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차은호. 나 지금 네 말 이해가 하나도 안 되니까,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이해 안 돼요? 왜지? 그런 규칙 같은 거 있지 않나. 부케 받으면 육개월 안에 결혼하는 거.”
“너 결혼해?”
은호는 심각한 얼굴로 묻는 정서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정서는 답답하기만 했다.
은호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데 영 알 수가 없었다.
“결혼할지도 모르죠.”
“고작 그걸 부탁하려고 찾아온 건 아닐 거 아니야. 나 너랑 농담할 여유 없어. 그러니까 이제 이런 농담은 그만하고…….”
“저를 결혼식에 초대해달란 말이에요.”
“뭐?”
“하객이 되고 싶다고요, 윤정서의.”
아.
정서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샜다.
그러고 보니 견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 이후 단 한 번도 결혼식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입을 드레스, 식장을 채울 하객들과 결혼식.
사회 생활을 하며 직장 동료나 고객의 결혼식에 참석할 일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제 결혼식을 그려 본 적이 없었다.
결혼은 제 삶에 없을 것이라 믿었고 아마 견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없었을 것이다.
부를 사람이 없다.
형식적인 결혼식이라 하더라도 한 회사의 대표이자 대기업인 백영 그룹의 하 회장의 아들인 견은 하객이 식장을 전부 채우고도 남을 터였다.
그에 비해 초라하기만 할 정서의 하객 명단은 예상이 갔다.
“왜?”
“네?”
“물론 반박 기사가 나갔고 장소영 관련 사건으로 기소되지도 않겠지만 난 이미 상황이 무척 좋지 않은 상황이야. 안 좋은 소문도 돌만큼 돌았고. 식장에 기자들도 올 테지. 구태여 내 하객으로 와도 네가 좋을 일은 하나도…….”
“아뇨. 나는 가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물론 진심 어린 축하는 할 수 없겠지만 신부 대기실 정도는 지킬 수 있겠죠. 원래 신부 친구들이 와서 도와주는 거 아닌가?”
“친구?”
정서의 되물음에 은호는 난감하다는 듯 웃음기를 지운 뒤 눈썹 위 조금 도드라진 뼈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 잠시 말을 고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거기 가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왜. 친구 놀음이라도 새삼스레 하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냐.”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냥 내가 거기 가서 하 회장을 봐야겠어요.”
“만날 기회가 없어서 그런 거라면 따로 자리를 마련해도 되잖아. 우리 회사에 찾아왔던 것처럼 무작정 찾아가는 것도 너에겐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굳이 그게 결혼식이어야 할 이유가…….”
“배신당했어요.”
정서의 표정이 변했다.
은호의 뒤에 놓인 신호등의 빛이 푸른빛으로 바뀌었으나 둘 다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이 힐긋힐긋 두 사람을 보았으나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배신이라니?”
“예상했어요. 어차피 믿었던 건 아니니까 그렇게 슬플 것도 화날 것도 없었지만.”
“그러니까 누구한테. 차은호, 나 수수께끼 푸는 데 재능 없어. 그냥 무슨 일인지 처음부터 설명해 줘야 이해하고 널 돕지.”
“우선 그거면 돼요. 날 결혼식에 불러 줘요. 당신 옆에 세우고, 당신의 편이 되게 해 줘요.”
“난 이해가 안 돼, 차은호.”
정서의 얼굴에 혼란이 비쳤다.
은호가 그런 정서에게 다가섰다.
그녀의 양 어깨를 쥐자 가냘픈 뼈가 손 아래로 만져졌다.
은호를 바라보는 정서의 투명한 눈동자에 오롯이 그가 비쳤다.
그는 누군가의 눈동자에 이렇게 담긴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윤정서가 그렇게 눈에 밟혔을까.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 미친개가 유일하게 말을 듣는 여자, 하 회장이 자신의 아들 옆에 두기로 결정한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궁금했다.
평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전지훈 기자의 집에서 마주쳤던 정서는 기대 이상이었다.
낯선 남자에게 뛰어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고 자신을 말리기 위해 끝까지 달라 붙었다.
그 집요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지 궁금했는데.
가진 것도 없으면서 기가 죽지 않으려 바락바락 사는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히는가 싶더니 어느새 마음에 걸렸다.
종종 정서 생각이 났다.
왜 그렇게 견을 아끼고 돕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알 수 없었는데 어느 때부터 저도 정서에게 그러고 있었다.
견과 하 회장을 망가뜨리는 것에 이용하면 좋으리라 여겼던 마음이 어느새 관심과 걱정으로 촘촘해졌다.
윤정서에게 차은호는 유일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차은호의 삶에 윤정서는 유일했다.
“이해하지 마요.”
“그게 무슨…….”
“하 회장한테 난 저승사자 같은 존재가 될 거예요.”
“뭐?”
은호의 입에서 뜬금없는 단어가 나오자 정서가 얼굴을 찌푸렸다.
살짝 구겨진 미간과 둥그런 콧방울이 귀여워 은호는 저도 모르게 정서의 뺨으로 손을 옮기다 그대로 멈췄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무서운 존재.”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아무리 복수를 하고 싶다고 해도 폭력적인 방법으론…….”
은호는 종종 낯선 모습을 보였다.
경호가 먼저 그녀를 위협했다고는 했지만, 경주먹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낯설었다.
전지훈의 집에 멋대로 들어간 것도 그랬다.
