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85)

57.

“……일정이 꽤 바쁘신데 별도로 요청하실 건 없으실까요? 없으시면 업무 브리핑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아, 오늘은 자료만 두고 나가세요.”

“예?”

수연이 손에 든 자료를 꾹 움켜쥐며 견을 보았다.

견은 제 명료한 말에 들 의문 따위가 있냐는 표정으로 수연을 보았지만,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알려 주어야만 알까.

아니면 그렇게 해서라도 다시 상처 받고 싶은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견은 그녀가 상처를 받든, 받지 않든 티끌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았으니.

“오늘 이후로 다시 자료 검토는 윤 변호사가 맡아서 할 겁니다.”

“하지만 윤 변호사님은 더 이상 백영 엔터테인먼트의 직원이…….”

“아니라고?”

견이 가볍게 물으며 수연을 쏘아 보았다.

수연은 마치 저를 불청객인 양 대하는 견이 야속했다.

그녀는 자기의 자리에서 제 할 일을 다 했을 뿐인데.

지금 오히려 차지해선 안 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건 정서였다.

물론 그것을 정서라고 모르지 않았다.

수연은 지금 자신을 대하는 견의 태도를 부당하다 여기고 있을 것이다.

다른 이였다면, 수연이 아닌 다른 직원이 정서의 앞에 있는 것이었다면 아마 정서는 견을 말렸을 것이다.

굳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불편한 상황을 견디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수연이었다.

수연은 정서에게도 견에게도 위험한 사람이었다.

이미 한 차례 악의적인 기사가 나가도록 도왔으니, 그녀의 눈치를 보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

견이 수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수연은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길고 가느다란 구두 굽이 바닥에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제법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본부장님, 지금 회사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직원분들을 독려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본부장님께서 가지고 계신 능력이 스캔들로 인해 오해받고 폄훼되는 것은 본부장님을 보필하는 저로서는 가장 슬픈 일이니까요.”

견의 손바닥 위로 서류가 담긴 투명한 파일이 닿았다.

견은 파일을 힐긋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수연을 마주했다.

수연의 얼굴은 진지했다.

정서와의 관계를 질투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그를 염려하고 회사의 명운을 걱정하고 있다는 뜻을 내비치는 듯했다.

“이 비서가 이렇게 회사를 아끼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견은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두고 수연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수연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견을 바라보았다.

견이 손을 들어 수연의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간격을 보며 정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다른 뜻이 있겠지만, 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아끼는 사람이 왜 그랬을까?”

“…….”

“안 그랬으면 좋았잖아요, 이 비서님.”

“본부장님, 저는…….”

“징계를 내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견이 수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자료를 들고 정서의 옆으로 가 앉았다.

정서에게 자료를 내밀며 고개를 뒤로 젖혀 등받이에 기대는 폼이 제법 오만했다.

그는 그런 태생이니, 건들지 말라는 뜻이 내포돼 있었다.

“…….”

수연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서가 묵묵히 자료로 시선을 옮겼다.

첫 페이지를 펼쳐 요약된 내용을 확인한 뒤 전달한 내용을 추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몇 번이고 반복한 일이라 익숙했으니까.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정서가 입을 열자, 뒤늦게 수연이 걸음을 옮겼다.

주눅들 법도 하건만,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서두르지도 않고 또박또박 걸어서 본부장실을 빠져나갔다.

“……회사에서 너무 그러지 말지.”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정서가 견을 바라보았다.

수연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정서가 견의 옆에 서는 게,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게 직원들에게는 불편할, 아니 어쩌면 불쾌하기까지 할 터였으니까.

어찌 됐든 투자자가 투자를 철회하고, 팬이 아티스트 활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소한 문제들이 전부 그들과 얽혀 있었다.

“왜? 어차피 다들 익숙해져야 할 텐데.”

“직장이잖아, 하견.”

“지금껏 내 일은 네가 했어. 따지자면 네가 이 자리에 앉는 게 옳을지도 모르고. 심지어 훌륭하게 성과까지 냈었잖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

정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자료로 눈을 돌렸다.

이렇게 된 이상, 몇 배로 다시 성과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는 견의 입지도 다시 잡을 겸, 자신이 견의 옆에 있어도 될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생각이었다.

“윤정서.”

“오늘 미팅하러 오면 미팅실로 직접 안내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본부장님. 가면서 꼭 스튜디오랑 사무실을 지나쳐 가 주세요. 아직 건재하게 일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편이 인상이 좋을 것 같으니까. 또 직원들 미팅에서는 격려하는 말을 하되 두세 가지 제안을 덧붙여야 할 것 같은데. 제작비는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를 꼭 넣어 주세요. 제작비 내에서도 복지 비용을 따로 추가해…….”

정서는 잠시 말을 멈췄다.

