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85)

49.

“여러모로 적합한 인재였습니다. 실력이나 스펙이 모자라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넘쳤습니다. 아무래도 이 업무엔 근성이 중요하다 생각했고 그런 근성을 보인 분 중에서 가장 적극적이었죠. 그래서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부장님께서도 동의하셨고요.”

박 실장은 긴장한 듯한 모습으로 답했다.

견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처음 수연을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정서와 닮게 꾸며낸 모습을 보고 제법 애썼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당시엔 정서가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웃지는 않을까.

그것만 생각하느라 수연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마음에 안 드신 부분이 있다면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근무 태도는 어떻습니까?”

“성실한 편입니다. 어제도 늦게까지 근무했는데 불평도 없었습니다.”

“일단 알았으니 나가 보세요. 아, 그리고⋯⋯.”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던 박 실장이 견을 다시 돌아보았다.

견이 잠시간 침묵했다.

자연히 그는 정서를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출근을 했을까. 

안 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무모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

박 실장은 이어지는 적막에 조금 당황했다.

이제껏 자신이 아는 본부장은 한 번도 무언가를 망설인 적이 없었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무모하고 불합리한 이야기일지라도 말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걱정이 깊어질 즈음 견이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나가 보세요.”

“⋯⋯.”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주간 회의 말씀하시는 걸까요?”

“예. 그것부터, 전부다.”

“알겠습니다.”

박 실장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일정을 취소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굳이 그 말을 전하지 않은 것은 혹 견의 마음이 뒤바뀌어 또 무모한 제안을 전할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본부장실을 빠져나가는 박 실장의 뒷모습을 보던 견이 시선을 돌렸다.

제 책상 위에 올려진 결재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봐서 뭘 알아. 윤정서가 보고 사인해.’

‘서명은 직접 하셔야죠.’

‘너랑 난 하나잖아. 네가 하면 그게 곧 내 서명이야.’

‘변호사로서 공문서 위조가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지 따로 말씀드려야 합니까?’

‘무릎 위에 올라와 앉아서 해 줄 거면, 얼마든지.’

그때 저를 보는 시선이 어땠더라.

약간의 경멸을 담은 그 눈빛을 견은 좋아했다.

수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 회장이 타겟을 정서로 삼은 것도, 정서가 하 회장에게 약점을 잡힌 것도.

지금 이렇게 벌어지지도 않은 일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도 전부 자신 때문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을 일.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묻지 않아도 수연임을 견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네.”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하며 그가 책상에 몸을 기대 섰다.

그리고 생각했다.

설령 수연의 말이 맞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그건 하견이 윤정서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고.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일정을 소화하실 예정이라고 해서 회의 전 간단하게 안건 브리핑해드리러 들어왔습니다.”

“예, 하세요.”

수연은 말을 잇기 전 잠시 견을 살폈다.

그러나 무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견의 의중을 읽을 만큼 사이가 가깝지 못했다.

자료를 견에게 건네주고 앞에 선 수연이 입을 열었다.

“제작 투자를 하기로 했던 투자처 몇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드라마의 흥행에 관해 의문을 품은⋯⋯.”

견은 정서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축축했는지 또렷이 알고 있다.

그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무슨 짓까지 하려 했는지.

빗속에서 떨리던 손과 그대로 무너지던 작은 몸까지, 전부 또렷이 기억했다.

견은 정서의 유일한 목격자.

누군가 정서의 곁에 있어야 한다면, 그녀의 그런 면까지 전부 본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불행하더라도 조금만 견디라고, 이기적이고 유치하더라도 견디라고.

그 방법밖에는 없으니까.

“⋯⋯추가적으로 투자처를 구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얼마가 비지?”

“예?”

“투자금, 얼마나 비냐고.”

“그리 큰 금액은 아닙니다. 큰 투자사들은 여전히 확고히 투자 예정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영원시 관련 부처에 투자를 키워 달라 요청할 수도 있는 상황이긴 합니다만, 그러면 영원시에서 촬영되는 분량을 늘려야 하고요.”

“미팅 끝나고 다음 일정까지 비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두 시간 정도 비어있습니다. 혹시 조율이 필요하시면⋯⋯.”

“그거면 충분한데 연락할 사람이 있습니다. 재한 그룹 김영우 책임 쪽 비서실에 연락해요. 만나고 싶다고.”

견은 짧게 말한 뒤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할 말이 남은 듯 머뭇거리는 수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으나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아, 그리고 사과 한 박스 준비해요.”

“사과요?”

“예. 기왕이면 비싼 걸로.”

&

정서는 카페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봤다.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아있었다.

정서의 맞은편에 앉아서 불퉁한 얼굴로 레모네이드를 빨아들이던 은호가 고개를 들었다.

