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85)

59.

정서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고, 그것도 어린애가?

비서진의 시선이 일제히 정서를 향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설마 수연이 없는 얘기를 지어 하는 것일까 싶어 의문스러운 얼굴이었다.

물론 정서는 수연의 얘기를 듣자마자 그녀가 얘기하는 사람이 누구인 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카페에서 수연이 저지른 짓을 깨달은 날을 마지막으로 은호와 연락하지 않았다.

은호가 정서에게 몇 차례 연락을 남긴 흔적이 있었지만, 정서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은호는 하 회장을 증오하는 만큼 견도 적대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쩌면 결혼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정보를 빨리 캐치하는 그였으니까.

그런 그 앞에 어떤 얼굴로 서야 할지, 그동안의 도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군지 단번에 아시네요.”

수연이 여유롭게 미소 지어 보였다.

견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은호가 등장하다니, 마침 타이밍이 좋았다.

이미 은호가 한 차례 본부장실까지 쳐들어온 적도 있으니 스캔들이 나긴 딱 좋았다.

“……어디 있습니까.”

“로비에서 만났으니 아직 있을 거예요, 거기.”

본부장실까지 들어오게 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은호는 어쩐지 이번엔 그저 정서가 있는지 묻기만 했다.

심지어 정서를 불러달란 얘기도 하지 않았다.

언제 나오든 상관없다는 듯 기둥에 기대 서 있는 걸 보고 수연은 그저 대답만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전달 감사합니다.”

정서는 그렇게 답한 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연이 슬쩍 고개를 숙인 채 미소 지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에는 안으로 모셔 주세요.”

“……네?”

“하 회장님과도 가까운 사이이신 분입니다. 본부장님과도 막역한 사이이시고요,”

“그럴 리가 없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정서는 수연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수연이 의도적으로 제 위신을 깎아내리고 괜한 소란을 일으켰으니 이 정도는 갚아 주어야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물론 하 회장과 은호가 정서적으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피가 섞이긴 했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견과 은호가 막역한 사이라는 것이 거짓말일 수 있겠으나, 그것은 정서가 어떻게든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같은 적을 둔 사람은 동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두 사람 모두 하 회장을 적으로 두고 있으니 가진 힘을 모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차은호.”

정서는 로비에 도착하자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은호를 향해 걸어갔다.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견이 혹시 은호를 보았을까.

누구를 찾아온 건지도 알았을까.

뒤늦게 그것이 신경 쓰였으나 지금으로선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

정서를 발견한 은호는 기둥에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하고 천천히 그녀를 향해 마주 걸어왔다.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고, 연락이 되지 않아 답답했다고.

책망할 줄 알았던 은호는 의외로 화나거나 기분이 상한 기색 없이 그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미안. 전화를 못 했던 건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다친 곳 없어요?”

“응? 아, 응.”

“나 여기서 당신 기다리는 동안 명함을 세 개나 받았어요.”

은호가 씩 웃으며 제 주머니에서 명함 세 장을 꺼내 보였다.

하나는 배우 기획팀, 또 하나는 아이돌 기획팀. 

나머지 한 장은 드라마 제작팀의 명함으로 이미 정서가 모두 아는 이름이었다.

“그동안 여기 드나든 게 몇 번인데 한참 발견 못 하다가 오늘은 연예인 해 볼 생각 없냐고 명함을 세 장이나 주는 거 있죠.”

“네가 잘생겼으니까.”

무심코 나간 정서의 답에 은호가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치켜뜨며 그녀에게 붙어 섰다.

“나 잘생겼어요?”

“응.”

정서는 간단하게 답을 하며 뒤로 걸음을 한 걸음 물렀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확실히 은호는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녀 역시 회사 직원들에게 유명 인사였으니 둘이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자연히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나가자.”

“어디 가게요.”

“어디든. 나와.”

“그럼 내가 가고 싶은 곳 가도 되나?”

그렇게 물으며 은호가 한쪽 눈썹을 찡긋했다.

어쩐지 뭔가 이상했다.

자신을 이렇게 대할 상황이 아닌 것만 같은데. 설마 아직 결혼 소식을 못 들은 건가?

그럼 왜 찾아온 거지?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 걸까.

“어디 가고 싶은데?”

“이상하다. 왜 이렇게 순순하지? 솔직히 이렇게 빨리 나올 줄도 몰랐어요.”

“이 비서님 마주친 거 아니야?”

“그랬죠. 근데 불러달라곤 안 했는데? 설마 나 때문에 난처해졌나?”

두꺼운 유리문을 잡아 주며 은호가 물었다.

정서는 자연스레 빠져나오며 은호와 눈을 맞췄다.

고맙단 짧은 눈인사를 건네며 답을 갈무리했다.

