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상사병이 깊었던 모양이네. 얼굴이 그렇게 야윈 걸 보면 말이야.”
정서는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제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조금 털다 견을 돌아보았다.
방금 막 씻고 나와 정서보다도 더 젖어 있는 견의 발 아래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대충 가운만 두르고 나온 견의 몸의 굴곡은 감춘다고 감춰지는 것이 아니었다.
탄탄한 근육이 자리잡은 나신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언뜻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정서가 습관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몸 제대로 닦아, 감기 걸려.”
“직접 닦아 줄래?”
견이 장난스레 물으며 팔을 벌렸다.
정서가 물끄러미 그런 견을 바라보았다.
안 해 줄 줄은 알았어도, 그렇게 바라보니 민망하네.
그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정서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
견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정서를 보았다.
정서는 수건을 들어 견의 머리칼과 뺨 그리고 어깨를 닦았다.
그리고 견과 눈을 맞췄다.
정말로 닦아 줄 줄은 몰랐던 터라 잠시 방황하던 견의 손이 정서의 손등 위로 닿았다.
그녀는 무심한 목소리로 견에게 물었다.
“다리도 닦아 줘?”
“……왜 이러지?”
“뭐가.”
“왜 이렇게 순순히 말을 들어 주지? 윤정서가.”
“그러면 안 돼?”
정서는 정말 다리를 닦아 주려는 듯 허리를 굽혔다.
그 순간 견은 정서의 손등을 쥔 손에 힘을 더해 그녀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품으로 바짝 끌어당기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
“……뭐야! 갑자기.”
“네가 먼저 저지른 거야.”
“내가 뭘 저질, 하견. 놔.”
견은 버둥거리는 정서의 움직임에도 끄떡없이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조심스럽게 정서를 내려두자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이불이 들썩였다.
“뭐 해. 나 아직 머리 다 안 말랐…….”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애초에 내가 뭐 신호 따지는 사람도 아니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웬 신호 타령인데.”
“원래 결혼할 때 혼수 받는다잖아. 신랑이, 신부한테.”
“어?”
정서는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기가 벅차 멍한 얼굴로 견을 올려보았다.
새초롬한 얼굴에 흘러내린 두세 가닥의 머리칼을 그가 쓸어올리다 손을 내려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흰 피부 위로 어린 붉은 기운이 씻고 난 뒤 나른한 정서의 상태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쌍꺼풀이 진 큰 두 눈과 투명한 눈동자, 오똑하고 올망한 콧방울에 차례로 불빛이 새어드는가 싶더니 탐스러운 살굿빛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모르는 척하는 거야, 정말 모르는 거야?”
“아까부터 대체 무슨 얘기…….”
이해가 한발 늦었다.
뒤늦게 견의 말을 이해한 정서가 고개를 돌리자, 견이 그런 그녀의 턱을 아프지 않게 쥐어 당겼다.
저를 향하게 하고서 천천히 고개를 숙인 견의 숨결이 정서의 눈꺼풀에 내려앉을 무렵, 그가 물었다.
“하지 마?”
“……이럴 때 아닌 거 알잖아.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결혼 준비도 해야 하고?”
“그건…….”
“아직 제대로 대답 안 해 줬잖아.”
“…….”
“정말로 나랑 결혼하기 싫어?”
견은 드물게 온순한 얼굴이 되었다.
샤워하고 나와 아직 열기가 채 식지 않아 훈훈한 기운이 맴도는 살갗이 정서가 입은 얇은 파자마 위로 닿았다.
머뭇거리는 정서의 모습에 견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정서는 가만히 견을 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입꼬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흉터가 난 자국이 손가락 아래 가칠하게 느껴졌다.
“언제 다쳤어?”
“또 말 돌리지.”
“진짜로. 언제 다쳤어?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없었잖아.”
“기억해?”
어떻게 잊겠는가.
정서가 영원에서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그 시간 밖에 없었다.
견을 만나고 처음으로 학교 가는 것이 기다려졌다.
그가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을 때면 일부러 먼발치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꼭 그 마음을 지키고 싶었다.
그 마을에서 근사한 건 오직 하견 하나였다.
어쩐지 조금 오만한 눈빛도, 저를 향한 관심과 호기심에 무심한 태도도 전부 근사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마음에 들었던 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 줘서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건 견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정서는 들키는 것이 두려웠다.
결국 저의 아버지를 해하려 한, 어쩌면 가장 바닥이었을 모습을 보여 버렸지만.
“그날, 비가 왔잖아.”
“……?”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견은 그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잠시 동요한 정서의 눈빛이 흔들리자 견은 정서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그러곤 고개를 조금 더 내려 그녀의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봤다.
“너는 나를 보고 도망쳤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
“우산을 주고 싶었어. 네가 비 맞는 게 싫었으니까. 그래서 좀 따라갔는데, 넌 잡히지 않으려 필사적이었지. 그렇게 걷다가, 뛰다가. 넘어질까 봐 걱정이 됐어.”
