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85)

63.

“벌써 딸기가 나오더라. 하도 생긴 게 예뻐서, 정서 씨 먹이고 싶어서 샀는데. 달까 모르겠어.”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마주하고 있는 정서와 견을 살피며 미희가 말을 걸어왔다.

정서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견에게 눈짓으로 아무튼 은호를 결혼식에 초대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냉큼 미희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딸기 좋아해요.”

“정말?”

“네. 냄새가 벌써 단데요?”

언제 저렇게 능구렁이가 됐지?

미희의 뒤를 따라 멀어지는 정서를 보던 견이 한숨을 내쉰 채 헛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구는 건 귀엽지만 저 모습을 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차은호는.

하 회장을 만나기 위해 결혼식장에 오겠다는 걸까?

다른 명분으로는 하 회장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보아하니 백영 식품의 대표인 하종훈은 백영 식품을 지킬 생각이 없었으니, 조만간 식품은 팔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챙긴 현금으로 하 회장이 무엇을 할지 알아내야 했으나, 하 회장은 제 계획을 쉬이 알리는 법이 없으니 소수의 측근들만이 알 테지.

확실히 지금 견에게는 조력자가 너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은호가 조력자가 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는 것인가, 정서는.

“……딸기 드세요, 본부장님.”

견이 한참 움직이지 않자, 정서가 부엌에서 빼꼼 고개를 내어 그를 불렀다.

견은 시선을 돌려 정서를 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서가 순진하게 구는 건 좋은 일이다. 기왕이면 마음껏 순진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그런 순진함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일 텐데.

그녀가 아직 그것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견은 기쁘고 좋았다.

다만, 그 믿음이 은호를 향한 것이 불편했다.

왜 하필 그 자식일까.

불쌍하고 어리고 잘생긴, 그 놈.

“난 딸기 별론데.”

그렇게 말하며 정서의 옆자리에 앉자, 정서가 제법 매서운 눈빛을 하고 견을 보았다.

사 온 사람 무안하게 타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네가 별로든 어쩌든 난 상관 안 해. 너 먹이려고 산 거 아냐.”

그러나 미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포크로 탐스런 딸기 한 알을 집어 정서에게 건넬 뿐이었다.

“어, 먼저 드세요.”

“난 이 닦은 지 얼마 안 돼서, 괜찮아. 얼른 먹어 봐요.”

정서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입을 벌렸다.

미희는 뿌듯한 표정으로 정서의 입에 딸기를 쏙 넣어 줬다.

곧 새콤하고 달큰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갔다.

정서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달아요, 맛있어요.”

감탄하듯 말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견이 저도 모르게 웃자, 그 모습을 본 미희 역시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고는 딸기 한 알을 더 집어 견에게 내밀었다.

견은 포크를 손으로 받아 들었다.

“네가 딸기를 좋아했었나? 별로 먹는 거 못 본 것 같은데.”

“좋아해.”

“근데 왜 안 먹었어? 사 달란 말도 안 했잖아.”

“그냥 어려서 먹을 기회가 없다 보니 안 먹어졌어.”

딸기는 비쌌다.

작은 게 배도 잘 차지 않는 게 어찌나 비싸던지.

그래도 겨울이 되면 꼭 한 번은 할머니가 딸기를 사 왔다.

정서 먹이겠다고 산 딸기를 냉장고에 숨겨두면 정서는 그게 아까워서 참고 또 참다가 다 물러져서야 뒤늦게 할머니와 바삐 먹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선 제 돈으로 딸기를 사 먹은 적이 없었다.

딸기를 좋아한단 말도 한 적이 없었으니, 견이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많이 먹으면 되지. 견이 너, 알지? 부인이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새벽에도 나가서 사 와야 하는 게 남편이야.”

“그런 건 어렵지 않지. 윤정서가 뭘 먹고 싶다고 말해야 문제지.”

견은 그렇게 말하면서 정서에게 딸기 한 알을 또 내밀었다.

정서가 포크를 손으로 가져가려 하자, 견이 씁하며 손을 뒤로 뺐다.

입을 벌리라는 듯 ‘아’ 하고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정서의 시선이 미희를 향했다.

지금 이모님 앞에서 입을 벌려 딸기를 받아 먹으라는 건가?

“팔 떨어지겠다.”

“…….”

“아까 이모가 주는 건 잘 받아 먹었잖아, 정서야.”

하는 수 없었다.

부끄러운 달콤함이 다시금 정서의 입 안에서 퍼져나갔다.

식탁 아래로 정서가 견의 허벅지를 슬쩍 꼬집었다.

물론 탄탄한 허벅지가 손가락 새로 잘 잡히지도 않았고, 잡힌 것을 세게 꼬집지도 못했지만.

그 간지런 감촉에 견은 손을 들어 제 입술 부근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별안간 미친놈처럼 실실 웃으면 미희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했으니까.

“그래서 식장은 어디로 했어?”

“재한 재단의 더 그레이스 호텔로.”

“거기 자리가 났어? 정서 씨랑 상의는 한 거야? 마음에 드는 거 맞아요? 너 또 날 빨리 잡고 싶다고 이것저것 재지도 따지지도 않고 멋대로 밀어붙인 거지?”

