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부모를 죽인 원수라니.
놀란 듯 침묵하는 정서를 바라보던 은호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조막만한 얼굴이 그리 무겁지 않을 것이 뻔한데도, 이상하게도 정서는 무게감과 압박감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러니까 날 불쌍하게 여기고 마음껏 이용해요.”
“⋯⋯말의 앞뒤가 좀 안 맞는데.”
정서가 고개를 숙였다.
동그란 사과처럼 예쁜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복슬거리는 머리를 무심코 손으로 쓸어보려다 관뒀다.
은호가 말한 부모의 원수가 견일 리는 없고, 사람을 죽일만한 사람이라면.
그런 일까지 저지를 사람이라면 하 회장뿐이었다.
하 회장이 대체 무슨 이유로 은호의 부모를 해했을까?
은호의 부모가 누구기에.
“날 이용해 줘요. 이건 부탁이기도 하고⋯⋯.”
은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정서와 눈을 맞춘 채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찾아 쥐었다.
손가락 틈새로 천천히 맞물려 들어가는 손가락, 뜨거운 그의 손의 감촉이 선연히 느껴졌다.
“명령이기도 해.”
어울리지 않는 낯선 단어에 정서가 얼굴을 찌푸렸다.
은호는 그 모습을 보고도 큰 동요 없이 무심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도 이용하니까, 윤정서.”
“네가 날? 어떻게 이용했는데.”
“지금 나랑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반쯤은 이용당하는 거예요, 당신은.”
정서가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듯 인상을 한층 더 찌푸릴 때였다.
“⋯⋯윤 변호사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당황한 표정으로 선 수연이 보였다.
정서는 곧장 은호에게 잡혀 있던 손을 뺐다.
은호가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이며 수연을 보았다.
“오셨어요, 이 비서님.”
“네. 그런데 다른 분과 같이 계신 줄은 몰랐네요.”
수연은 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머리를 탈색한 어리고 조금은 대책 없어 보이는 남자애와 정서의 조합은.
둘이 제법 자연스럽게 붙어 있는 것을 보니 가까운 사이 같았는데 도무지 어떻게 만났는지, 어쩌다 어울리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 썩 나쁜 일은 아닌가.
평판과 입지가 엉망이 된 지금의 정서에게 견에 대한 열망이나 열정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적당히 포기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지.
그렇게 생각한 수연이 맞은편에 앉자, 정서가 은호를 밀어냈다.
“이제 가.”
“이 여자예요?”
“가.”
“흠⋯⋯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딱히 상대가 될 것 같진 않은데요.”
“차은호.”
“가요, 가.”
은호는 씨익 웃으며 수연과 눈을 맞췄다.
옆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보고 놀랄 만큼 환하고 눈부신 미소였지만 수연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은호가 남기고 간 말이 묘하게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안 된다니.
상대가 안 되는 건, 출신이든 무엇이든 자신보다 앞서지 못한 정서였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정서는 끝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나간 은호의 뒷모습을 굳은 얼굴로 보다 낯빛을 바꿨다.
파리해 보이는 안색이 제법 피곤하고 고단해 보였으나, 운 기색은 없었다.
“본부장님이 회의 들어가셔서, 다행히 시간이 좀 났습니다. 삼십 분 뒤면 들어가 봐야 해요. 오늘 일정이 있으셔서요.”
“예, 그러시겠죠.”
견의 얘기를 꺼내면 동요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서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해서 무언가를 체념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조바심이 나는 것은 외려 수연이었다.
제 앞에 놓인 잔을 만지작거리던 정서가 고개를 들어 수연과 눈을 맞췄다.
“제가 휴가계를 못 냈어요. 그러면 보통 회사에서 왜 출근하지 않은 것인지, 언제 출근할 것인지. 이런저런 걸 묻기 마련인데 연락이 영 없네요.”
“아마 바빠서 그럴 거예요. 법무팀이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거든요.”
“실제로 고소를 진행할 예정인 건가요?”
“글쎄요⋯⋯. 본부장님이 별도의 지시를 내리신다면 진행되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시면 저도 확답을 드리기 어렵네요. 아시잖아요. 고소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고소를 진행하는 것에는 거리가 있다는 것. 본부장님께서 워낙 정신이 없으셔서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 못 하신 모양인데 원하시면 제가 한 번 부탁드려 볼까요?”
수연이 정서를 배려하듯 온화하게 웃었다.
정서는 그 웃음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녀를 완전히 외부인으로 대하면서 견이 마치 자신과 가까운 사이인 양 과시하는 것.
하지만 고작 이런 도발에 흔들릴 수는 없었다.
정서 역시 매끄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개인으로서도 얼마든지 진행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제가 변호사기도 하니까. 너무 염려치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래요, 그럼.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죠. 승소율이 무척 높으셨잖아요. 고작 이런 스캔들로 묻히기에 아까운 변호사시기도 하고요. 어디서든 잘하실 겁니다.”
한마디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어쩐지 순순히 만남을 승낙했다 싶더라니, 수연은 이번 기회로 확실히 정서의 생각을 알아내고 종지부를 찍으려 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오늘 이렇게 뵙자고 한 건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어서예요. 조사 과정 중에 제 결백을 밝히려다 보니 어쩔 수 꼭 필요한 정보라서요.”
