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환영받지 못한 손님이 어떤 기분인지 이보다 더 절실히 느끼는 하루가 또 있을까.
당연히 직원들은 정서의 등장에 동요했다.
그녀가 다시 복귀한 사실을 의아하게 여겼으며 평소 회의에서 보였던 태도보다도 더욱 소극적인 태도로 입을 다물었다.
“김 피디는 평소보다 말이 없네?”
오죽하면 견이 꼭 집어서 누군가를 부를 지경이었다.
평소 다른 직원들처럼 견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필요한 것을 능청스레 요구하곤 했던 제작팀 김 피디 역시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뭐 딱히 할 말이 없는데요? 지금 편집 잘하고 있으니까.”
“평소라면 ‘작품 때깔이 달라야 흥행한다, 음악 두세 곡만 더 사고 싶다’라며 말이 많았을 텐데. 그런 말도 없이 편집 잘하고 있다?”
김 피디의 시선이 자연히 정서로 향했다.
정서는 자료에 두고 있던 시선을 떼고 김 피디를 마주했다.
김 피디의 입꼬리가 조금 비틀리는가 싶더니 입술이 열렸다.
“주연 배우들이 궁금해하기도 하고, 투자사에서도 계속 문의가 들어와서 말인데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예, 물으세요.”
“두 분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입니까?”
안 그래도 싸늘했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차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누구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다들 정말 그게 궁금했다는 듯, 해명이 듣고 싶다는 듯 입을 다물고 답을 기다렸다.
견의 시선이 정서를 향했다.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필사적으로 태연함을 유지했다.
사랑받는 게 불가능하다면, 불편하게라도 여기게 해야 했다.
무심한 얼굴과 서늘한 눈매를 지켜보고 있던 견은 당황한 기색이 없는 정서의 모습을 보고 안심한 듯 슬쩍 웃었다.
그러곤 잠깐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갈무리하고 천천히 직원들을 마주했다.
“맞습니다.”
“…….”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임원급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으나, 그의 말에 반기를 들기엔 그동안 견의 전적이 너무 화려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 빼곤 다 해 봤다는 상사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직원이 몇이나 되겠는가.
“여러분이 이렇게 직접 물어보셨으니 이 기회에 말씀드리죠. 이 주 뒤 주말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직원들은 축의금 내지 않고 와서 밥만 먹고 가도 되니까 부디 참여하셔서 결혼식을 더욱 성대하게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 참고로 거기 밥 맛있습니다.”
“…….”
호기롭게 질문을 던진 김 피디 역시 뻔뻔한 견의 발언을 듣고 모든 전의를 상실한 사람처럼 허공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견이 몸을 일으켜 섰다.
큰 키를 가진 탓에 직원들이 전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어야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전 직원분들 하나하나 다 만나서 청첩장을 건네고 와 달라 청해야겠지만, 그러기에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작은 선물을 준비했는데 괜찮겠습니까?”
“…….”
“윤정서 변호사님, 연락 왔습니까?”
정서는 핸드폰을 열어 무언가를 확인했다.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메일 내용을 찬찬히 그리고 꼼꼼히 확인하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 또 견이 어떤 기행을 펼쳤을까.
멀쩡해 보였던 변호사가, 심지어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는 여자가 돌아도 단단히 돌았나 보다.
이런 남자의 곁에 있다니.
비슷한 사람이니까 그러겠지. 기사 보지 못했느냐.
설마 그랬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가 있나. 그것도 변호사면 뻔히 문제 될 줄 알았을 텐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런 기사가 떴을 리 없다.
오고 가는 목소리 없이도 직원들끼리 마주하는 시선에서 뻔히 생각이 들렸다.
그 소리 없는 아우성이 멎도록 정서는 손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회의 내내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넘기고 있던 직원의 옆으로 갔다.
“실례지만 노트북 잠깐 써도 될까요?”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놀라 몸이 굳은 신입 사원은 당황한 듯 눈을 도로록 굴리다 냉큼 옆으로 비켰다.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도 잊지 않고 건넨 정서는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무언가를 검색했다.
가장 최신의 기사가 상단에 떴다.
기사의 제목은 ‘재한 그룹, 백영 엔터테인먼트에 300억 투자한다’ 였다.
직관적이고 명징한 타이틀을 본 직원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300억을 투자한다고? 우리 엔터테인먼트에?
그것도 재한 같이 큰 그룹이 갑자기 왜?
어리둥절한 반응이 이어지자 견이 친히 걸음을 옮겨 그들의 앞에 섰다.
프로젝터가 쏘아낸 빛이 견의 눈동자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윤정서 변호사와 제 합작품입니다. 어때요, 결혼 선물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 이 투자비는 순수하고 투명하게 운영될 예정입니다. 월급도 조금씩 오를 테고 복지 비용도 늘릴 겁니다. 놓쳤던 배우도 데리고 와야죠.”
“재한 그룹이 갑자기 왜 투자를 한다는 겁니까?”
겨우 용기를 낸 이사 중 하나가 견을 향해 물었다.
정서는 노트북을 잘 썼다는 듯 눈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신 답했다.
“재한 그룹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인 신사업이 있습니다. 관련하여 좋은 이미지를 주고 싶어했고, 마침 백영 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 중인 드라마 아이템을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엮어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으리라 확신했고요. 또 광고 모델로 우리 소속 배우인 신이소 배우를 원하기도 했습니다.”
