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85)

51.

“하 회장이면 네 아버지 말하는 거냐? 호로 자식이라더니, 정말 제 아버지를 그딴 호칭으로⋯⋯. 아니 것보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내가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해, 지금 상황에?”

견이 되물었다.

견의 모습은 무언가를 사과하러 온 사람 같지도, 그렇다고 무언가를 부탁하러 온 사람 같지도 않았다.

이쯤 되니, 영우는 견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이 상무가 이쪽에 백영 그룹의 기술까지 전부 들고 찾아온 거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하 회장이 직접 보냈다니, 그게 말이 돼? 우리 재한이 고작 그 정도도 안 알아보고 속아 주는 그룹처럼 보이는 거야?”

“응.”

대답이 간결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턱 벌린 영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견이 손을 들어 테이블 위에 있던 냅킨을 쥐었다.

그리고 손을 그대로 뻗자 영우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순간적으로 견이 저를 때리는 줄 안 탓이었다.

“하아⋯⋯.”

그 모습을 보고 피곤하다는 듯 낮은 한숨을 내쉰 견은 손을 마저 뻗어 벌어진 영우의 입을 닫아 주었다.

다정한 손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친 손길도 아니었다.

“입 닫으라고.”

“⋯⋯어?”

“입 닫고 들어.”

견이 그렇게 말한 뒤 상자에서 잘 익은 사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야, 그거 내 거⋯⋯!”

영우가 무심코 손을 뻗어 그런 견을 제지하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굳혔다.

거둬들이는 손길이 제법 굴욕적이었으나, 견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사과를 제 입에 곧장 가져가 아삭하고 베어 물 뿐이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잇자국이 난 사과의 단면이 뽀얗게 반짝였다.

고작 사과 하나 먹는 장면인데도 영화처럼, 화보처럼 더럽게 멋져서 영우는 조금 심사가 뒤틀렸다.

“이 상무 원래 내가 데리고 있었거든? 알잖아, 나 영감이랑 사이 안 좋은 거.”

“⋯⋯.”

“근데 이 상무가 갑자기 사라진 거야. 뭐, 어차피 오래 데리고 있으면 거추장스럽기나 하고 죽일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 그런데 알지? 백영 제약 잠깐 부작용 때문에 시끄러운 적 있는 거.”

“그래, 그거 때문에 우리가 이 상무를 영입한 거잖아.”

“아직 입 열어도 된다고 말 안 했는데?”

허업.

영우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 잘 듣는 모습이 퍽 보기 좋다는 듯 견우가 싱긋 웃더니 몸을 아래로 숙여 영우와 눈을 맞췄다.

“근데 부작용 말이야, 그거. 사실 큰 문제가 아니야. 부풀려도 큰 문제가 될 리가 없어. 왜냐? 피해자 가족들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보상했거든. 물론 이건 하 회장은 아직 모르는 사실이고.”

“⋯⋯.”

“하 회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무를 왜 너희 회사로 보냈느냐? 너희가 한참 우리 따라 개발하던 그 신약들, 인체 테스트 아직 통과 못 했잖아. 결과가 지지부진해서 아직 발표도 못 하고 있고. 곧 주가 떨어질 일만 남았지.”

“이 상무, 이 새끼가. 감히 대외비인 이슈를 외부에 유출⋯⋯.”

흥분한 영우가 결국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햇살이 카페 안으로 비쳐들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스카이라운지 아래로 보이는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을 잠시 지켜보고 있던 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상무가 말했겠어? 나한테서 도망쳐서 하 회장 편에 붙었는데. 게다가 이거 나만 아는 정보는 아니야. 그 바닥에서 나름 왕따인 내가 알았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뜻이니까. 그거 뻔히 알면서 왜 보냈겠어, 이 상무를 너희 회사로?”

“설마 주가 떨어지는 시기 예측해서⋯⋯.”

“재한 그룹이야 재한 제약 하나 잃는다고 큰 타격은 없겠지, 어차피 너희 회사에서 잘 나가는 분야도 아니니까. 문제는 네 입지지. 그거 네 거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잖아, 너. 그래서 일부러 윤정서 얘기하면서 백영 제약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아내려고 한 거고.”

이어지는 견의 말에 영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걸 알면서 나를 그렇게 개 패듯이⋯⋯.”

“안다고 달라지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 상무 자르고 감방 보낼 수 있는 카드 줄게. 부정 청탁에 횡령까지 자료 다 모아뒀어.”

“뭐? 진짜? 그럼 당연히 백영 제약도⋯⋯.”

“타격 있겠지. 그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고.”

“너 진짜 불효막심한 놈이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영우는 신이 난 듯 아까의 풀죽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죽하면 손을 뻗어 슬쩍 견의 손을 쥐었다가 놓고선 뒤에서 사과 상자를 황급하게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자료를 거기 담아뒀을까 싶어서였다.

“거기 아직 없어. 맨입으로 줄 순 없으니까.”

“뭐야, 뭔데. 뭘 원하는데.”

“예식장.”

“뭐?”