“예, 물어보세요.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조금 절박해 보이는 정서의 얼굴을 본 수연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눈빛도 온순해진 것이 기분이 풀린 듯 보였다.
그 틈을 파고들어야만 했다.
“그때 같이 호텔에 갔을 때 혹시 복도나 다른 곳에서 이상한 사람을 목격한 적 없으세요?”
“이상한 사람이라면 어떤? 연락 오시기 전까지 면밀히 살피며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특이점을 발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혹시 전지훈 기자에게서 온 봉투 어디서 발견하셨어요?”
“그때 말씀드렸는데. 우편함에서 발견했다고.”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받는 이 부분에도 본부장실로만 적혀 있었거든요. 어떻게 그게 본부장님께 온 우편물이라 확신하셨죠?”
“네? 그야⋯⋯.”
“그 우편함에 도착하는 우편물들은 대개 본부장실로 전달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부장님께서 직접 확인하는 자료는 거의 없으니까요. 대부분 비서실에서 먼저 확인하고, 개인적인 우편물이면 상식적으로 집으로 도착하겠죠. 간혹 자신의 대본을 봐 달라는 연락 등이 도착하거나 협박 메일이 도착하기도 하지만 그럼 겉봉에 반드시 씁니다. ‘하견’이라는 이름을. 그렇지 않으면 비서실에서 커트해 버리니까요.”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까지는 잘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하견 본부장님 것이라 짐작한 것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제가 열겠다고⋯⋯.”
수연의 얼굴이 조금 허물어졌다.
묘하게 빨라진 말투라든지, 슬쩍 달아오른 귓불 같은 것이 그녀가 당황했음을 증명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러냐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서는 달랐다.
“김 실장님이 우편물을 담당하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챙기십니다. 그날 두 분은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셨더군요. 그사이 도착한 퀵은 없었습니다. 이건 출입 기록을 확인해 알아낸 것이고요.”
“⋯⋯지금 뭘 물어보고 싶은 걸까요, 윤 변호사님은.”
정서는 이제 거의 확신했다.
전지훈과 대화를 나누던 사람도, 그래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사람도 전부 수연이라는 것을.
남아있는 아이스 커피를 모조리 들이켠 뒤 컵을 내려둔 그녀가 벗어두었던 외투를 걸쳤다.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요. 내가 누구랑 싸우고 있는지.”
“⋯⋯.”
“그래야 제대로 싸울 수 있으니까.”
정서는 수연과 눈을 맞추고 웃었다.
그러나 수연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정서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먼저 몸을 일으켰으니까.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좀 더 일찍 찾아낼 줄 알았는데, 어쩐지 좀 싱겁네.”
“⋯⋯.”
“그럼 건투를 빌어요. 잘 싸워 봐요.”
수연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틀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려다 뒤늦게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정서를 돌아보았다.
“아, 참. 참고로 본부장님도 아세요.”
“⋯⋯?”
“아시는데도 저를 그냥 두시더라고요. 원래 좀 독한 여자가, 취향이시잖아요?”
이제 하고 싶은 말을 다 마쳤다는 듯, 수연은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수연의 뒷모습을 본 정서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견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도 잠시, 정서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진짜로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도려낼 차례였다.
&
“나를 먼저 찾자고 하네. 뻔뻔하기도 하지.”
영우는 자리에 앉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먼저 와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견이 고개를 들어 영우를 보았다.
그다지 반가운 기색은 없었다.
그저 들여다보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끄고 다리를 꼴 뿐이었다.
그 오만한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은 영우가 물을 내려놓는 종업원에게 괜히 성질을 부렸다.
“여기 의자가 굉장히 불편해서 심기가 거슬리네.”
“죄송합니다. 좀 더 푹신한 의자로 바꿔드릴까요?”
“됐어요. 무슨 의자를 갖다 주든 삐뚤어진 마음이 풀리진 않을 테니. 그냥 커피나 한잔 가져다주죠.”
“커피 말고 주스.”
“그러든지.”
견은 제 옆에 놓아두었던 것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지 테이블이 덜컹거렸다.
“이게 뭐야?”
“사과.”
“뭐?”
“사과라고.”
영우가 손을 뻗어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채운 것은 정말 사과였다.
그것도 아주 빨갛고 탐스럽게 생긴 사과.
“미쳤냐, 너? 뭘 부탁하려고 만난 거면 여기 적어도 봉투 정도는 담아야⋯⋯.”
“봉투 가지고 돼? 너 그런 시시한 놈 아니잖아. 시시한 놈이 아니니까 감히 내 앞에서 윤정서가 어쩌고, 저쩌고 떠든 거 아냐?”
“⋯⋯.”
그때를 생각하면 뺨이 다시 아픈 것 같다.
영우가 입을 다물었다.
견이 씩 웃으며 몸을 숙였다.
낮은 목소리가 감미롭고 달콤하게, 영우의 귀에 내려앉았다.
“재한에서 데려갔다며, 이 상무.”
“⋯⋯네가 그걸 어떻게.”
“그거 하 회장 짓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