내려 그녀의 두 팔을 끌어 쥐었다.
간신히 돌아보지는 않았으나, 걱정되는 마음은 숨길 길이 없었다.
“움직이지 마, 함부로.”
“청첩장 줄 겸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만났어.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해. 말하고 싶었는데, 네가 너무 바쁘기도 했고…….”
“…….”
그래, 바빴지만. 그건 진짜 대답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핑계였다.
그걸 견이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침묵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하아.
정서는 숨을 골랐다.
미움 받더라도, 오해 받더라도 솔직하고 싶었다.
적어도 견을 거짓으로 속이고 임시방편처럼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사실은 너를 설득하고 싶었어. 차은호를 이용했으면 했어. 부모의 죽음까지 겪은 그애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나는 어쩐지 너만 생각하게 돼서. 차은호가 내게 가진 호의를 이용해서라도 너를 돕고 싶었어. 아니, 우리를.”
“…….”
“네가 화난 거 충분히 이해해. 나 같아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화를 내도 되고 나를 미워해도 돼. 그건 너무 타당하…….”
“윤정서.”
내내 침묵하던 견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이어 그의 손이 그녀의 손 위로 포개어지는가 싶더니, 그의 허리를 감싼 손을 풀었다.
그 찰나에 정서는 마음이 툭 꺼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렇게 밀어내기까지 할까.
견이 자신을 돕겠다고 은호의 힘을 빌릴 생각을 한 그녀 때문에 그의 마음이 얼마나 불쾌하게 일렁일지 알면서도 못내 걱정되고 서운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
“지난 몇 시간 동안 넌 물 한 모금 못 마셨어. 지금 그대로 말하면 목 상해.”
“…….”
서운한 게 아니었나, 화가 난 게 아니었나.
아니. 서운할 거다, 화도 날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견은 정서를 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도 정서부터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견이 천천히 몸을 틀어 정서를 마주했다.
정서는 저를 내려보는 견과 눈을 맞추다가 고개를 수그렸다.
눈을 맞출 자신이 없었다.
당장 견의 화를 풀기에만 급급했던 자신을, 그가 어떤 마음으로 저를 걱정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네가 사고났다는 소식 듣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 뭔 줄 알아?”
“…….”
정서는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견이 손을 내려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침울한 기운이 잠잠히 가라앉은 눈동자의 색은 짙기만 했다.
“내가 가지 않아서, 바빠서. 그래서 네가 사고가 났다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어. 너를 혼자 보낸 것을.”
“견아, 아닌 거 알잖아. 이건 다 내 잘못…….”
“누가 쫓아왔다며.”
“그건 아마 스캔들을 쫓은 기자가……. 내가 바로 잡을게. 차 번호도 기억하고, 누군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도 않아. 혹시 기사가 나더라도 금방 바로잡을 수 있어.”
견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이 마치 정서의 가슴께에 내려앉은 듯 그녀의 마음 역시 답답하고 무거워졌다.
질리게 굴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다.
자책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한참만에, 끄트머리가 거칠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견이 물었다.
“너는 지금 내 옆에 누구로 있는 거야?”
“……응?”
“사고나 치는 재벌가 아들의 변호사로 내 옆에 있는 거야?”
“…….”
“아니면 십 년 전에 그냥 지루한 생활에 재밌어 보이는 거 하나 생겨서 옆을 맴돌던 여자애로 옆에 있는 거야?”
“…….”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너는 내 곁에 있어. 내 위신, 명예, 부나 권력 따위랑 비교가 안 된다고, 너는. 그런데 왜 아직도 네가 내게 아무것도 아닌 척 굴어?”
누군가 정서의 머리를 치고 간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견은 고작 질투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어림짐작하고 못나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였다.
“스캔들 따위가 걱정됐겠어? 지금 내 눈에는 다친 너만 보이는데. 그것도 누가 너를 쫓고 위협했다는데. 고작 그딴 게?”
“……미안해.”
“나는 나 때문에 네가 망가질까 두려워.”
견은 끝내 참았던 말을 뱉어냈다.
은호가 떠난 뒤로 잠든 정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말의 의미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은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없었다면 그녀는 이런 위험에 처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영민하고 지혜로웠으니까. 심지어 남에게 모질게 구는 성미도 없이 잘 자라 주었으니까.
그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은 도리이자 이치였다.
하지만 그런 삶을 견은 모른다.
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와 함께 해야 했으니까, 다른 삶은 윤정서에게 없으니까.
“……그래도 이제 못 물러, 윤정서.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널 지킬 거야.”
“하견.”
잠깐의 침묵 사이 견의 흔들리는 마음을 정서는 눈치챘다.
그건 그녀가 아는 마음이었으니까.
정서 역시 견이 자신 때문에 망가질까 봐 두려웠었다.
“나는 오래 전에 구겨졌어. 어쩌면 태어난 순간부터. 내내 구겨지기만 했어.”
“…….”
“너를 만나서 기뻤던 건 네 말처럼 재밌어 보여서가 아니야. 나처럼 구겨진 애여서,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몰라.”
“……윤정서.”
“이기적이라 해도 좋아. 우린 완전히 빳빳한 새 종이는 못 돼. 어쩌면 이리저리 얼룩이 튀었을지도 모르고.”
정서가 견에게 다가섰다.
뻔뻔한 것을 알지만, 그에게 앞으로 더 많은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가 제 곁에 그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싶었다.
“네 옆에 있으면 난 구겨진 자국이 있어도 슬프지 않아. 필사적으로 힘을 내서 구겨지지 않은 척하고 싶지도 않고. 이런 기분은 네 곁에서만 느낄 수 있어.”
“…….”
“난 망가지지 않았어. 좀 다쳤을 뿐이고, 상처는 아물어.”
“…….”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 내 곁에 있어, 하견.”
네가 이런 마음 두 번 다시 느끼지 않게 내가 잘할 테니까.
네가 그런 불안함 느끼지 않도록 나를 지킬 테니까.
말하지 않은 마음이 견에게 전해졌다.
견은 잠시 말을 잊은 듯 정서를 그 두 눈동자에 가두듯 담더니 손을 뻗어 정서를 끌어안았다.
그 때문에 한 손에 흰 수국이 흐드러지게 담긴 꽃다발을 든 수연은 병실로 들어설 수 없었다.
비틀린 입술이 이에 짓눌려 붉게 물들었다.
애틋한 밀회를 목격이라도 한 사람처럼 뒤로 무르는 걸음이 유쾌하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려 복도를 걷다 쓰레기통으로 그대로 꽃다발을 처박은 수연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리고 번호를 확인하던 그녀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가.”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오르려던 그녀의 걸음이 멎었다.
그녀를 마주 본, 미리 타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찾았다.”
은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