이럴 땐 차라리 솔직한 편이 낫겠지. 

이렇게 무턱대고 회사에 찾아오는 일은 앞으로 안 해 줬으면 하기도 하니까.

“조금은?”

“아, 다행이다.”

그런데 은호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조금 올라가는 입꼬리나 예쁘게 접히는 눈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만족하고 있었다, 은호는 이 상황에.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때문에 좀 불편하길 바랐어요.”

“……연락을 안 받아서?”

“에이, 사람이 연락 좀 안 된다고 그런 나쁜 마음 품으면 쓰나. 나 그렇게 못되진 않았는데.”

“그럼 왜?”

정서가 걸음을 멈췄다.

앞서 걷던 은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불편해야 자주 생각할 거 아니에요.”

“응?”

“결혼한다면서요, 이 주 뒤에.”

들었구나. 역시 지금 찾아온 건 결혼 소식 때문인가?

이전부터 그녀를 도운 대가로 받을 것이 있다 얘기해왔던 은호였다.

어쩌면 오늘은 그게 대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맞아. 그러니까 이제 정산할 시간이야.”

“정산?”

“네가 날 도와줬잖아. 그것도 몇 번이고.”

“그래서 지금 나에게 갚겠다?”

“응.”

은호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정서를 응시했다.

그녀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큰 눈이 감겼다 열리는 모양새를, 이제는 해가 져 어스름이 몰려온 풍경과 그가 하나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은호를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정서가 무심코 한 생각이었다.

은호와 견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를 잃었고, 그 사실에 상처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주저앉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싸워왔다.

처음 그녀를 마주쳤을 때에 넘어진 그녀를 걱정하던 낯빛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돕던 선의도 정서는 모두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까지 꾸며낼 이유가 은호에게는 없었으니까.

“재밌네. 어떻게 갚으려고요. 계획이 있어요?”

“네가 하려는 복수. 내가 도울게.”

“복수?”

“응. 그러니까…….”

“난 그런 거 안 바라는데, 윤정서한테.”

잠시만요.

무거운 소품을 든 남자가 회사 건물로 들어가려는 듯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은호가 손을 뻗어 정서의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제 쪽으로 끌어당겨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친밀한 움직임에 정서가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은호는 정서를 데리고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 여기 회사 앞이니까…….”

“이런 모습 안 보이려면 멀어져야겠죠? 최대한 빨리.”

“왜 그래, 너. 너 좀 이상해, 오늘.”

“내가요?”

“아까부터 자꾸 행동이나 대답이 엇나가는 기분이야. 날 왜 찾아왔어? 기다릴 생각이었다면 할 말이 있었던 거 아니야?”

“할 말이라…… 있었죠, 할 말.”

“뭔데. 뜸 들이지 말고 해.”

정서가 은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몸을 움직이자 그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몇 걸음 빠르게 앞서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돌아서서 그녀를 마주 본 채 뒤로 걷기 시작했다.

“결혼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해요?”

“뭐?”

“하 회장이랑 얽히는 거, 그만하라고 하면 하냐고.”

“차은호.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래, 그렇게 답할 줄 알았어. 그럼 질문을 좀 바꿀게요.”

“……뒤에 조심해.”

유난히 울퉁불퉁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정서가 앞을 보라 슬쩍 눈짓하자 은호는 가뿐히 무시해 넘기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하 회장을 얼마큼 속일 수 있어요?”

“무슨 뜻이야.”

“어쨌든 하 회장이 믿었으니까 하견 옆자리를 준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은 자기 아들에 대한 믿음이 없을 테고. 물론 약점 잡아 협박하며 사람을 다루니 완전히 당신 믿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미약하게나마 믿음을 산 거잖아.”

“그건 그냥 나랑 견이, 아니……. 본부장님이 고등학교 때 잠깐…….”

“같은 반이어서? 아니면 가까이 지내서? 고작 그런 이유로 맡길 사람 아닌 거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부탁하는 일들을 처리해 줬으니까. 물론 진짜 심각한 문제나 숨기고 싶은 문제는 나한테 공유하지 않았지만, 그냥 당장 처리가 필요한 간단한 건들은 맡겼었어. 일이 이렇게 되기 전의 일이지만.”

“흐음.”

은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

정서가 인도가 끊기고 차도가 나온 것을 보고 손을 뻗어 그를 멈춰 세웠다.

“위험하다니까. 이제 앞 좀 보고 걸어.”

“그럼 나도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빨리도 말한다. 뭔데?”

은호가 제 옷깃을 쥐어 붙든 정서의 손을 내려보다 시선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결혼식 때 부케 나한테 던져 줘요.”

“……뭐?”

“내가 받을게요, 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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