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아까부터 거슬렸다.
언제부턴가 검은색 세단이 그들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러 차선을 애매하게 타고 무리하게 좌회전을 해 우회해도 세단은 멀어지지 않았다.
이쯤 되면 확실했다.
미행이 붙은 것이.
“그게 무슨 말이야?”
돌연 차를 세우는 은호를 정서가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서가 고개를 돌리자 얼핏 검은색 세단이 보였다.
멈춘 그들의 차를 보고 속도를 늦추던 그 차는 다시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부딪히려나? 싶을 즈음 차선을 변경해 은호의 차 왼편으로 들어서더니 속도를 늦춘다.
“저 차 본 적 있어요?”
정서는 차의 번호판을 살피려 몸을 은호의 쪽으로 기울였다.
그때였다.
밝은 플래시가 터졌다.
은호와 정서가 동시에 눈을 찌푸렸다.
상대 차의 창문이 내려지고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 둘이 차에 타 있는 것이 보였다.
“고개 숙여요.”
은호가 손을 뻗어 정서의 얼굴을 가렸다.
창문 밖으로 비쭉 튀어나온 카메라는 그 후로도 몇 번 플래시를 터뜨리며 그들을 찍었다.
썬팅된 차 외관 때문에 얼굴이 완전히 나오지는 않겠지만, 실루엣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쫓아가.”
“네?”
“얼른!”
정서는 소리쳤다.
그들이 뭘 원하고, 누구의 사주로 둘을 미행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 회장 쪽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고용했는지.
목표가 정서인지, 은호인지. 그것도 아니면 견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또 순진하게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하, 진짜. 겁이 없어도 너무 없다니까.”
은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무언가 마음에 든 사람처럼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곧이어 빠르게 출발하는 차가 신호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검은색 세단 뒤를 맹렬히 쫓기 시작했다.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듯 차는 황급히 차선을 변경해 우회전을 했다.
“벨트 잘 맸어요?”
“응. 걱정 말고 쫓아가.”
“멀미하잖아요, 차.”
“상관없으니까, 얼른!”
은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세단의 뒷모습을 찍는 정서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평소 운전을 부드럽게 하는 은호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칠 수밖에 없었다.
빠앙!
순간, 예비 신호가 들어왔던 신호등이 정지 신호로 바뀌며 옆에서 불쑥 차가 치고 들어왔다.
“윤정서!”
놀란 은호가 제가 매고 있던 안전벨트를 손으로 풀어 버리며 정서에게 손을 뻗어 머리를 감쌌다.
그 순간에 트럭이 그들이 타고 있던 차의 옆구리를 쳤다.
순식간에 몸이 흔들리며 차 유리가 금이 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어백이 터지며 그들의 몸을 감쌌으나, 몸에 전해지는 충격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명이 울리듯 귀가 멍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어두웠다 밝아지며 깜빡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모든 상황이 느릿하게 여겨지며 현실감이 무뎌지자, 정서는 제 어깨를 붙든 은호를 보았다.
은호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차…… 은호.”
웅얼거리는 정서의 목소리를 들은 은호가 뭐라고 말하는 것이 보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하필이면 정서가 타고 있던 조수석 근처로 트럭이 부딪히는 바람에 옆구리로 전해지는 통증이 컸다.
“미안해요, 내가. 나 때문에…….”
“너 이마에…… 피…….”
입술을 달싹이던 정서의 고개가 아래로 툭 꺾였다.
트럭에서 뒤늦게 나와 신고를 하는 기사의 목소리도, 멀리서 환청처럼 들리는 사이렌 소리도 모두 들리지 않았다.
은호가 다급하게 정서를 끌어안았다.
&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표님.”
아침 일찍 백영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사임 기사가 나자마자, 견이 대표 이사직에 오른다는 공지가 전사에 메일로 돌았다.
아무리 내정돼 있었다지만, 이렇게까지 빠르게 밀어 붙여진 것은 다소 이례적인 일이었다.
덕분에 종일 견은 미팅을 해야만 했다.
만나 달라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재한 그룹이 큰 금액을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도 한몫했다.
“아까 내가 벗어둔 외투, 이 비서가 가져갔나?”
견이 회의실에서 빠져나오며 흘깃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가지고 있던 외투를 들어 올렸다.
주라는 듯 손을 뻗는 그의 손짓에 수연은 바짝 그의 뒤로 붙어섰다.
“입혀드리겠습니다.”
“굳이?”
견의 물음엔 명백한 거절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고작 이런 반응으로 물러설 수연이 아니었다.
수연은 꿋꿋이 재킷을 펼쳤고 견에게 눈짓했다.
얼른 팔을 벌리라는 뜻에 더 씨름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마친 견이 팔을 벌렸다.
“미팅 들어간 동안 온 연락 없습니까?”
