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하 회장은 자신의 아들에 대해 필요한 만큼 충분히 알고 있다 믿었다.
죽은 자신의 아들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에 대한 정을 가진 이는 아니지만, 그는 보수적인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언젠가 자기 핏줄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아들은 제법 훌륭하고 착실히 역할을 다해왔다.
‘사망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들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하견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 회장이 동요했음은 물론이다.
진즉에 없앴어야 할 아이라고. 견의 엄마가 한번씩 그에게 연락을 해 견의 소식을 전할 때마다 그는 생각했었다.
엄마를 닮아 그림을 잘 그린다고, 겉보기엔 강해 보여도 사실 마음이 착한 아이라고.
그렇게 말하던 여자가 병에 걸렸단 소식을 들었을 때 하 회장은 일부러 돕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천운이었다.
그때 견이 죽지 않아 엄한 사람에게 회사가 넘어가는 것만은 막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견은 그의 아들이 될 수 없었다.
아무리 가르치고 다듬어도 견의 성정을 고칠 수 없었다.
하 회장은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왜 하견이 죽지 않았을까.
죽어야 할 아이는 죽지 않았고 살아야 할 아이는 죽었다.
살아남았다는 그 아이가 어쩌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다 클 때까지만. 앞으로 약 십오 년 정도를 아무에게도 백영을 빼앗기지 않고 지킨다면 그가 원하는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요.”
“저번에 말했었지.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생각지 못한 하 회장의 말에 견은 잠시 생각을 되짚었다.
정서와의 결혼을 허락하는 대신, 견은 하 회장의 후계자로 모두가 인정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하 회장이 정서를 공격하기 전까지의 다짐이었으나.
새삼스레 다시 이 약속을 언급하는 이유가 뭘까?
견이 대답이 없자 하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부장 그만두고 대표로 올라와.”
“갑자기요?”
“가정을 꾸릴 때가 됐으니 한 계단 더 올라서야지.”
“대표 다음에 뭐 주시게요. 설마 대표 자리 앉히신 다음 백영 엔터테인먼트 매각이라도 하시려는 건 아니죠?”
“그냥 하라면 해. 토 달지 말고.”
현재 대표 자리에 앉은 이는 허울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하 회장이 견을 본부장 자리에만 둔 것엔 이유가 있었다.
낙하산으로 대표 자리에 앉았을 때 휘말릴 구설수 때문도 있겠지만, 견에게 그만한 힘을 쥐여 주지 않고 싶은 마음 역시 컸다.
하 회장을 견제하는 이들이 하 회장과 견 사이에 존재하는 균열을 안다면 견에게 붙어 다른 일을 도모하기도 쉬울 터였다.
“회장님께서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텐데.”
“결혼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그런 말은 신혼집이라도 장만해 주면서 하셔야죠.”
견은 그렇게 말하면 눈동자를 굴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 비서가 눈에 들어왔다.
김 비서라면 하 회장의 의중을 알 텐데.
둘의 대화를 뻔히 들었음에도 표정의 동요가 없는 것이 확실히 오래 보필한 사람다웠다.
“대표님은 어디로 치우시게요?”
“치울 곳이야 많지. 적당한 자리 만들었으니 그것까지 네가 신경 쓸 바 아니다. 너는 대표 자리 잘 맡아서 육 개월 안에 회사 키우고.”
“키우고? 그 다음엔요.”
“잘하면 다른 대표 자리로 옮겨 오겠지. 백영의 메인으로 들어오려면 고생 깨나 해야 할 테다.”
백영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자리에 앉히는 것도 모자라서 백영의 다른 자리를 내어 주겠다고?
견은 태연을 가장하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버지가 웬일로 저를 다 믿어 주시네요.”
“이번에 보여 준 네 사업 수완 덕이지. 큰 돈을 움직여 보면 알 게다,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실 말씀은 전부 하셨나요?”
“결혼한 뒤에도 그 집에 살 생각이냐?”
“왜요. 설마 집에 들이시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희가 매일 아침마다 얼굴 부비며 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원하세요?”
“동네가 너무 빠지니 옮기라는 뜻이다.”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예비 신부가 기다려서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결혼 전까지 할 일이 아주 많거든요.”
견은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렸다.
지금 하 회장이 보인 태도는 결코 저를 믿어서 보이는 태도가 아니었다.
하 회장이 견제해야 할 다른 누군가가 생겨 자신을 앞세우는 것일 테지.
그럼 누가? 하 회장이 누굴 두려워하는 것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그게 ‘견’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리고 ‘견’이 될 테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
― 아직 회사인가?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견의 목소리에 정서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 회장이 무슨 말을 하였을지, 그것 때문에 주눅 들거나 상처받은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됐다.
견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힘들어도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니 안심할 수 없었다.
“네. 아직 회사입니다.”
― 퇴근 안 하고 뭐 해. 상사가 대체 누구길래 이리 야근을 시켜?
누구인지 모르고 하는 물음도 아니고.
실없는 농담에 정서는 피식 웃었다.
