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그게 무슨 말이야. 제대로 설명해.”
― 지금 병원이야. 사고가 났어.
누군가 견의 심장을 뜯어내 내동댕이 친 것처럼 가슴께가 서늘하게 저려왔다.
은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어째서 정서가 은호랑 있었는지, 은호랑 있다가 무슨 사고가 난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지금 당장 정서에게 가야 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어디야. 윤정서 상태는. 제대로 설명해.”
욕짓거리가 치고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이제는 겨우 내달리듯 해 지하주차장 문을 열어젖혔다.
차키를 찾아 주머니를 더듬는 손이 성급해 자꾸 엇나갔다.
이토록 당황하고 동요하는 견의 모습을 처음 보는 수연은 그의 뒤를 따르다 문득 멈춰 서서 핸드폰을 찾았다.
예상 대로 연락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고 발생, 연락 요망’ 이라는 간결한 문구에 함축된 뜻이 예측 가능했다.
그래서 저렇게 홀린 듯 뛰어가는구나.
“본부장님!”
수연은 견의 차로 달려가며 그를 불렀다.
지금 이 상태로 운전을 한다면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러니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이런 수연의 마음과는 별개로 이미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타는 견은 수연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 일영 병원이야. 지금 처치 중이고. 의식은 없지만…….
“백영 이름 대. 아니면 옆에 있는 누구든 바꿔. 등신 같은 너 같은 새끼랑 할 말 없으니까.”
―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십 분이면 가, 아니 오 분. 개 같이 굴지 말고 끊어.”
견은 정서의 상태를 직접 눈으로 봐야 했다.
은호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려는 때 차 앞을 막아서는 수연이 보였다.
견의 인상이 대번에 차게 굳었다.
“같이 가요, 본부장님. 지금 이 상태로 운전하셨다가 사고라도 나면.”
“두 번 말 안 해, 비켜.”
“위험합니다. 그럼 차라리 저를 데려가세요. 어차피 접수하고 처리하는 일들은 제가 맡아서 하는 게…….”
“치기 전에 비켜.”
견은 두 번 생각하지 않겠다는 듯 말하더니 곧 기어를 변속했다.
정말 출발할 기세인 견을 보고 하는 수 없이 수연이 옆으로 비켜서자 빠른 속도로 차가 출발했다.
끼익하는 소리가 지하주차장 안에 요란하게 울리고 곧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로 들어선 차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호 몇 개를 무시하고 속도를 올려 달렸으나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응급실 쪽 주차장에 대충 차를 세워두고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견을 병원 씨큐리티 가드가 막아서려 쫓았다.
“잠시만요! 여기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접수부터.”
“어딨어.”
“보호자분 되세요? 우선 방문증을 받아야 응급실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윤정서 어딨냐고.”
견은 저를 막아서는 간호사와 씨큐리티 가드의 말을 듣지 않고서 거친 손길로 커튼을 휙휙 젖혔다.
응급실 내부의 환자와 보호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쏟아졌을 때였다.
“하견.”
견을 부르는 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장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자, 목에 ‘윤정서 보호자’ 라는 네임 태그를 차고 있는 은호가 보였다.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견의 안에서 치밀었다.
“어딨어, 윤정서.”
“지금 씨티 찍으러 검사실 들어갔어. 혹시 다른 충격을 받은 게 없는지 본다고…….”
퍽.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견이 은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은호는 피하지 않고 그것을 맞았다.
몸이 크게 기울며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입술 새로 비명이 샜다.
“지금 이러시면 안 됩니다! 병원에서 뭐 하는 짓이에요.”
“백영 그룹, 하견입니다. 씨티실 어딥니까.”
“……일단 진정 하시고.”
“보호자가 환자를 찾는 게 진정까지 필요할 일은 아닐 텐데.”
서늘하고 조금은 섬뜩한 견의 목소리를 들은 간호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릴 즈음, 응급실 유리문이 열리고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윤정서!”
견은 빠른 걸음으로 이동식 침대에 다가갔다.
정서는 희게 질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속눈썹이 아래로 짙게 드리운 그림자 때문인지 유난히 여위어 보이는 그 모습에 견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상태 설명해.”
“예?”
“의사 아닙니까?”
“아까 본 보호자 분이 아니신데, 누구…….”
“말해드려.”
그때 급하게 달려온 듯한 중년의 남자 의사가 숨을 몰아쉬며 응급실 전문의에게 말을 건넸다.
백영 그룹에서 왔다는 소식이 전달된 모양이었다.
견은 손을 내려 조심스럽게 정서의 손을 쥐어 보았다.
아직 따뜻했다.
그의 손이 닿자 정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도 같았다.
“외상이 있었습니다. 교통 사고가 나면서 옆구리쪽이 조금 찢어졌는데 크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꿰매서 처치했고, 평소 있던 빈혈과 과로 등의 여파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씨티 상 소견은? 다른 특이점은 없고?”
침묵하는 견 대신 중년 의사가 다시 물었다.