낮은 목소리가 정서의 환한 이마에, 두 뺨에, 그리고 입술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꼭 그날처럼 두 사람의 귓가에 빗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멈췄어. 그리고 걸음을 옮겼지. 확인하고 싶었어. 너는 확인하지 못할 테니까,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네가 흘리고 간 흔적은 없는지.”
“설마 거기서…….”
“맞아. 체육관 창고 키를 발견한 거야. 그때 네가 체육관 청소를 맡고 있었지.”
그걸 여태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구나.
정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맙다는 인사는 너무 투박했다.
고작 그런 걸로 자신 대신 그 장소로 돌아간 견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살아있더라. 물가로 걸어 나오는 걸 봤어. 주위에 사람은 없었고, 나는 고민했지. 저 사람을 그냥 두면 죽을 수도 있는데. 체온이 떨어지고 머리에선 피가 나고.”
“…….”
“우연에 기대어 볼까. 도박을 해 볼까. 살아서 걸어 나왔으나 결국 죽었다. 어차피 증거도 없겠다, 유일한 목격자는 나였겠다. 휘청거리는 저 남자를 내버려 두면, 그러면 네가 코피 쏟아가며 밤을 새워 다른 애들 숙제나 할 필요도 없을 거고. 그 지긋지긋하다던 영원에 매여 있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
“차라리 죽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견이 고개를 숙였다.
정서의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것 같았다가, 그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가.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이 입술을 타고 흘러들었다.
“그럼 윤정서가 기쁠까?”
“…….”
“즐거울까?”
“…….”
“남은 삶을 후회 없이 보낼까?”
“…….”
“내가 아는 윤정서는 무르고 또 착해서 그럴 것 같지가 않았어.”
“……하견.”
입술이 열렸다 닫힐 때마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어졌다가 떨어졌다.
평소라면 간지러웠을 그 행동이 이상하게도 애틋했다.
견이 정서의 눈꼬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마치 그녀가 울고 있기라도 한 듯이.
“나중에 연락을 받은 네가 안도하는 모습을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
“개처럼 물고 뜯고 누굴 죽이는 건. 그런 건 내가 할게, 넌 안 해도 돼.”
“…….”
“그냥 내 곁에 있어, 윤정서. 다른 누가 되지 않아도 되니까. 필사적으로 나빠지지 않아도 되니까.”
결혼해 달라는 말보다 몇 배는 더 절절하고 뜨거운 고백이었다.
정서는 손을 뻗어 견의 고개를 제 쪽으로 당겼다.
입술이 맞부딪히며 작은 소리가 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 안을 탐하고 헤집었다.
허벅지가 빠듯하게 엉켜 들었다.
맞닿은 아래가 발화할 듯이 뜨거워져서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기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아…….”
정서의 목덜미에 견의 입술이 닿자 정서의 입에서 탄성이 샜다.
가녀린 목선을 타고 내려오던 입술이 쇄골께에 닿았다.
더 내려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눈빛에 그녀는 허락하듯 견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손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파자마 단추 위를 몇 번 헛돌던 손이 결심한 듯 그것을 쥐어뜯었다.
끝내 속옷 안에 숨겨졌던 봉긋한 가슴에 입술이 닿을 때 그녀의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견은 여린 살갗을 구석구석 탐하고 또 헤아렸다.
처음이라 필연적으로 얼어붙은 몸이 녹아 저절로 열릴 때까지, 한참을.
그리고 비로소 서로가 맞닿았을 때.
“좋아해, 윤정서.”
“…….”
“영원히 널 볼 수 있다면 그게 결혼이든 뭐든, 나는 해.”
그 밤 내내 견과 정서는 떨어질 줄 몰랐다.
&
“좋은 아침입니…….”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활달한 목소리가 들리다 그쳤다.
수연이 신은 붉고 굽이 높은 구두가 좋지 않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왔어요?”
무심한 목소리는 여전했으나, 어제까지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조금 걷혀 있는 견의 얼굴은 멀끔했다.
심지어 눈동자가 어찌나 밝아졌는지, 누가 보면 좋은 일이 있냐 물을 지경이었다.
“……네. 본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수연은 제 눈앞에 앉아있는 정서에 잠시 시선을 뒀다가 다시 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일인지, 어떻게 다시 저 여자가 제 눈앞에 있는지.
그것도 견의 옆자리를 지키고 앉아있게 된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속내를 다 내비칠 수는 없었다.
“오늘 일정 간략히 설명해 드리려 합니다.”
“예, 하세요.”
견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정서가 앉은 소파에 앉더니 정서의 허벅지 위에 제 손을 올려 둔다.
정서가 슬쩍 수연을 보며 허벅지 위에 얹힌 손을 치우려 했으나, 어림없었다.
“오전 열한 시에 부서별 업무 보고가 있을 예정이고 오후 두 시에 외부 협력 업체 미팅이 있을 예정입니다. 더불어 잠시 홀드되었던 드라마 제작에 관하여 미팅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영원에서 찍는 거?”
“네, 맞습니다.”
“그럼 그건 네 시쯤으로 잡죠.”
“알겠습니다.”
정서는 어딘가 자세가 불편하고 피곤해 보였는데 특히 허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수연이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지난밤의 일을 알 수 있는 명백한 시그널에 기가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