비서실 밖 직원들은 전부 퇴근했다.
겨울이 다가오며 부쩍 짧아진 해 덕에 밖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업계 특성상 늦게까지 야근하는 직원이 꽤 됐으므로 회사는 곳곳에 불을 밝히고 있었으나, 본부장실이 있는 층을 포함한 위층들은 전부 불이 꺼졌다.
― 좋은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이요?”
― 원래 이런 건 얼굴 보고 전해야 하는데. 나 곧 도착해. 마무리하는데 얼마나 걸려?
“금방 내려가요. 십 분 정도.”
― 기다릴게.
전화가 끊겼다.
정말 좋은 소식일까? 견의 밝은 목소리를 듣고도 쉬이 믿을 수 없었다.
하 회장을 만나고 좋은 소식을 전한다니.
하 회장이 좋은 말을 해 줬을 리도 없는데.
결혼을 당장 무르라든지, 그렇게 할 거면 본부장 직함 내놓고 나가라든지.
나쁜 소리만 해댔으면 모를까.
서류를 정리하던 정서의 손이 문득 멈췄다.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하 회장이 아직 견을 밀어낼 수 없는 이유, 애초에 하 회장이 그녀에게 결혼을 부탁할 때 걸었던 조건이 떠오른 탓이다.
하 회장에게 숨겨진 손자가 있다는 것.
그간 너무 정신없이 일들이 터져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아이의 어머니는 누구인지.
아이의 어머니가 하 회장을 만나 무엇을 약속받았는지.
그것을 파악해야만 하 회장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하 회장은 어쩐지 견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 줄 수 있다 믿는 눈치였는데, 그 이유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백영 같이 큰 그룹에선 늘 경영권 다툼이 벌어지고 방어하기 위한 최선의 조건이 핏줄이라는 것은 정서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견은 하 회장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한두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경영진들이 견을 믿을 리 없었다.
오히려 하 회장의 약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견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과 별개로, 또 그가 가진 능력과는 별개로 세간은 견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못했다.
그런 견을 굳이 왜 옆에 끼고 있는 걸까, 하 회장은.
똑똑.
정서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연쇄적으로 이어지던 생각을 멈췄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싶어 몸을 일으키자 문이 열렸다.
“응?”
검은 코트를 걸치고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들어오는 견이 보였다.
견은 환한 얼굴을 하고 웃고 있었다.
“벌써 십 분 지났어?”
“아니. 보고 싶어서 그냥 올라왔어.”
“금방 내려갈 텐데.”
“그 잠깐도 보고 싶을 수 있잖아.”
견은 한걸음에 다가와 정서를 끌어안았다.
정서는 얼결에 그의 품에 안겨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어찌 됐든 표정이 엉망이지 않아 다행인가?
정말 좋은 일이 있는 건가?
“회사에서 이러면 안 된다니까.”
“아무도 없잖아. 다 퇴근했던데?”
“퇴근 안 한 직원도 많아.”
“이 층엔 없어, 적어도.”
“내가 로펌 다닐 때 제일 곤란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알아?”
“언제?”
“복사실이나 휴게실에서 남녀 둘이 이렇게 끌어안고 있을 때.”
“…….”
“게다가 넌 상산데. 직원 입장에서 얼마나 불편하겠어.”
“떨어져?”
“떨어져.”
견은 아쉬운 듯 양 눈꼬리를 늘어뜨리다 이내 천천히 팔을 풀고 뒤로 물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처량한 강아지 같아 정서가 손을 뻗어 흐트러진 견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주었다.
“정리 다 됐어. 가자.”
“이제 날이 쌀쌀해. 너 외투 챙겨 다녀야겠다.”
“본부장님부터 잘 챙기시죠. 아, 좋은 소식이라는 게 뭐야?”
정서의 물음에 견은 제 입꼬리를 꾹꾹 눌렀다.
서류 가방을 챙기고 문을 향해 걷던 정서가 길어지는 침묵에 그를 돌아보았다.
“우선 나가자.”
“왜 뜸을 들이지, 불안하게.”
불을 끄고 본부장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할 때까지.
견은 계속 침묵하며 이따금 비죽 튀어나오는 웃음을 숨기려는 듯 자꾸 제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정서는 그런 견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그의 차 조수석에 오르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진짜 뭔데 그래?”
“보통 아내들은 이런 소식 들으면 정말 좋아하던데. 너도 그럴까?”
“아내?”
낯간지러운 호칭에 뜻하지 않게 정서의 귓가가 붉어졌다.
견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알아챘다.
이런 것을 부끄러워하는 그녀가 퍽 귀엽다 생각하며 견이 정서의 얼굴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듣고 싶어, 자기야?”
“……하지 마.”
“우리 곧 부부가 되잖아. 내일은 식장을 볼 거고, 그 다음날엔 네 드레스도 볼 건데.”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말 안 할 거면 그냥 차 출발…….”
견이 고개를 숙여 정서의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먹히듯 사라지며 몸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