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85)

48.

“결혼 소식을 어떤 여자에게 들었다고요?”

“지금 그게 중요해? 너희만 아니었어도, 소영이가 이렇게 망가질 이유는 없어. 아무리 그래도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애였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렇게 무책임하게 굴 애가 아니란 말이야.”

물론 정서로서는 경호의 얘기를 공감하기 쉽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고 프로 의식이 있었다면 적어도 얼굴을 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은 없었다.

정서는 이미 경호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상태였으니까.

결혼 소식을 어떻게 들었을까.

물론 하 회장이 주위 사람에게 견이 결혼 예정이라는 사실 정도는 흘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자연스럽게 소영의 귀에 들어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회사에 도착해 견이 농담처럼 그 사실을 말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결혼에 대해 입도 벙긋한 적 없다.

그렇다는 건 두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고 전했다는 뜻인데.

하 회장이 장소영에게 직접 연락을 한다거나, 연락을 지시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수를 쓸 생각조차 안 했을 사람이니까. 

장소영은 하 회장이 손을 쓰기엔 너무 위험하고 내키지 않을 선택지였다.

결국 전지훈과 내통하면서도 장소영에게 연락할 만한 깡을 가진 사람이, 두 사람의 결혼 소식까지 알았다는 건데.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안 그래?”

경호는 정서의 어깨를 거세게 쥐었다.

묵직하고 불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곧장 경호를 밀어내려 손을 들었다.

“손 치우시죠, 신경호 대표님.”

“다 너희, 아니 그쪽 때문이야. 윤정서. 그 후에 그쪽한테 악의적인 기사가 나간 것도 그 여자의 타깃이 그쪽이었다는 뜻밖엔 안 돼.”

그렇더라도 경호의 분노는 정당하지 않았다.

목이라도 조이듯 점점 더 저를 내리누르며 압박하는 경호의 손길에 사나운 눈빛이 된 정서가 경호를 밀어내려 발버둥 쳤다.

여차하면 발로 정강이라도 걷어차려 했는데, 뒤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왜 윤정서 잘못이지?”

망했다.

정서가 뒤를 돌아보자 서슬 퍼런 낯빛을 하고 있는 은호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가라니까, 기어코 왔구나.

말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은호는 곧장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얹어진 손을 떼어냈다.

손길이 단호하고 강했다.

“넌 또 뭐야, 이 새끼야.”

“나는 너 같은 새끼를 경멸해. 이유가 뭔 줄 알아?”

“뭐?”

반동에 휘청거리는 정서를 한 손으로 잡아 준 은호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저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가깝게 선 경호를 보며 은호가 고개를 슬쩍 비틀었다.

“하견은 무서웠나 보지? 하긴, 여자가 아니면 상대하기도 어려웠겠다. 근데 여자라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나?”

“이 새끼가 자꾸 뭐라는 거야.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경호가 주먹을 휘둘렀다.

몸을 틀어 피한 은호가 정서에게 뒤로 물러나라는 듯 눈짓했다.

“차은호, 하지 마.”

“이 새끼가 먼저 휘둘렀는데, 주먹은? 아. 알았어요. 일단 맞아야겠다. 그래야 정당방위죠?”

“뭐?”

“다시 쳐 봐, 이번엔 맞아 줄게.”

“이 새끼 완전 또라이네.”

경호가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에 은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그 주먹을 맞았다.

순간, 입가가 찢어지며 피가 작게 튀었다.

“차은호!”

정서가 은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은호는 이미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 경호에게 달려든 후였다.

주먹이 경호의 뺨에 내다 꽂혔다.

한 대, 두 대. 

연이어 맞은 경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생각해 보니까 얼굴에 상처 낸 것도 너지?”

“나면 어쩌게. 어? 나면 어쩌려고, X새끼가!”

경호는 몸을 일으켜 다시 한번 은호에게 달려들었다.

무의미한 시도였다.

은호는 경호의 옆구리를 쳐 쓰러뜨리고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정서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경호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그 눈빛이, 길들여지지 않은 위험한 본능이 도사리고 있는 그 형형한 눈동자가.

그가 움찔할 틈도 없이 은호가 고개를 숙여 그와 눈을 맞췄다.

“죽이려고.”

“차은호, 그만해.”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그들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정서는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곤 은호에게 다가갔다.

은호는 저의 어깨를 쥐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작고 하얀 손이 허옇게 질린 것이 보였다.

“⋯⋯알았으니까 뒤로 물러요.”

“이럴 필요 없어. 이럴 시간도 없고. 찾아야 할 사람이⋯⋯.”

정서는 순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불현듯 머리가 번뜩인 탓이었다.

내내 불편하던 퍼즐이 그제야 맞춰졌다.

법인카드로 결제됐던 호텔 예약 그리고 소영에게 전달됐다던 견과 정서의 결혼 소식.

