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이상하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견과 있으면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금방 이렇게 빠져들고 만다.
“아…….”
뜨거운 혀가 정서의 입 안을 휘젓는다.
그녀의 얼굴을 거뜬히 가릴 수 있는 큰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턱을 쥐었다.
빠져나갈 수 없이 깊게 옭아맨다.
이러면 정서는 속절없이 그에게 이끌린다.
“숨…….”
한참 입을 맞추자 호흡이 달렸다.
놓아달라는 듯 정서가 손을 들어 견의 어깨를 쥐자 못내 아쉬운 듯 입술이 떨어졌다.
조금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뺨을 쓸어내린 견이 웃었다.
“안 늘어, 왜?”
“응?”
“나랑 몇 번이고 했는데 할 때마다 처음인 사람처럼 몸을 굳히고.”
“그야 네가 예고도 없이 불쑥 입을 맞추니까…….”
“예고하면 괜찮은 건가?”
“응?”
“예고하고 하면 괜찮은 거냐고. 그럼 나 한 번 더 입 맞춘다?”
“아니, 잠깐만!”
또 휘말릴 뻔했다.
정서는 급하게 손을 들어 견의 입술 위를 막았다.
견이 저를 막은 정서를 서운한 듯 바라보며 투정 부렸다.
“여긴 우리 둘밖에 없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제 말해, 더 뜸들이지 말고.”
“아, 그거.”
“좋은 소식이 대체 뭔데. 무슨 얘기를 들었길래 그래.”
걱정하고 있구나.
정서가 저를 볼 때부터 그런 기색이 있었음은 알았지만, 이렇게 오롯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견은 괜히 가슴이 벅찼다.
언제든 손을 뻗을 수 있고, 입을 맞출 수 있다.
윤정서와 그런 사이가 되었다.
손끝만 툭 건드려도 사납게 쳐다보던 그 여자애가, 어떤 때에는 손끝이 닿으면 전부 망가질까 겁이 나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그 여자애가.
이제는 자기 옆에서 가끔 웃고 운다.
“승진했어.”
“……뭐라고?”
“승진했어, 나. 대표로.”
“진짜야?”
“아마 내일 조간 신문에 기사 날 거야. 이제 대표 와이프네, 너.”
“아니, 그러니까. 그걸 말하려고 불렀다고? 왜?”
“저의까지는 모르겠지만, 표면적으로는 백영 엔터를 잘 키워서 다른 계열사로 옮기라던데. 좀 더 중심부로 들어오라고.”
“…….”
얼핏 들으면 좋기만 한 말이었다.
드디어 견을 자신의 후계자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제대로 키워 보려는 뜻이 담긴 말 같았으니까.
그러나 하 회장이 결코 순순한 의도로 그럴 리 없었다.
이건 아까 정서가 하던 고민과 맞닿아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 회장은 왜 견을 버리지 못할까. 왜 견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할까.
“나 축하 안 해 줘? 잘했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머리? 아……!”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던 다른 사람이 있었다.
견을 걱정하느라 정작 자신이 견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결혼식에서 부케를 받겠다던 은호의 당돌한 부탁을 어떻게 포장해야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우선은, 칭찬부터.
견은 의외로 칭찬에 약했다.
겉치레가 담긴 칭찬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이라면 투박한 ‘수고했단’ 말에도 눈을 반짝이는 것이 그였다.
어려서부터 적당한 관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면 으레 그렇듯,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여기 있어도 된다는 쓸모를 증명하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걸로 돼?”
“응?”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견의 입술 위로 정서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아까 그가 했던 입맞춤처럼 길지도, 농밀하지도 않았지만 가볍게 닿았다가 ‘촉’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떨어지는 입술의 감촉은 제법 간지러웠다.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던 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서를 마주 보았다.
“방금 뭐 한 거야?”
“칭찬.”
“응?”
“잘했어. 축하해, 대표가 된 거. 진즉에 그 자리가 네 것이어야 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라도 찾았으니 됐어. 직원들 당황하지 않게 잘 다독여서 잘해보자.”
“아니, 그러니까……. 하, 윤정서 진짜.”
견은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태연한 얼굴로 저를 순순히 칭찬하고 축하해 주는 것을 보니 더 나갈 수 없었다.
윤정서는 왜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순진해 빠져서는.
잡아먹을 수도 없게 만드냔 말이다.
“집 가는 길에 잠시 역 앞에 내려 줘.”
“왜?”
“살 거 있어서. 배 안 고파? 맛있는 거 사 줄까?”
“…….”
“대표님, 드시고 싶은 걸 말해 주세요. 뭐든 사 드릴게요.”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할지는 몰랐는데.
다소 당황스러운 정서의 행동에 한동안 말이 없던 견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너 뭐 나한테 부탁할 거 있어?”