가끔 예측 불가한 행동을 저지르곤 했기에 이번에도 그가 어떤 식으로 복수하려는 건지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무슨 권리로 그의 복수를 제한한단 말인가.
이미 하 회장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잃었는데.
그런 슬픔을 견이라면 모를까, 정서로서는 절대 헤아릴 수 없는데.
“왜 그래요?”
갑자기 말을 멈춘 정서를 은호가 걱정하는 낯이 되어 살폈다.
정서는 짧게 한숨을 내뱉곤 다시 은호와 눈을 맞췄다.
“뭘 해도 좋으니까 네 손 다치는 일은 하지 마.”
“응? 갑자기 그게 무슨…….”
“결혼식은 올 수 있게 할게. 근데 너 말곤 아무도 없을 거야. 나는 부를 사람이 없거든, 그래도 괜찮아?”
은호를 초대하면 견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 보듯 뻔했지만.
정서는 어쩐지 은호와 견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더 나아가 어쩌면 도울 수도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기 어려웠다.
그녀가 잘 설득한다면 둘이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작은 희망이 샘솟았다.
“괜찮아요. 예상 못 한 것도 아닌데 뭐.”
“…….”
“친구 없죠?”
“…….”
은호는 저를 노려보듯 가만히 응시하는 정서의 코를 툭 건드렸다.
그리고선 그녀의 어깨를 잡았던 제 손을 놓았다.
“결혼 선물 뭐 갖고 싶은지 생각해둬요. 청첩장 줄 준비 되면 다시 연락하고.”
“어디 가는데.”
“이제 그런 것도 물어 줘요?”
은호는 피식 웃더니 다시 바뀐 신호등 불빛을 보고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정서를 자꾸 돌아보는 탓에 뒤로 걷는 은호에게 앞을 보라고 손짓하던 정서가 손을 높이 치켜 들고 흔드는 그를 따라 손을 들었다.
“밥 잘 챙겨요. 잠도 좀 자고!”
은호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멈춰 서서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매일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애를 쓰는 걸 정서는 모를 테니까.
아직은 모르는 편이 나았으니까.
그러니까 그녀를 두 눈 가득 담아 최대한 오래 기억해두려는 노력 정도는 그의 것으로 남아 있어도 됐다.
&
견은 저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큰 캔버스 앞에 섰다.
언제 보아도 매혹적인 그림이다.
파멸이라는 것이 본디 그러하듯이. 위험한 것은 매력적이기 마련이니까.
멀리서 그를 향해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먼저 그의 것을 건드렸으니 이 정도의 건방은 떨어야지.
“늦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저보다 늦게 도착하신 거 아녜요? 피가 어디 가겠어요.”
하 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견이 저의 아들인 척 굴 때, 실제로 그의 아들임을 알면서도 불쾌함을 드러내곤 했다.
물론 견이 그것을 즐겼음은 자명했다.
“그림이 몇 점 보이지 않던데?”
견은 가볍게 물으며 고개를 돌려 하 회장을 마주했다.
평소와 비슷한 얼굴이었으나 안색이 묘하게 좋지 않았다.
최근 심사가 뒤틀릴 소식만 들었으니 하 회장의 얼굴이 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림과 사람의 닮은 점은 쓸만하게 두기 위해선 계속 손을 봐야 한다는 것이지.”
“그래요?”
“물론 그림이 사람보다 훨씬 쓸모 있으니 투자할 가치는 다르겠지만.”
“그러게요. 아쉬우시겠어요? 저한테 많이 투자하셨는데 투자 대비 결과로 많이 못 얻어내셔서.”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으니 실망할 것도 없지. 사회 공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평소라면 실없는 소리는 집어치우라 말한 뒤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본론만 전달하고 자리를 마쳤을 텐데.
견은 자신에게 대꾸해 주는 하 회장의 태도가 신경 쓰였다.
새삼스럽게 다정한 부자 사이를 꾸며내려는 것도 아닐 테고.
“혹시 파신 건 아니죠? 요새 돈이 부족하시단 소식이 있던데. 좀 도와드릴까요? 백영 요새 상승세거든요. 주가도 많이 올랐고.”
그러니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지.
견은 하 회장의 틈을 곧장 파고들었다.
쌍꺼풀이 없는 주름진 눈에 노기가 스쳤다.
“건방 떨지 마.”
“이렇게 불러낸 걸 보면 부탁하실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영 말씀을 안 하시길래. 혹 돈 문제라 주저하시는가 싶어서 먼저 물은 것뿐입니다.”
“푼돈 투자 받았다고 가진 양 구는 게 우습구나.”
“효도했네요. 제 덕에 웃기도 하시고.”
“하견!”
하 회장은 더 듣지 않겠다는 듯 그의 이름을 외쳤다.
관람 시간이 끝나 한산한 전시장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동시에 견이 미소를 지었다.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아버지. 곧 며느리도 보시는데 기쁘지 않으세요?”
“예식장 옮겨. 지금 재한 그룹과 우리 사이가 뻔히 어떤 줄 알면서 그쪽에서 결혼식을 올리겠다니 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
“저희 그룹은 호텔 사업을 하지 않잖아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보는데요.”
“네가 날짜도 멋대로 정하는 바람에 지금 얼마나 골치 아파졌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
“아버지.”
견이 걸음을 옮겨 하 회장의 앞에 섰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하 회장과 눈을 맞췄다.
“오늘따라 다른 말이 많으신 걸 보니 제법 곤란한 부탁을 하시려는 모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