그것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회사 내부의 사람. 

그중에서도 그날 비서실에서 같이 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두 가지 모두 할 수 있었다.

가장 의심이 가는 사람이 단숨에 떠올랐지만, 증거가 부족했다.

비서실에 있는 사람은 박 실장을 빼고 전부 여자니까.

“나 가야겠어.”

“어딜요. 갑자기?”

“응. 확인해야 할 게 생겼어. 차은호, 가자.”

가자?

지금 정서가 먼저 저에게 가자고 한 건가.

은호는 그 말을 듣자 바로 몸을 일으켰다.

경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곧장 몸을 일으킨 은호가 정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뭔데요. 무슨 일인데.”

“너 괜찮아?”

“예?”

“피 닦아, 이걸로.”

정서가 외투 주머니에 든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은호는 그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밋밋한 디자인의 꼭 정서와 닮은 손수건을.

&

“오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비서진이 인사를 건넸다.

당분간 회사에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견은 예상을 깨고 곧장 회사로 출근했다.

입구에서부터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 때문에 실랑이가 조금 있었으나, 다행히 본부장실에 도착한 견은 들어오자마자 박 실장을 방으로 불렀다.

다른 비서진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다.

“본부장님, 우선 회사 내부에도 공지 띄웠습니다. 금방 소문은 잠재워질 테니⋯⋯.”

“뭐 보고 뽑았습니까?”

“네?”

“이수연, 뭐 보고 뽑았냐고요.”

“⋯⋯.”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듯 박 실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 박 실장을 넌지시 보던 견이 이내 문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에 앉아있을 수연은 그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터였다.

‘하 회장이랑 무슨 사이냐고 묻는 거야, 나는 지금.’

견이 그렇게 물었을 때 수연은 잠시 침묵하더니 곧 옅게 웃고선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어쩐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오네요?’

‘무슨 기회.’

‘본부장님이 저에게 사적인 걸 물어 주신 적, 처음이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대답을 하지. 알고 있지 않나? 나는 인내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죠. 그래서 더 매력적이시기도 하고요. 하 회장님과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가 가끔 하 회장님 얘기를 하시긴 했지만, 저와는 무관합니다.’

‘네 아버지가 왜.’

‘제 이력서 안 보셨나 봐요, 본부장님. 본부장님께서 최종 권한이 있으시다고 들어서 이력서 정도는 읽어 보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나한텐 누구든 똑같아.’

실제로 그랬다.

견에게는 정서가 아닌 다른 이는 누구든 관심 밖이었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비서 자리에 누가 들어오든 상관없었다는 뜻이었다.

‘이젠 아니실 텐데⋯⋯. 그냥 작은 건설 회사 대표님이세요. 이번에 백영이 인수를 고민 중이라고 했습니다.’

‘뻔한 목적이 있었네.’

‘애석하게도 아닙니다. 어차피 제 것이 될 리 없는 회사 따위 관심 없는 사람이거든요. 하 회장님과는 아직 뵌 적 없습니다.’

‘뵌 적이 없다.’

견은 그 말을 되새겼다.

수연의 말에 담긴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만나지만 않았을 뿐, 내통하긴 했다는 건지. 어쨌다는 건지.

전에도 소영에게 제 스케줄 정보가 샜으니, 처음엔 단순히 이번에도 누군가를 구했거니 싶었다.

‘그날 윤정서가 곤란해질 것을 알았어, 이수연 씨는.’

‘네?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건지⋯⋯.’

‘웃고 있었잖아.’

‘제가요?’

수연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굳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견은 똑똑히 보았다.

저를 방 밖으로 끌어내는 수연의 눈에 스며들어있던 환희를.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견은 그날 확신했다.

수연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오해십니다.’

‘너무 빨리 왔잖아. 마치 그 방에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처럼.’

‘엘리베이터를 바로 탈 수 있었고, 한 번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소소하고 소중한 우연이 겹쳤던 겁니다. 덕분에 본부장님을 지킬 수 있었고요.’

수연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순순히 실토할 거라 생각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든, 그만두세요. 그게 서로에게 이로울 것 같으니까.’

‘본부장님.’

‘더 들을 말이 없는데, 나는. 이만 가 봐요.’

견은 수연에게 틈을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차에 오르려는 견을 향해 수연이 말했다.

‘본부장님께서 모르시는 것 같아 감히 말씀드리는데 윤 변호사님이 곤란해지신 건 저 때문이 아닙니다.’

‘⋯⋯.’

견이 수연을 돌아보았다.

수연은 꼭 정서를 짚어야만 저를 보는 그의 모습에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사실은 아시죠.’

‘⋯⋯.’

‘본부장님 때문에 변호사님이 곤란해지셨다는 거. 그러니까, 저를 추궁하셔도 소용없으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수연은 짧은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 가기 시작했다.

수연에게 이 모든 것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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