“나 진짜 가요?”

“응.”

“나 아직 아픈데?”

“약 발라 줬잖아.”

입술이 조금 터지고 주먹에 멍이 들었으나, 은호는 거의 멀쩡했다.

오히려 은호에게 맞은 경호가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정도였다.

“누구 만나려는 건데요.”

“의심 가는 사람.”

“무슨 의심?”

“이전에 전지훈 기자가 회사 근처에서 누군가 접선했다고 했잖아.”

“네⋯⋯ 설마 그게 누군지 알아냈어요?”

“아직 확실하진 않아. 확인하려고 나온 거야. 그러니까 이제 진짜로 가.”

정서는 그렇게 말하며 제 앞에 놓인 핸드폰을 내려보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은 게 실로 오랜만이었다.

잠깐만 자리를 비워도 정서를 찾아 댔던 누구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도 허전하다 느끼다니, 정서는 스스로에게 조금 실망했다.

“누군지 알면요?”

“응?”

“누군지 알면 어떻게 하려고요. 지금 기세로는 아마 기소 안 될 거예요. 물론 지금 여론이 장소영 편이기는 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난다면 점차 바뀔 수도 있을 거고. 뭘 바라고 그렇게 행동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하 회장 사람일 확률이 제 눈엔 가장 높아 보여요. 하 회장이랑 싸울 준비 됐어요?”

표정은 꼭 삐진 아이 같으면서 하는 말은 명확하고 또렷했다.

얘도 눈치가 참 빠르고 머리가 비상하구나.

정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은호를 바라보았다.

답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은호는 짧은 한숨을 내뱉고는 손을 뻗어 정서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그냥 덤빌 상대 아니에요. 그 사람 되게 영악하고 나쁜 사람이에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네?”

“차은호, 너 백영 그룹이랑 무슨 사이야?”

장난스럽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견을 싫어하는 것도 그렇고, 백영 식품 대표이자 하 회장의 동생인 하종훈을 위해 일하는 것도 그렇고.

이상하던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았던 것은 은호의 비밀까지 알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은호와 이렇게 오래 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 회장까지 적대적으로 느끼고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보통 관계가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나올 필요가 없었다.

“⋯⋯언제 물어보나 했는데, 그래도 물어보긴 하네요?”

“⋯⋯.”

“이제야 나한테 관심이 좀 생겼나?”

다시 장난스러운 얼굴로 돌아온 은호를 보고 정서가 얼굴을 굳혔다.

지금 농담이나 하자고 이런 말을 묻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반응을 알아챈 은호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화내지 마요. 지금 화낼 타이밍 아니야. 나 당신 생명의 은인이라고요. 그것도 두 번이나.”

“딱히 신경호가 내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았는데.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고. 네가 말했었잖아. 나한테 받을 것이 있다고. 그게 백영 그룹이나 하견이랑 관련이 있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건데요?”

“그렇잖아. 내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어. 고작 해봤자 학력이랑 변호사 자격증, 그리고 하견 본부장과의 친분 정도야. 그런데도 넌 상관없다고 했어. 게다가 단순히 돈벌이를 위해서 하종훈 대표님 말을 듣기에 넌 똑똑해.”

“나 똑똑해요? 또 어떤데요. 나에 대해 평가해 주는 게 처음이라 더 듣고 싶은데.”

“차은호.”

정서가 낮은 목소리로 다시 은호를 불렀다.

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서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뭐 하는 거냐는 듯 따라붙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며 은호가 고개를 숙였다.

정서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후하게 말해 주는 게 좋을 텐데, 듣고 싶은 걸 들으려면.”

나긋한 목소리가 숨결과 섞여 나와 귓가를 간질였다.

“야, 하지 마.”

“왜요. 간지러워요?”

“좀 떨어져 봐, 어?”

“듣고 싶은 게 있으면 보다 적극적이고 협조적으로 나오셔야죠. 변호사면 협상에 되게 능할 텐데?”

“⋯⋯.”

정서는 은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쫄거나 주저하는 기색 없이 그녀와 눈을 맞춘 은호가 입을 열었다.

“원수예요, 원수. 부모를 죽인 원수.”

“⋯⋯뭐?”

“이렇게 시시하게 말해 줄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면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해서 말해요. 어쩐지 이 얘길 전하면 날 되게 불쌍하게 생각할 것 같거든. 그리고 내가 본 윤정서는 그런 감정에 약하고.”

은호가 정서 쪽으로 몸을 숙였다. 

정서는 몸을 뒤로 무르려다 기둥에 부딪히곤 고개를 살짝 틀었다.

은호의 까만 눈동자가 번득였다.

이번에도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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