“……응?”
“그냥 던져 본 말인데. 맞나 보네?”
견의 얼굴이 일순 가라앉았다.
정서는 당황을 숨기지 못한 저 자신을 탓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진짜로 대견해서 한 말이야. 그동안 여러 문제를 일으키셨는데 요새는 그러지도 않으시고 착실히 일해 주셨잖아요? 투자 수주한 것도 사실이고.”
“뭔데.”
“일단 갈까? 아, 배고파.”
말을 돌리는 정서의 옆 얼굴을 멀거니 보던 견이 짧게 한숨을 내뱉고 핸들 위로 손을 올렸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고 나서야 정서는 한숨을 돌렸다.
대신 기어 위에 얹어진 견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견은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로 정서의 손을 깍지 껴 쥐었다.
두 사람의 손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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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둘이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해. 자세히 보면 닮은 점도 많고 무엇보다 그 아이 역시 하 회장님한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어. 오래 곁에 있었으니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약점을 알고 있을지도…….”
정서는 말을 멈췄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에서 딱 알맞게 익은 스테이크를 먹고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근처 꽃집에서 견을 위해 꽃다발도 준비했다.
꽃을 든 견의 모습이 퍽 예뻐서 그 모습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덧그렸는지 모른다.
잊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더 미룰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해 차가 주차되고, 정서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은호의 이야기를 전했다.
견은 그녀가 말하는 동안 내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더 불안했다.
“오늘 찾아왔다고?”
“응. 근데 말썽부리지 않고 얌전히 로비에서 기다렸어. 내가 만나러 갔을 때도 딱 얘기만 하고 헤어졌고.”
“차은호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자세히는 몰라. 그래도 제법 백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지금껏 하종훈 대표를 위해 일하기도 했으니까.”
“윤정서.”
“응.”
견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견을 설득해야지.
지금껏 은호가 저를 어떻게 도와줬는지 전한다면 경계심을 조금은 누그러뜨릴지도 몰랐다.
“너 설마 차은호를 동정…….”
그때였다.
똑똑, 하고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정서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모님?”
미희였다.
견은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인상을 찡그렸으나 차에서 곧장 내리는 정서를 말릴 순 없었다.
정서도 자신이 이렇게 미희를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 줄은 몰랐다.
“안녕하세요.”
정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마자 미희는 정서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제 품에 안아 등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그 따뜻한 손길과 품에 울컥하는 기분이 든 정서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덥석덥석 안는 거 좋아할 리 없다는 거 알면서도. 그냥 나는, 너무 걱정돼서. 연락을 할까 싶다가도 괜히 바쁜 사람 방해할 것 같고…….”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라 정서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그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 없어서 꾹꾹 눌러낸 목소리의 끝이 떨렸다.
견은 그런 정서를 말없이 보다 저도 차에서 내렸다.
“갑자기 사람을 껴안고 그러면 어떻게 해? 곧 신부가 될 사람인데.”
“맞아, 너. 너는 어쩜 이렇게 여자에 대한 배려가 없니. 결혼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네 멋대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일정을 잡아. 잡길.”
“어쩔 수 없었어.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밥은 먹었어요? 볼이 홀쭉해진 거 봐.”
“먹었어요. 괜찮아요.”
미희는 정서에게 떨어져서 그녀를 한참이고 살폈다.
정서는 괜찮다는 듯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미희를 따라 집안으로 향했다.
미희가 정리한 집안은 깔끔했고 반찬을 새로 했는지 조금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애가 하도 못 오게 하니까 내가 며칠 안 왔더니 집 꼴이 또.”
“바빠서 그래, 바빠서. 잔소리할 거면 가세요. 퇴근 시간 지나셨잖아요.”
견은 미희를 타박했으나, 미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서를 소파에 앉히고서는 과일이라도 먹으라며 급히 부엌으로 향했다.
괜찮다고 만류하려는 정서를 견이 붙잡았다.
“얘기하던 건 마저 해야지.”
“……아무튼 나는 차은호가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따지자면, 이미 하견 너도 도왔고.”
“상당히 믿는 눈치네, 너.”
“아니, 꼭 믿어서가 아니라…….”
“아니면. 곧 결혼할 사람이 누구인지 소개는 받았어?”
“그냥 결혼식 초대해달라는 걸 은유적으로 부케 달라고 표현한 거지. 나한텐 고마운 제안이야. 알잖아. 나 초대할 사람 없는 거.”
견이 입을 다물었다.
윤정서는 아마 까맣게 모를 것이다.
은호가 정서를 통해 전한 말은, 사실상 견을 향한 도전장과 다름없음을.
반년 만에 윤정서를 제 것으로 만들겠다고?
우습지도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