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85)

54.

겪지 않고서는 배우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정서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할머니가 정서에게 준 사랑은 따뜻하고 푸근했지만 너무 짧았다.

그 기억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면 결국 좋은 것을 주는 것,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서는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설령 갖더라도 그게 제 것이라는 확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사랑은 사치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더 필사적으로 견을 생각하는 마음을 부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견은 착실히 정서를 사랑해왔다.

정서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녀를 위협하는 것을 손수 없애면서.

“왜. 너도 이제 정신이 좀 드냐? 그 미친 새끼가 날 이렇게 만들었으니, 남은 생은 네가 책임져야겠다.”

“…….”

희창의 말에 정서는 답이 없었다.

수그린 고개 때문에 그녀의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 뜨거운 것이 들끓었다.

견에게 희창을 들켰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견이 희창을 상대하도록 내버려 둔 자신이 창피해 견딜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이 어떤 얼굴로 희창을 맞이했을지, 어떤 마음으로 희창을 그곳에 보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그런 마음을 안다고 함부로 말할 수가 없어서.

‘할 수 있는 것도 부탁해 봐. 못 한다, 안 하고 싶다 투정 부리고. 아파 죽겠다고 엄살도 부려 보라고.’

그렇게 말하던 견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정서는 지금은 흐릿해진 기억을 되짚고 또 되짚었다.

그때 이미 결심했을까?

희창을 찾아가서 두 번 다시 정서를 찾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을까?

“재밌는 기사를 봤어. 보아하니 그 회장인지 뭔지 하는 놈팡이가 널 팽개치려고 하는 모양인데. 자리 하나 소개시켜 줘? 어쨌든 변호사 자격증인지 뭔지, 그건 있을 거 아냐. 돈은 있는데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내가 한둘 아는 게…….”

“……그 입 다물어.”

한참 만에 정서의 입술 새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의 끝이 뭉개졌다.

희창은 정서가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말을 끊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버릇없는 X이 어디 감히 지 아빠가 얘기하는데 말을 뚝 끊은 것도 모자라서 입을 다물어? 이게 좀 컸다고 뭐가 달라진 줄 알지.”

희창이 손을 치켜들었다.

정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희창을 마주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 담긴 원망과 분노가 선연했다.

차마 희창이 손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낮은 목소리가 퀴퀴하고 어두운 골목에 깔렸다.

“손 내리지.”

“……!”

정서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필이면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 아니 볼 자신이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희창 역시 상대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본 듯 몸을 움찔하는가 싶더니 헛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골목의 끝에, 지는 해가 겨우 새어드는 그곳에 견은 서 있었다.

햇빛에 한쪽 얼굴이 온통 젖은 채로 가만히 서서 정서를 보고 있었다.

정서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지만, 마주해야 했다.

보고서야 알았다. 떨어지고 나서 단 한 순간도 그의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을.

내내 생각하고 그리워했다는 것을.

“다시 만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가 찾은 거 아냐. 얘가 굳이 나를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고.”

“그럼 필사적으로 피하셨어야지. 저번에 얻은 교훈이 충분치 않으셨나 봐요. 애한테 손부터 드는 거 보니까.”

천천히 견이 걸음을 움직였다.

견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컥하고 치민 뜨거운 것이 삼켜지지 않았다.

정서는 울 수 없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입 안의 살을 깨물며 울음을 참을 때 그 긴 다리와 큰 보폭으로 다가온 견이 그녀의 옆에 섰다.

고작 옆에 선 기척만으로 온몸의 세포들이 곤두선다.

아까 희창이 주었던 학습된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몸을 지배했다.

“제가 말씀드렸죠. 윤정서랑 당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윤정서는 당신과 엮이긴 너무 과분해요.”

“얘가 날 먼저 찾아왔다고,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것 같은데 그냥 보내면 안 되지?”

희창이 정서를 보며 비죽 웃었다.

정서가 저를 여기까지 찾으러 왔으니 그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한 탓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돈을 쥐여 주며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 그러면, 그래 알았다고 너를 위해 그렇게 해 주겠다고 넘어갈 의향이 그에게는 있었다.

“윤정서가 당신한테 부탁을 왜 해.”

“……뭐?”

견이 손을 뻗었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한 손이 잠시간 허공을 배회하다 느지막이 어깨에 안착했다.

붙어오는 몸에서 전해지는 열기, 견은 조금은 화가 나 있었다.

“부탁은 뭘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듣는 건데. 지금 당신은 정서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안 그래, 윤정서?”

견의 시선이 정서를 향했다.

정서가 천천히 견과 눈을 맞췄다.