미희의 물음은 정확했다.

가족끼리 서로를 잘 알게 되는 게 마치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이번엔 견이 손을 뻗어 식탁 아래로 정서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이상하게 안정감과 따스함을 주는 손길과 무게감에 정서가 입을 열었다.

“……저랑 상의해서 정했어요.”

“벌써부터 편들고 그럼 애 버릇 나빠져요, 정서 씨.”

“이번엔 형식상으로 하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다음에 다시, 윤정서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 줄게.”

“결혼 전엔 말만 다들 번지르르 하지.”

“이모. 내가 노총각으로 늙어 죽는 거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견이 결국 불만을 터뜨렸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으나, 미희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정서 씨 말 잘 들어. 그리고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어려워 말고 연락해요.”

“네. 이모님도 혹 필요한 일 있으시면 편히 연락하세요. 저 그렇게 바쁘지 않아요.”

“어쩜 거짓말을 해도 이렇게 예쁠까.”

그때였다.

뿌듯하게 웃으며 정서를 보는 미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데리러 오라고 해 놓고선. 이제 가 봐야겠다. 결혼 전에 꼭 밥 먹어요, 우리.”

“이모, 지금 만나는 남자분은 대체 이모 어디가 좋대?”

“너는 말을 해도 꼭. 정서 씨 반만 닮아라.”

“연락드릴게요.”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를 하는 정서를 뒤로한 채 미희가 빠르게 현관을 벗어나고 곧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차 소리가 들렸다.

울리는 전화기만 봐도 대번에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니, 미희는 지금 만난다는 남자를 많이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좋아 보였다.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이 견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기도 했다.

“질투 안 해?”

“응?”

“넌 어떻게 그래. 내가 너라면 질투할 텐데.”

“뭘?”

다소 뜬금없는 말을 들은 정서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보았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곧 손을 뻗어 정서의 눈썹 부근을 어루만졌다.

“윤정서한테는 없었잖아, 저런 이모.”

“아…… 뭐, 부럽긴 한데 질투는 안 나.”

“왜? 이제 네 가족이니까?”

“다행이지. 이모님이 네 옆에 있어서, 네가 조금은 덜 외로웠을 거 아냐.”

“꾀부리는 거지?”

“응? 무슨 꾀?”

“차은호, 봐달라고.”

“봐줄 거야?”

“봐서.”

견은 그렇게 말하고선 딸기를 하나 제 입에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씻을 거야. 너도 씻어.”

“……우리 내일 일정 많은 거 알지?”

“씻자는 말밖에 안 했는데 왜 긴장하지? 나 기대되게.”

“하지 마라.”

“이모가 맞았네.”

“응?”

“넌 거짓말 해도 예쁘네.”

&

“예비 신랑인지 뭔지는 어디 두고 혼자 예식장을 보러 와요? 원래 그런 건 같이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은호는 고풍스러운 호텔 외관을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정서는 은호가 문을 열어 주는 대로 차에 올라타 벨트부터 맸다.

“급하게 미팅이 잡혀서 나 혼자 온 거야. 그리고 어차피 그냥 형식적으로 설명만 들었어. 반 이상 잊었고.”

“결혼 지금이라도 무를래요?”

“뭐라는 거야.”

운전석에 오른 은호가 뒷좌석에서 무언가를 꺼내는가 싶더니 담요를 정서의 무릎 위에 올려 주었다.

토끼가 그려진 분홍색의 담요는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보드라운 재질이었다.

“너 취향 생각보다 귀엽다?”

“제 거 아니에요.”

“그럼? 너 진짜 연애해?”

조금 들뜬 목소리로 정서가 묻자 은호의 표정이 조금 침울해졌다.

이 여자는 쓸데없이 이럴 때 눈치가 좀 없다.

“하려고요.”

“누군데?”

“궁금해요?”

“응.”

은호는 차를 출발시켜 큰 도로로 빠져나오며 힐긋 정서를 보았다.

저를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드물게 저에게 관심을 갖는 정서를 보자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피어올랐다.

“예뻐요.”

“그래? 대학에서 만났어?”

“대학은 아니고요.”

“이상한 일이나 하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 또 좋아할 사람을 찾았네.”

“그러게요.”

“근데 그 사람 담요를 나한테 이렇게 줘도 돼?”

“돼요. 청첩장 준다면서요. 나 맛있는 거 얻어먹어도 되죠?”

“응. 근데 그 전에 들를 곳이 있어.”

“어디요?”

“너 어른들한테 선물 해 본 적 있어? 좀 나이 있는 여자 어른.”

결혼할 때 예물을 선물하는 것이 관례라 들었다.

하 회장이 만족할 만한 선물을 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미희에게는 마음에 꼭 들 선물을 주고 싶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은사님이라도 찾아 가서 청첩장 드리게요?”

“그게 아니라…….”

“하견 이모?”

“어떻게 알았어?”

놀라 묻는 정서에게 아무런 대답 없이 운전하던 은호가 문득 손을 뻗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곧 차가 급정거를 하며 갓길에 멈춰 섰다.

“뭐야, 갑자기?”

“저 차. 아까부터 우리 따라오는데?”

룸미러를 보는 은호의 눈매가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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