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85)

52.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흐르는 동안, 정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은지, 잠은 좀 잤는지. 뭐라도 챙겨 먹었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너무나도 묻고 싶었는데.

그래선 안 되었다.

아마 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걱정되었겠지만, 그리웠겠지만.

그래서 결국 목소리라도 잠깐 들으려 다른 사람의 핸드폰을 빌려 연락했을 테지만.

“…….”

― …….

멀리서 누군가 견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전화가 끊겼다.

당황해 황급히 끊는 기색이 없는 걸로 보아서 어쩌면 견 역시 자신이 전화한 것임을 정서에게 들키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다치지 말라는 당부였을까, 괜찮을 것이라는 응원이었을까.

그 찰나의 정적을 자꾸 곱씹는 건 견이 그리워서일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두려워서일까.

뚜렷한 대답이 없는 질문을 휘적이던 정서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더 미룰 수 없었다. 시간이 됐다.

“왔어요? 칼이네, 시간이.”

“찾았습니까.”

“예. 뭐, 찾았는데. 생각보다 가까이 있네요?”

“가까이?”

흥신소 사무실로 들어선 정서의 앞에 내밀어진 종이는 방금 출력된 듯 따뜻했다.

해외 불법 토토 사이트에 로그인한 기록이었는데 IP 주소가 거의 동일했다.

“여기가 어딥니까?”

“주소 적어드릴게. 어디 피시방이라고 나오는데, 마지막 기록은 어젯밤이고 이삼일에 한 번꼴로 나타나니까 죽치고 있으면 만날 수도 있겠죠. 아쉽게도 통신 기록은 조회 어렵네.”

“거기 나타나는 게 확실합니까?”

“마지막에 베팅한 건, 결과가 안 나왔는데. 결과를 보러라도 오겠지.”

“알겠습니다. 잔금은 여기 있습니다.”

정서가 가방에서 다른 봉투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뒀다.

남자가 곧장 가져가려고 하자, 그녀는 봉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비밀 지켜 주는 건 확실하죠?”

“우리가 IP 조회한 기록도 안 남아있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리고 그쪽 이름도 뭣도 모르는데 우리가 소문내려고 해도 어떻게 내겠어?”

“건물에 따로 카메라 설치했다거나.”

“들키면 우리만 곤란하고 피곤해. 사람을 이렇게 못 믿어서야 쓰나.”

“알겠습니다. 됐어요, 그럼.”

“그 근처에 모텔이나 여관 같은 곳도 꽤 있는 것 같으니까 찾아보려면 거기 좀 뒤져 보든지. 여자 혼자 가면 위험하니까…… 여기 쓸모없는 이 자식이라도 데려갈래요? 찾는 것까지 현장 뛰면 돈이 따따블이긴 한데…….”

“됐어요.”

정서는 딱 잘라 거절하며 봉투를 건넸다.

그리고 남자의 부하 직원이 적어 준 주소가 담긴 메모지를 챙긴 뒤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자 등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정도 기세면 죽이려는 건가.”

“사장님, 듣겠어요.”

“신경이나 쓰겠어.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여자가 독해도 너무 독하다.”

새삼스레 저런 말이 신경이라도 쓰였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정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건물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았다.

전달받은 주소로 향하면서 내내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다.

그래야 마땅했다.

&

“표정이 어둡네.”

회사로 복귀해 잠시 업무를 보던 견이 수연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연은 저에게 좀체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는 견이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잠시 놀라다, 이내 씩 웃으며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닙니다. 자료는 충분히 검토하셨을까요? 급건이라고 제작팀에서 부탁을 한 터라.”

“이 비서한테?”

“네?”

“부탁을 들은 게 이 비서냐 물었는데.”

“네, 그랬습니다.”

전이라면 당연히 정서에게 갔어야 할 부탁이다.

견이 하는 모든 결정의 결정권자가 정서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정서가 출근하지 않았다지만, 이렇게 쉽게 수연으로 대체되다니.

하 회장이 수연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그래서 수연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집안도 나쁘지 않고, 머리도 나쁘지 않은 수연을 정서를 대신해 제 옆에 둘 생각도 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정서와의 결혼을 무르지 않게 하는 건, 저와 정서를 함께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서일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이 주 뒤 주말로 경조사 공지 하나 띄워요.”

“경조사 공지요?”

“응. 나 결혼…….”

그때였다.

밖에서 조금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짜고짜 본부장실 문이 열렸다.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고 그러면 안 된다니……!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셔서.”

당황한 낯빛으로 사과하는 박 실장의 뒤로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부드럽게 치켜 올라갔다.

“됐습니다. 이만 나가 보죠, 이 비서. 아까 하던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하겠습니다.”

“당신은…….”

수연이 무심코 뱉은 말의 끝을 흐렸다.

견은 그것이 신경 쓰인 듯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견이 알기로 두 사람 사이에는 접점이 없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글쎄. 뭐,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잠깐 옷깃을 스친 정도? 물론 인연은 아닌 것 같고.”

견의 물음에 답을 한 사람은 수연이 아니었다.