“설마 그 드라마 <미래의 미래>예요?”
김 피디가 의자에서 뛰쳐나가듯 튀어 오르며 물었다.
정서는 경직된 입꼬리를 풀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김 피디님. 이번에 인공지능 캐릭터 전부 CG로 넣고 싶어 하셨는데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획안이 워낙 재밌어 개인적으로도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아영의 시원한 성격이 매력적이라 젊은 층한테도 어필이 될 것 같고요.”
“…….”
이번엔 다른 이유로 모두 놀랐다.
정서가 그들 앞에서 웃는 낯을 보인 것이 처음이었다.
냉랭하고 조금 피로해 보이던 그 얼굴이 이렇게 무해해 보일 수 있다니.
게다가 소문처럼 회사의 실세이자 망나니인 하견 하나 잡아서 인생 역전하려는 여자가 아니라, 진짜로 회사의 일을 긴밀히 파악해 필요한 것을 마련해 줬다는 것이 대단하기도 했다.
“어때요. 결혼 선물이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 이 투자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내년에 론칭할 예정이었던 남자 아이돌 팀도 예정대로 내보낼 수 있고. 홍보 예산도 넉넉히 잡을 생각이니 걱정 마세요. 백영 엔터테인먼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견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정서가 자리로 돌아와 옆에 서자 테이블 아래로 그녀의 허벅지를 쿡 찌르지만 않았어도 더 완벽할 뻔했다.
정서는 그런 견의 손가락을 잠깐 쥐었다가 놓았다.
“더불어 잠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귀중한 시간 내어 주신 만큼 빠르게 말하고 빠르게 말하고 끝내겠습니다. 현재 불미스럽게 언급되고 있는 루머는 사실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진실을 소명하고 루머에 대한 대처를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또한 그간 성실히 일해 주셨던 직원분들의 노고를 해치게 된 점 사죄드립니다.”
정서가 고개를 숙였다.
견은 그런 정서를 빤히 보다 저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흠칫하는 직원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하견이 고개를 숙였다, 그 미친개 하견이.
정말 정신을 차렸는지, 미안한지는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하견이 윤정서에게 꿰어도 단단히 꿰었다.
어쩌면 이게 회사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직원 중 몇은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
“드디어 연락을 하셨네.”
견이 본부장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미팅이 성공적으로 끝났는지 밝은 얼굴이었다.
정서가 뻐근한 고개를 좌우로 살짝 틀어보다 그런 견과 눈을 맞췄다.
직원들에게 궁금한 점이 있거나 요청할 점이 있다면 언제든 찾으라 말했던 정서는 그 말의 여파 때문에 종일 서류에 파묻혀 있어야만 했다.
“하 회장님이요?”
“응. 투자 소식 때문인지, 아니면 결혼 소식 때문인지는 몰라도.”
“재한 그룹 때문일 겁니다. 오늘 나간 기사 때문에 백영 엔터테인먼트 주가가 많이 오르기도 했고요. 당황하셨겠죠. 기껏 제약 쪽 열심히 손 써놨더니…….”
“자식인 내가 홀랑 뺏어가서? 이거 생각보다 짜릿하네.”
“잘하셨습니다.”
“윤정서가 판 깐에 숟가락만 올렸는데? 재한 그룹 스캔들 폴더만 따로 만들어둔 게 대단하고 치밀해. 누구 여자인지 몰라도 아주 무서운 여자야, 윤정서.”
“그야 매번 사고를 치시니까요. 재한 그룹 자제분과 엮일 일이 없으실까 싶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엮이기도 하셨고.”
견이 정서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집중해 몰랐는지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을 만져보던 견이 고개를 숙여 정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가 뗐다.
“보고 싶었어.”
“잠깐이었는데요. 그리고 이러시면 저 다시 제 자리로 갈 겁니다.”
“내가 없애라고 지시했는데?”
“그럼 저는 대체 어디서 집무를…….”
“그냥 네가 본부장 할래? 나 내조 잘할 자신 있는데.”
실없는 농담을 하는 견을 밉지 않게 째려보던 정서가 견의 넥타이 매무새를 다듬었다.
하 회장은 오늘 견을 데리고 무슨 얘기를 할까.
견이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화가 났을 테지.
“오늘은 맞지 마.”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으로 보이나 봐, 윤정서는. 누가 들으면 웃겠는데. 같이 갈래?”
“나한텐 연락 안 왔어. 괜히 내가 갔다가 뒷말 나올까 걱정하는 걸 테고.”
“집에 가서 기다려, 그럼.”
“일이 남아서.”
“데리러 올게.”
견이 못내 아쉽다는 듯 정서의 손을 쥐었다.
정서가 견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눈을 맞췄다.
“잠깐 카페 다녀오려는데 뭐 사 올까요?”
견이 나가고 조금 뒤 정서가 본부장실을 나오며 자리에 있던 비서진에게 물었다.
괜찮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비서들 사이로 수연이 보였다.
수연은 그녀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손님 오셨어요, 변호사님.”
“제 손님이요?”
“네. 변호사님. 아시잖아요? 변호사님이 데리고 다니시는 어린 남자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