견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간 정서의 말을 딱히 귀 기울여 듣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상황이 닥치면 그녀의 기대보다도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 줬던 그였지만.

평소와는 뭔가 좀 다른 느낌이었다.

“듣고 계세요, 본부장님?”

“왜 질투를 안 해?”

“예?”

“아까 나 이 비서 어깨에 손 올렸는데.”

“…….”“이 비서가 뿌린 향수가 무슨 향수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는데?”

정서의 입술 새로 긴 한숨이 샜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무슨 생각인지 자꾸 헛소리만 내뱉는다.

새벽에 잠을 못 자서 맛이 간 걸까?

잠깐이긴 해도 제법 푹 잤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견이 한 번만 더 하자는 것을 정서가 뿌리치고 뿌리쳐서야 겨우 함께 씻고 잠들 수 있었지만.

“어젯밤 생각해?”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견이 곧장 물어왔다.

어떻게 생각이 또 그리로 튀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닙니다.”

“아니긴, 맞는데?”

“집중하세요, 중요합니다.”

“알아, 중요한 거. 잘해야지. 잘해서 윤정서와 하견이 백영 엔터테인먼트에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보여줘야지.”

“잘 아시면서 왜 자꾸 샛길로 샙니까.”

“아니까 그래, 아니까. 게다가 어차피 내내 내 옆에 있을 거잖아, 너.”

“미팅에는 제가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껏 회의에 참여한 것 자체에 의문과 불만을 품은 직원들이 많을 겁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법률 자문을 위해 고용된 인력이니까요.”

“정말 그것뿐이야?”

견이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숙여 정서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의 큰 손이 자료를 쥔 그녀의 희고 가는 손 위로 내려앉았다.

정서가 잠시 그것을 보려 시선을 내리자, 피하지 말라는 듯 견이 따라 시선을 내렸다.

마주친 시선 속에서 견의 마음이 빤히 보였다.

“결혼 걱정하고 있잖아, 계속.”

“당연히 신경이 쓰입니다. 이 주 내로 결혼하자니요. 지금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그래서 내가 한발 물러나 줬잖아. 허니문은 일이 해결된 이후에 가자고.”

“본부장님.”

견이 정서의 손 위에 포개어진 제 손을 힘주어 당겼다.

정서의 몸이 견 쪽으로 기울었다.

너른 어깨가 그녀를 맞이했다.

얼결에 견에게 기대게 된 정서가 몸을 일으키려 발끝에 힘을 주자, 견이 손을 뻗어 아예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회사에서 뭐 하는…….”

“긴장 풀어, 네가 잘못한 거 아니니까.”

“설령 그렇더라도 직원분들 눈에는…….”

“알았으니까 숨 좀 돌려.”

“…….”

“이런 걸로 흔들려선 안 돼. 더 뻔뻔해져야 해. 윤정서,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세간에서 뭐라 떠들어대든 신경 안 써. 비리와 스캔들은 일상이 되고, 네가 선의를 가지고 한 행동은 곡해되고. 결국 네가 누군지, 어떤 것을 좋아했는지조차 잊게 될지도 몰라. 재벌은 그래.”

누가 특별히 가르쳐 주지도 않았을 텐데, 그런 건.

몸소 배웠을까, 견은? 그것들을 전부 쓸쓸히.

정서는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들어 견을 마주했다.

“후회해도 못 무르는데.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야 할 테니까. 네가 나만 있으면 된다고 달콤하게 말하면, 그러면 모르는 척 다 포기하고 도망가자고 말할 수 있겠지만.”

견은 입꼬리를 올려 매끈하게 웃었다.

정서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을 들어 견의 입술을 툭 건드렸다.

“안 되겠는데.”

“응?”

“아무것도 포기 안 해. 네가 전부 가질 때까지, 아무것도.”

“재벌집 며느리도 불사하겠다?”

“응.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아. 직원들 앞에 나설게. 어차피 할 결혼이니, 싫다고 해도 부딪히는 편이 낫겠어. 차라리 욕을 듣더라도 그 편이 나아.”

“정말?”

견의 되물음에 정서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몸을 일으켰다.

떨어지는 것이 아쉬운 듯 제게 손을 뻗은 그를 내려보며 정서가 말을 이었다.

“잠깐 준비하고 올게요, 본부장님. 앞으로 나설 거면 바지 정장으로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같이 가 줘?”

“회의 준비하세요.”

“빈틈이 보이나 싶으면 다시 틀어 막혀.”

아쉬운 듯 중얼거리는 견을 뒤로한 채 정서가 걸음을 옮겼다.

오전 열 시 삼십 분. 웬만한 직원들은 전부 출근을 마쳐 가장 오가는 사람이 많은 시간이었다.

잠깐 심호흡을 한 뒤 정서는 본부장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견을 돌아보며 말했다.

“향수 뿌린 여자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본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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