늘 그렇듯 여유 있던 그의 표정이 어딘가 허물어졌다고 느껴진 순간, 정서가 입을 열었다.

“있어요, 딱 하나.”

“봐, 있잖아. 그래, 뭔데. 이번엔 또 얼마를…….”

“죽어 주세요.”

“뭐?”

“죽어 주세요. 그게 제 부탁이에요.”

정서는 단칼에 말했다.

그리고 제 가방을 뒤집어 가져온 것들을 모조리 쏟아냈다.

바닥을 나뒹구는 것들은 죄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숨어 있는 접이식 칼은 언젠가 정서가 이미 견에게 들킨 적이 있던, 그것과 모양새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런 거 없어도, 그저 분노만으로. 목 졸라 죽이는 것도 어렵진 않았을 것 같은데. 난 아직도 당신이 뭐가 그렇게……. 이렇게 하찮은 사람을.”

싸늘한 정서의 음성이 음산한 골목을 뒹굴다 사라졌다.

정서는 몸을 틀었다.

예감이 들었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보는 희창의 얼굴일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뒤돌지 않았다.

앞서 걸어가는 정서의 뒤로 쏟아지는 희창의 욕설을 들으며 견은 잠깐 서 있었다.

그 자리, 그대로.

앞서 걸어가는, 그늘의 밖으로 나가는 정서를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무서웠으면서 희창을 만나러 온 이유는 단 하나였을 것이다.

그 이유를 안 이상, 견은 더 이상 아무것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

“윤정서.”

“…….”

“윤정서, 어디 가.”

“…….”

“거기 길 없어.”

정서는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견은 그것을 조금 따르다 다리가 아프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나머지 결국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도 한참을 걷던 정서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잘 알지도 못하는 동네를 용케 찾아서 누비고 다녔네.

그런 생각을 하던 견이 걸음을 옮겨 정서를 보았다.

“너 그러다 넘어진다.”

“내가 왜.”

“신발 끈 풀렸는데?”

정서가 무심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려 할 때였다.

견이 허리와 무릎을 굽혀 그녀의 고개 아래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입술을 맞부딪혔다.

당황한 정서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무르자, 견은 손을 뻗어 정서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입술을 맞부딪힌 채로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레 정서의 고개가 찬찬히 뒤로 꺾였다.

한쪽 손으로 부드럽게 고개를 받힌 견이 정서의 입술 새를 제 혀로 훑었다.

“아…….”

짧은 탄식이 샜다.

정서의 손가락이 어색하게 굳어 있다가 찬찬히 견의 등에 내려앉았다.

뜨거운 견의 혀가 정서의 고른 치열을 훑고 입 안 여린 살을 살살 쓸어내리는 동안, 숨이 차도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지러웠다.

오랜만에 맡은 그리운 견의 냄새가 주는 쾌감이, 뜨겁게 맞붙은 두 살덩이가, 견의 손이 살살 어루만지는 뺨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너무 생경했다.

그제야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키스하다 울면 사람들이 오해해.”

“…….”

“내가 못 하는 줄 알잖아.”

“여기 오해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정서의 말 끝에서 울음이 묻어났다.

숨을 헐떡이며 고르는 동안, 견은 차분히 정서를 기다려 줬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정서는 이 울음을 얼마나 참았을까.

그 자존심 강한 윤정서가, 제 아버지를 견이 만났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한 것도 사실이었다.

“말 안 한 거 미안. 나는 네가 괜히 다른 사람 때문에…….”

“좋아해.”

우뚝.

견은 문득 제 귀를 의심했다.

안고 있던 팔을 풀어내고 고개를 숙였다.

뻘게진 눈을 하고 있는 정서의 젖은 얼굴이 유난히도 하얬다.

“……뭐?”

“너는 사랑에 목매는 사람을 싫어하지만, 그런 미련한 거 다 싫다고 했지만……. 네가 먼저 미련했어. 네가 더 미련했어.”

“그게 무슨…….”

“다시는 나한테 말 안 하고 이런 짓 하지 마. 아무리 그래도 비열하고 위험한 사람이야. 혹시 네가 찾아갔다가 나쁜 일이라도 생기면.”

“다시.”

“…….”

“아까 했던 말 다시 해 줘.”

견이 고개를 돌리며 제 눈을 피하는 정서의 뺨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저를 향하게 한 뒤 고개를 숙여 눈을 맞췄다.

“다시.”

“…….”

“나 들어야겠어. 내가 미련한 사람이라고 했던 말 전에 다시.”

“들었잖아.”

“들었으니까 다시 듣는 거야. 다시 말해 줘. 윤정서, 뭐라고?”

“……좋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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