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85)

55.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든 행동이 사치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자신의 마음 앞에서 솔직한 것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의 특권이니까.

하지만 어떤 마음은 숨길 수 없다.

숨기는 것이 무의미하다.

결국엔 숨겼던 그 시간이 아까워지는 순간이 온다.

견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어쩌면 그를 조금은 덜 밀어냈을지도 모르는데.

그를 이용하는 바보 같은 일 따위 벌이지 않았을 텐데.

결국 자신의 잘못임을 알면서도 정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겸허히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일밖에 없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즈음까지 이르러서야.

“……화낼 줄 알았는데.”

“화났어.”

“났는데도 나를 좋아해?”

“…….”

견이 그렇게 물었다.

아까까지 싸늘하게 빛났던 눈동자에 다른 생기가 비쳤다.

이렇게 투명하다.

이렇게 투명한 이가 어떻게 지금까지 제 마음을 숨기고 지내왔는지 알 수가 없다.

사실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을 정서만 모른다.

그 모든 농담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그녀만 모른다.

“왜 말을 안 해.”

조가비처럼 굳게 닫힌 입술을 가만히 응시하던 견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정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뜸 내밀어진 손의 의미를 정서는 모르지 않았다.

앞으로 모든 순간에 함께할 수 있을까.

어떤 두려움과 시련이 닥쳐도 우리는 함께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은 무용했다.

사랑하기로 한 이상, 먼저 견이 움직여 준 이상 그녀는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으니까.

&

신호음이 가다가 자동 응답으로 넘어갔다.

은호는 초조한 얼굴이 되어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견의 앞에서는 제법 여유를 부렸지만, 정서가 어딨는지 알 수 없으니 불안했다.

그냥 놓치지 말고 계속 쫓을걸.

한편으로는 후회스럽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나?”

은호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곧 주문했던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뽀얀 국물이 담긴 뚝배기에서 펄펄 연기가 치솟았다.

“사람 앉혀 두고 뭐 하는 거야, 밥맛 떨어지게. 요새 게을러터져서 제대로 된 것 하나 물어오지도 않고. 어디 여자라도 생겼나 봐?”

종훈은 여상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소금과 후추를 번갈아 뚝배기로 떨어뜨렸다.

휘휘 국물을 젓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 회장 쪽에서 들린 소식 없어요?”

“그건 내가 너한테 물어야 할 거 아니냐? 그 일 하라고 내가 너 대학도 보내 주고…….”

“요새 백영 재단 돈 흐름이 이상해요. 주요 전시장에서 작품 한두 점 빠진 것도 그렇고요.”

“아, 그거.”

“백영 식품 안에서도 소란스럽던데. 지분 인수 당하셨죠. 가진 거, 그거 얼마나 된다고 그 지분을 빼앗겨요? 설마 마음이 변했나?”

은호는 그렇게 물으며 내내 허공에 두고 있던 시선을 종훈에게 돌렸다.

시선의 끝이 꼭 목소리처럼 날카로웠다.

종훈은 은호가 저를 돕는 이유가 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험한 애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본인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는 것보단 나았기 때문에 은호가 가지고 있는 복수심을 이용할 생각만 했다.

그런데 그게 칼이 되어 저를 향할 줄이야.

“마, 마음이 변했긴. 나도 몰랐어. 알잖아. 요새 사정 안 좋은 거. 그래서 사겠다고 관심 보이는 사람 있길래 팔았는데 그게 글쎄.”

“하 회장 지분이다?”

“그래. 그놈 철저한 건 너도 알잖아.”

“알죠.”

은호는 상냥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 앞에 놓인 수저를 들고 밥을 크게 한 수저 떠 입에 넣었다.

알맞게 식은 고깃국을 몇 모금 넣더니 맛이 밍밍한 듯 후추를 뿌린다.

“…….”

의심은 거둔 건가?

종훈이 슬쩍 은호의 눈치를 보았다.

얼핏 보면 기분이 풀린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오랜 시간 같이 일했는데 설마 나를 의심할까.

종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어 은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지금껏 잘해왔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면…….”

“근데 있잖아요, 삼촌.”

“어?”

은호는 무심한 얼굴로 고기 몇 덩이를 휘휘 저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종훈을 바라보았다.

무심한 그 얼굴이 어찌나 차던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종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X됐다는 걸.

“왜 굳이 하 회장이 자기 신분을 숨기고 지분을 인수해?”

“어, 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건 상대하기 두려운 사람들한테나 쓰는 잔기술이잖아요. 하 회장이 삼촌을 무서워해?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몰라요?”

은호의 눈이 번뜩였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숟가락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종훈이 그 소리에 몸을 움찔하자 은호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애초에 끝까지 갈 자신 없으면 하지 말자고 나 분명히 말했는데.”

“은, 은호야. 그게 아니라. 나도 자본을 좀 확보해야 싸울 힘이 나지. 지금처럼 자본에 맨날 끌려다녀서는…….”

“팔 거야?”

“뭐?”