“글쎄요. 소리 들은 건 없는데…….”
지금쯤 정서는 예식장에 도착해 이것저것 설명을 듣고 있겠지.
결혼을 해본 적도, 결혼식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는 그였지만 생각보다 많은 품이 들고 신경 쓸 것이 많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역시 같이 갈 것을 그랬다며 후회하는 견에게 수연이 말을 붙였다.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좀 있으시니, 본부장실에서 한숨 돌리시죠.”
“저녁 식사 자리 꼭 가야 하나? 나 없이 피디랑 매니지먼트가 알아서 잘 조율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꼭 보고 싶다 청하셨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쩌면 배우님도 자리하실지 모른다고 해서 담당 피디도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승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네.”
“따뜻한 차라도 준비해드릴까요?”
견의 빠른 걸음에 맞춰 걷기 위해 수연은 발을 재게 놀렸다.
싹싹하게 말을 붙여 오는 수연에게 아무런 대꾸 없이 견은 외투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정서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울리는 것이 들렸다.
“…….”
그의 냉담한 반응을 보고 잠깐 얼굴이 굳었던 수연은 곧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오길 기다리는 동안 견은 신호음을 몇 번 들었으나 상대는 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거려 할 때였다.
수연이 견에게 조금 붙어 섰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견의 어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견이 물끄러미 수연을 내려다보자, 먼지를 바람에 날려 보내는 수연이 보였다.
“먼지가 붙어 있어서요.”
수연이 씩 웃었다.
환하고 예쁜 얼굴이었으나, 견에게는 아무 감흥 없는 모습일 뿐이었다.
“직원들이 볼 수도 있으니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비서.”
“주위 시선을 신경 쓰시는 줄 몰랐어요. 워낙 과감하셔서, 평소에.”
“말에 뼈가 있네.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나, 이 비서?”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견이 헛웃음을 지으며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이 순간에도 생각나는 것은 오직 정서뿐이었다
그래도 그냥 보러 갈까?
식사 시간이야 좀 늦으면 그만이고.
“이 비서, 저녁에 좀 늦는다 전하세요.”
계단으로 발을 돌리는 견의 뒤를 수연이 따라붙었다.
말하지 않아도 견이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잠깐을 떨어져 있을 수 없을까. 이런 마음을 대체 그동안 어떻게 숨긴 걸까?
윤정서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저렇게 맥을 못 출까.
평소엔 냉담하고 무심하기만 한 사람이 대체 어떤 매력에 휘둘리길래.
그런 걸 생각하면 수연의 마음이 차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어디 가시게요, 대표님.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대표님 일정을 웬만하면 다 쫓으라고 하셨…….”
“누가요.”
“네?”
우뚝, 견이 멈춰 섰다.
수연은 아차 싶었다.
질투심에 눈이 먼 나머지 말실수를 해버렸다.
누구의 지시인지 들켜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좀 더 치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수연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누가 나 쫓으라고 했는데.”
“…….”
“이제 숨길 생각도 없나? 이 비서가 회장님의 개라는 사실을.”
“조금 모욕적인 표현이네요, 대표님. 저는 그저 충실히 대표님을 보필하라는 박 실장님의 말씀을 따를 뿐인데요.”
뻔뻔하고 능숙하게 빠져나가는 수연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견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이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뭐야.”
― 전화 받는 매너하고는. 너는 후계자 교육을 아주 X같이 배웠구나?
“용건.”
― 혹시 너 세 글자 이상 말하면 어디 아프고 막 그러냐? 대표가 되더니 안 그래도 빈약했던 싸가지가 아예 멸종하셨네.
“끊는다.”
― 아, 잠깐만! 너 결혼 엎어졌어?
이어지는 실없는 소리에 안 그래도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한 견이 전화를 끊으려 할 때였다.
다급히 들린 목소리에 그가 다시 수화기를 가져다 댔다.
“그게 무슨 소리야?”
― 안 왔어.
“누가.”
― 네 와이프. 아니, 그러니까. 지금은 여자친군가? 아무튼, 윤정서. 네가 예약해 달라고 해서 무리하게 스케줄 다 잡아 줬더니 안 왔다고 나한테 무슨 일이냐고 묻던데? 내가 이런 연락까지 일일이 받아야겠냐.
정서가 예식장에 오지 않았다고?
견의 얼굴이 굳었다.
수연은 심각해 보이는 견의 얼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자연히 알 수 있었다.
“끊어.”
견은 전화를 끊고 다시 정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비상구로 향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대표님!”
그 뒤를 다급히 수연이 따르는데 지루하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끊겼다.
“윤정서, 너 어디야. 무슨 일…….”
전화를 받자마자 말을 쏟아내던 견의 목소리가 멎었다.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지금 전화 받은 상대가 정서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야, 너.”
― 도와줘.
“뭐?”
― 윤정서가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