“우린 호텔이 없잖아. 너희 호텔에서 하는 결혼식이 제법 성대하다면서? 예식 서비스도 훌륭하고. 나 결혼해야 하니까, 한 달 뒤, 아니 이 주 뒤로 잡아 줘.”

“미쳤어? 우리 일 년 전에 예약해도 당장 못 해.”

“그러니까 네가 네 힘을 발휘해야겠지?”

“누구 결혼식인데. 설마 너? 그런 기사가 나고도 윤정서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냐?”

“예약하려면 신부 이름이 필요해서 그런 거지? 그럼 흔쾌히 알려 주지. 윤정서 맞아.”

“미친 새끼.”

“예약하고 연락해. 비서실 통해서.”

“진짜 넌 또라이야.”

“알아들은 걸로 알고 간다.”

견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련이 없는 듯한 걸음으로 곧장 카페를 빠져나갔다.

덕분에 황망히 앉아있던 영우만 견이 내려둔, 한 입 먹고 버린 사과를 보다 씩 웃었다.

“내가 미친개 덕을 다 보네.”

&

“사람을 찾고 싶으시다고?”

“네.”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데?”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애매한 어투가 정서의 심기를 건드렸다.

먼지가 잔뜩 긴 테이블 유리나 성의 없이 내어놓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 같은 것이 신경 쓰였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정식적인 루트로 가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터였다.

변호사로 일할 때는 이런 곳을 구태여 이용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자료를 얻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 기사만 나지 않았어도 도와줄 사람이 몇 있을지 몰랐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정서는 추락했다.

수연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어쩌다 길에서 마주친 엔터테인먼트 직원이 저를 알아보고 황급히 고개를 돌린 것만 봐도 그랬다.

그 불쾌하다는 듯 잠깐 찌푸려지던 얼굴 역시 눈에 선했다.

“그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아니, 뭐. 가족이면 좀 더 싸게 해줄까 해서. 애틋하잖아요.”

“그런 건 됐습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 주세요. 불법 도박 사이트 같은 곳에 로그인한 기록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쉬운 게 아니라서 말이지. 돈은 좀 준비하셨고?”

“선금 드리고, 찾으면 잔금 드리겠습니다.”

“젊은 아가씨가 똑부러지네. 그래요, 그럼. 이름이?”

“윤희창.”

“생년 월일이나 주민등록번호 알아요?”

“예.”

“여기다 적어요.”

정서는 앞에 놓인 구겨진 메모지에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번호를 적어 내려갔다.

그렇게 도망치려고, 멀어지려고 했었는데.

결국은 그녀 스스로 먼저 찾게 되었다.

그런 모순이, 이 아이러니가 얼마나 우스운지.

“아빠구나?”

“⋯⋯.”

남자는 씨익 웃었다.

어금니 쪽에 씌운 금니가 형광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 단어에 정서의 얼굴이 굳었음은 분명했다.

“빚 얼마나 져서 그래요? 사채업자들이 귀찮게 굴어서 찾으려는 거죠?”

“실력 좋다고 들어서 온 겁니다. 빠르면 삼십 분 안에도 된다던데, 제가 잘못 찾아온 거면 지금이라도 일어서고요. 제가 낭비할 시간은 없거든요.”

“거참, 성격도 급하네. 알았으니까 기다려요. 여기 근처 카페 가서 기다리고 있던지. 야! 이리 와 봐.”

한쪽에 앉아 컴퓨터만 들여다보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던 정서는 가방 속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선금입니다.”

“확인 안 해도 되려나?”

“확인해 보세요.”

“됐어요. 어디로 전화하면 돼?”

“한 시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래요.”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기껏 현금까지 준비했는데 핸드폰 번호를 남길 수는 없었다.

가방을 챙겨 나온 정서의 시야로 눈 부신 햇살이 들이쳤다.

이런 낡은 건물에도 햇볕은 공평하게 들었다.

잠시 하늘을 물끄러미 보던 정서가 걸음을 옮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 정도는 사두는 건데.

어딘가 들어가 있기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어 가까운 버스 정류장을 찾아 앉았다.

“⋯⋯.”

손에 든 가방이 묵직했다.

이곳에 오기 전 혹시 몰라 챙긴 각종 호신용품이 거치적거렸다.

사지 말 걸 그랬나.

어차피 챙겨 봤자일 텐데.

결정적인 순간에서 아버지는 결국 손을 휘두를 것이다.

맨몸으로 싸워 이기기가 쉽지 않을 테니 가방에 든 것을 꺼낼 시간이 없을지도 몰랐다.

어린 정서는 꿈속에서 몇 번이나 희창을 죽였다.

칼로 찌르고 계단에서 떠밀고 목을 졸랐다.

그렇게 사력을 다해 죽이고 또 죽였는데.

정작 확인해 보면 죽어 있는 것은 정서, 본인이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박 실장이었다.

설마 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찰나의 망설임 없이 정서는 전화를 받았다.

“네, 박 실장님. 윤정서입니다.”

― ⋯⋯.

“박 실장님?”

― ⋯⋯.

침묵이 길었다.

순간 정서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발음해선 안 될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하견?”

― …….

수화기 너머로 짧은 한숨과 옅은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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