기합이 들어간 전문의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큰 걱정할 필요 없다고 연신 말을 이었다.
“일인실이 준비되는 대로 옮기겠습니다. 회복하실 때까지 편히 머물다 가실 수 있도록.”
“…….”
견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정서는 응급실 한쪽에 마련된 자리에 누워있었다.
허리를 숙인 채 한참이고 정서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견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정서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다행이었다.
크게 다치지 않아서, 윤정서를 잃지 않아서.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터진 입술을 닦을 생각도 없이 뒤에 서서 정서의 모습을 살피던 은호를 향해 견이 물었다.
은호는 분명히 그에게 도와달라고 했었다. 심지어 정서가 위험하다고도 했었다.
단순히 사고 때문에 당황해서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정서의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걸로 봐선 다른 이유가 있는 거였다.
“미행이 붙었어.”
“미행?”
“응. 같이 차에 타고 있던 우리를 사진으로 찍었고, 그걸 본 윤정서가 차를 쫓아가라고 말했고.”
윤정서라 이름을 부르는 은호를 건방지다 생각하면서도 딱히 대꾸하지 않은 건 친밀한 호칭으로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물론 화를 낼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따라가라고 해서 진짜 따라가? 운전을 어떻게 했길래 사고가 난 거지.”
“트럭이 신호를 급하게 받아 왔어. 원래대로라면 부딪히지 않는 게 맞아.”
“미행하던 차는 놓쳤어?”
“번호를 외워뒀어. 물론 조작된 번호판일 가능성이 크지만.”
“차 종류는.”
“검은색 세단. 타고 있는 건 남자 둘. 기자는 아닌 것 같았고.”
문득 쎄한 감각이 견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누군가 정서를 쫓았다면, 그래서 정서가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찍었다면 그럴 명분이 필요했다.
견과 관련된 스캔들이 필요한 사람, 견과 정서의 사이로 떠들고 싶은 사람.
보편적으로는 기자인 것이 타당했다.
정서에 대한 기사가 세간을 뒤흔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두 사람이 곧 결혼한다는 소식이 찌라시처럼 돌았을 테니 기자가 붙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자가 아니라니.
그럼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서의 미행을 사주했다는 것인데.
“고작 미행 때문에 나한테 도와달라고 한 건 아닐 텐데. 사진이 찍혀서 그런가?”
견이 은호를 마주보았다.
한 손으로 여전히 정서의 손을 움켜쥔 채였다.
은호는 저를 보는 견을 마주보다가 시선을 잠시 정서에게 두었다.
단순히 둘의 사진을 찍고자 한 것이었다면 이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 사람들을 찾아내 사진을 지우고 다시는 윤정서를 건들지 못하게 협박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아니겠지. 너라면 그 사진이 반가울 테니까.”
“…….”
“윤정서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수도 있잖아. 그럴 린 없지만. 멋대로 희망하는 게 네 특기인 것 같으니.”
“정말 모르는 건가?”
“뭘.”
“이 모든 게 너 때문이라는 거.”
창문을 내려 사진을 찍었다.
그정도로 필사적으로 사진을 찍을 이유는 무엇일까.
기자라면 특종 보도를 위해서일 테지만 기자가 아니라면.
어쩌면 사진을 찍는 게 목적이 아닐 수가 있었다.
사진을 찍는 것처럼 위장해 둘을 도발하고, 그로 인해 사고까지 이끈 것이라면.
“사고의 원인은 네 운전 미숙이 아닌가. 뻔뻔스럽게도 내 탓을 하고 있네.”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윤정서와 함께 있었는지.”
“네게 묻지 않아도 돼. 도움을 청할 거면 제대로 청하고 꺼져. 너랑 정서가 같은 공간에 있는 거 불쾌하니까.”
“윤정서 포기해.”
“뭐?”
“기자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일을 벌였을지 짐작이 가?”
“…….”
견은 잠시 침묵했다.
하 회장 쪽이 유력했으나, 하 회장은 결혼이 제대로 진행되기를 바랄 것이다.
사회적 위신과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결혼 전 신부가 크게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터였고.
혹 하 회장이 붙인 사람이 무리하게 정서를 뒤쫓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진즉 사람을 보내 상황을 확인하러 왔을 것이다.
미리 하 회장 측 사람이 오지 않았으니, 이제야 소식이 들어갔을 테고.
하 회장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짓을 벌이지.
신경호와 장소영이 차례로 머리를 스쳤다.
그 악의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을까? 정서를 이런 위험에 빠트릴 만큼.
“네 옆에서 윤정서는 다치기만 할 거야.”
“다치게 한 장본인에게 그딴 말을 듣고 싶진 않네.”
“어쨌든 윤정서 곁을 지켜. 혼자 두지 말란 소리야.”
내가 데리러 올 때까지.
은호는 뒷말은 삼킨 채 몸을 돌렸다.
아까부터 한 가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확인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일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바람이 단순한 스캔들인지, 정서를 제거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