불청객처럼 찾아온 것과 달리 목소리는 차분했다.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가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견이 수연에게 나가 보라는 듯 눈짓했다.

수연은 머뭇거리다가 빨리 나오라는 박 실장의 손길에 걸음을 서둘렀다.

“사무실이 좋네요? 대표님 방보다 여기가 더 좋죠?”

견과 둘만 남자 은호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견을 직접 찾을 정도면, 그것도 약속 없이 이렇게 대뜸 회사까지 치고 들어올 정도면 제법 급한 용무가 있을 텐데도 그랬다.

“그렇다면?”

“역시 핏줄 맛이 좋긴 좋아요. 안 그래? 딱히 가진 것도 없고 능력이 없어도 아버지 덕에 이런 좋은 사무실에서 억대 연봉 받아 가면서 지낼 수 있잖아요.”

“나쁘진 않아. 차라도 대접해야 하나? 약속도 안 잡고 대뜸 쳐들어온 손님한테는 원래 아무것도 내어 주지 않는 게 원칙이긴 한데.”

“그래? 괜찮아요. 어차피 차 홀짝이는 고상한 취미 같은 건 없고. 뭐 좀 물어보러 온 거니까.”

견이 은호에게 눈짓했다.

앉으라는 신호였다.

입꼬리를 올린 은호는 견의 말을 순순히 따를 생각이 없다는 듯 책장으로 다가가 빼곡히 꽂힌 자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일순 몸을 돌려 견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얼굴이 좋네?”

“말이 점점 짧아진다?”

“길게 해요?”

“내가 네 형이잖아, 따지자면.”

형.

그 단어에 은호의 여유롭던 표정이 잠시 허물어졌다.

견은 은호에게 다가가 섰다.

그리고 눈을 맞췄다.

“피차 연결된 핏줄을 불결하고 불편하게 여기는 주제니까, 이 얘기는 그냥 넘어가기로 할까. 네 발로 직접 나를 찾아온 건 할 말이 있어서인 것 같은데.”

낮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강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을 내리깔거나 피할 법도 했지만, 은호는 오히려 재밌다는 듯 견의 눈동자 속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근데 지금 그 이유가 윤정서일까 봐, 혹시 윤정서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일까 봐 걱정되지 않아?”

“뭐?”

“아닌가. 고작 스캔들 기사 하나에 윤정서를 그냥 놓아줬으니까. 걱정할 것도 없나?”

“……함부로 이름 부르는 게 상당히 거슬리네?”

“부른다고 닳는 건 아니니까. 그게 신경 쓰여? 너 때문에 윤정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긴 하고?”

견의 눈이 번득였다.

잠시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어리는 것을 보니, 정서에 대한 마음을 접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은호는 그런 견이 가증스러웠다.

정말로 정서가 걱정됐다면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그런 상황에서 견이 없다면 정서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모두 정서에게서 등을 돌리고 정서에 관해 수군댈 때, 견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정서를 은호에게 보내는 일 뿐이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

“네가 데리고 놀았다는 그 여배우, 장소영이 사라졌다면서 신경호가 윤정서를 얼마나 괴롭히던지.”

“다쳤어?”

“그렇게 뒀겠어?”

신경호는 멀리서도 제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만큼 견이 내뿜는 살기가 거셌다.

정서가 바란 만큼 조금은 시간을 줄 생각이었는데 어쩌면 견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견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정서를 데리고 올 준비를 할 시간이.

그렇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어디 있어, 윤정서.”

“어디 있는 줄 알면, 이제라도 가게? 그것만큼 치사하고 초라한 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냥 쭉 그 노선 유지해. 알잖아. 윤정서가 누구 때문에 지금 이렇게 힘든 건지.”

“말 안 할 거면 꺼져, 찾으러 가야겠으니까.”

견은 은호를 밀쳤다.

이제 봐줄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견의 팔목을 잡은 은호가 거센 힘으로 견을 제 쪽으로 당겼다.

금방이라도 부딪칠 듯 두 사람의 몸이 가까워졌다.

“윤정서의 아킬레스건이 대체 뭐야?”

“그걸 네가 왜 물어.”

“그거 때문에 간 거잖아, 윤정서. 제 발로 위험을 찾아 걸어가는 사람 그냥 보내 놓고 이제 와서 애틋한 척, 열렬한 척. 우스운 거 알고 있지?”

은호의 말끝이 매섭고 날카로웠다.

비로소 은호가 견을 찾아온 이유가 명확해졌다.

정서는 희창을 만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저 혼자서, 그동안 내내 저를 괴롭혀 왔던 그 고리를 끊어내고자.

용기를 낸 것이다.

견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충분히 겪을 만큼 겪었으면서도, 다시 맞설 용기를 낸 윤정서가 너무 미련했다.

그 미련함이 싫었는데, 사는 내내.

결국 또 그 미련함을 사랑하게 됐다.

“누구 찾으러 간 건지 말해. 내가 지금이라도 가서 수습…….”

“못 찾을 거야.”

“뭐?”

“윤정서가 찾던 사람은 지금 죽고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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