“백영 식품, 팔 거냐고. 어차피 지키지 못할 거면 돈이라도 건지자, 이런 심보였던 거잖아요.”

“넌 뭔 말을 그렇게 해.”

“대표라는 사람이 책임감도 없고 비전도 없고. 그러니까 기업이 망하는 거예요.”

“이 자식이 근데 보자보자하니까, 건방지게!”

종훈이 큰소리를 냈다.

손님이 거의 없는 식당인지라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렸다.

하필이면 그 소리에 옆 테이블을 치우고 있던 아주머니가 놀라 뚝배기를 떨어뜨렸다.

둔탁하게 깨지는 소리가 식당을 뒤흔들었다.

“…….”

“……아.”

침묵이 흘렀다.

은호가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잠시 허공을 보는가 싶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까의 무감한 낯은 지운 채 살뜰히 아주머니를 살폈다.

“괜찮으세요? 저희가 너무 소란스러웠죠. 죄송해요.”

“아니야, 총각. 내가 이런 적이 없는데.”

“안 다치셨어요? 제가 치울게요.”

“에이, 됐어. 금방 이것만 주우면 되는데. 편히 얘기 나눠.”

“여기요. 이걸로 이 앞에서 따뜻한 거라도 잠시 사 드세요. 금방 비켜 드릴게요. 삼십 분이면 돼요.”

“아이고, 안 줘도 되는데. 알았어. 천천히 해.”

“감사합니다.”

싱긋 웃는 은호의 천진한 얼굴에 종훈은 입을 다물었다.

저 얼굴의 이면에 얼마나 무서운 놈이 숨어있는지 저조차 너무 늦게 안 탓이다.

엄마도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고 들이대는 성격이었는데 그 피를 물려받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제 이어서 해 볼까요?”

식당 문이 닫히고 비로소 안에 둘만 남자 은호가 종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종훈은 그냥 식사고 뭐고 때려치우고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이런 애일수록 살살 어르고 달래서 설득해야만 했다.

안 그럼 큰 화를 입을 것이 분명하니까.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직원들까지 생각해서 한 행동이라는 거야. 회사 망해 봐. 거리에 나 앉는 직원들이 벌써 몇 백인데 내가 어떻게 나 혼자만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하니.”

“그러게요. 삼촌은 삼촌만 생각하면 안 되죠. 그쵸. 우리 엄마 돌아가신 뒤에 장례식장 찾아와서 그랬잖아요. 너희 엄마 억울한 죽음 알고 있다고.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야, 그건…….”

“제가 괜히 흥분해서 삼촌한테 화냈네요. 그렇게 쉽게 말 어기실 분이 아닌데. 죄송해요.”

은호가 종훈에게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종훈을 보며 은호는 흐트러진 종호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퍽이나 다정한 손길이 제법 진심 같아서 종훈은 더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어쩌려고. 계획은 있어?”

“하 회장이랑 하견 사이 틀어진 건 아시죠.”

“그거야 원래 그랬지. 안 그래도 네가 그 기사 터뜨리자고 하는 바람에 더 뒤숭숭해졌잖아. 그래서 내가 지분을 팔 수밖에 없던 거 아냐. 이 자식아, 따지자면 다 네 탓이야.”

“그럼 하 회장 성격에 버려야 하잖아요? 그런 며느리.”

“안 버린대?”

종훈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은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물컵에 물을 따라 입을 헹궜다.

그리고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종훈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종훈이 천천히 손을 뻗어 은호가 내민 조금 구깃한 종이를 펼쳤다.

동시에 종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걸 네가 어떻게…….”

“차용증이라니. 진짜 돈이 급하긴 하셨나 봐요?”

“너 설마 하 회장 쪽에 사람을 심어뒀어? 이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꼬리도 자르실 자리 봐 가면서 자르셨어야죠. 오늘 오후에 기사 나갈 거예요. 백영 식품 비밀 인수 건과 관련해서. 아마 주식으로도 장난질 좀 치시려고 했을 텐데, 아쉽게 됐네요.”

“야, 안 돼. 그거 새어 나간 거 알면 하 회장이. 절대 안 돼. 배정 식품 측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 잘못하면 전부 일이 엎어지는데.”

“그럼 아마 삼촌을 가만두진 않겠죠? 어쩌면 죽일지도 모르고.”

그 말을 끝으로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훈이 다급히 손을 뻗어 은호의 손을 찾아 쥐었지만, 그는 싸늘히 종훈을 내려 볼 뿐이었다.

“행운을 빌어요. 아, 명복인가.”

은호는 그렇게 말하고 종훈의 손을 쳐 냈다.

종훈이 먼저 빠져나가는 은호의 뒷모습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어? 대체 이제 와서 무슨 복수 타령을 하겠다고! 쥐뿔 가진 게 없으면 적당히 받아들이고 살아야지. 분수에 맞지도 않는 욕심을 부려!”

은호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이라는 종훈의 말을 곱씹으며 식당을 나섰다.

이상하게 눈에 어른거리는 정서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것 역시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갖고 싶은 건 이제 가지며 살기로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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