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무슨 꿈을 꾸었을까.
창문을 무겁게 두드리는 빗소리에 정서가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제 어깨에 둘린 이불과 식탁에 엎드린 채로 잠든 은호였다.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밀어 올리며 습관처럼 핸드폰을 찾았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아, 꺼뒀지⋯⋯.”
차츰 정신이 또렷해졌다.
정서는 조금 흘러내린 이불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 키 큰 애가 몸을 반쯤 접고 자는 모습을 보니 퍽 불편해 보였다.
밥은 먹었나.
죽을 주문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은호의 어깨에 이불을 둘러 주곤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침실에 벗어둔 외투를 찾아 주머니를 더듬자 핸드폰이 손에 잡혔다.
침대에 걸터앉은 정서는 전원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하 회장은 윤희창과 무엇을 두고 거래했을까.
희창이 요구한 것이 돈이라면 그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순히 내어 줬을 리가 없다.
아마도 정서의 약점을 잡았을 텐데, 설마.
설마 희창은 그 얘기를 했을까?
그날 비 오는 다리에서 정서가 자신을 밀었다는 걸,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온 저를 두고 뻔뻔스럽게 모르는 척을 했다고 말했을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진술일 뿐이다.
‘정서’가 그랬다는 증거가 없었다.
그 시골 마을에 CCTV가 있었을 리도 없었고 다리의 난간이 튼튼하지 않았다는 진술 역시 이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사고와 해프닝으로 마무리된 사건을 새삼스레 꺼낼 것도 없는데.
그럼 다른 일인가?
희창을 만나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됐다.
희창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지도 그만큼 오래됐다.
그래서 희창이 무슨 생각을 할지, 무슨 일을 해오며 지냈는지 알지 못했다.
이제 견은 손발이 묶였다.
꼼짝없이 당분간 하 회장 말을 따라야 했다.
그리고 그건 순전히 ‘정서’ 때문이었다.
정서는 견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끝까지 이겨서 그 끝에 있는 것을 쟁취하기를 바랐다.
그게 명예든, 부든, 권력이든, 복수든.
견은 가져 마땅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누구를 만나야 할지는 확실해졌다.
정서는 내려둔 외투를 걸쳤다.
그때였다.
“⋯⋯아.”
찾을 이도 없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시선을 내리자 알람이 울리는 것이 보였다.
새벽 네 시의 알람이었다.
혹시 잠들었다면 이 시간에 깨어서 간밤에 문제가 없었는지 확인하라는 목적으로 세팅된 알람이었다.
견이 사고를 일으키는 시간이 주로 새벽이었으니 설정해둔 것이기도 했다.
곧장 알람을 껐으나, 그 소리를 들었는지 거실에서 기척이 들렸다.
정서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저를 보는 은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루의 시작이 지나치게 빠르시네요.”
“더 자도 돼. 불편하니까 그냥 침대에 누워서 자.”
“어디 가려고요.”
“어?”
“어디 갈 생각이잖아요, 지금.”
은호의 시선이 정서가 걸치고 있는 외투로 향했다.
정서는 잠시 침묵했다.
희창에 대해 은호는 모른다.
어쩌면 희창을 찾는 일을 은호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은호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원하는 정보를 큰 어려움 없이 구하는 것을 보아 자신만의 루트가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럼에도 쉽게 도와달란 얘기가 나오지 않는 것은 희창의 얘기를 누구에게도 먼저 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은호를 완전히 신뢰하진 않아서일까.
“같이 가요. 그 전에 밥부터 먹고. 밥 먹고 잔다더니 그냥 잤잖아요.”
“이따가, 다음에. 너 먹고 나와. 더 자고 나와도 돼.”
“주인 없는 집에서요? 나 강아지 아닌데.”
“내가 네 주인인 적도 없잖아. 따지자면 손님인 거지.”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전 손님보다는 특별하고 싶어서요. 어차피 대접받으려고 따라온 것도 아니에요. 밥 먹을 시간도 없는 거면 그냥 가요. 일 보는 동안 사 올게.”
“차은호.”
“네?”
“나 이제 너한테 줄 수 있는 게 없어.”
정서는 단호히 말했다.
은호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당황한 듯 잠시간 말이 없다가 피식 웃으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줄 수 있는 게 없다라⋯⋯.”
찰나였지만, 눈매가 조금 날카로워진 것 같기도 했다.
일순 낯선 얼굴이 되었던 그가 다시 원래의 장난스러운 얼굴로 돌아와 그녀를 보았다.
“이미 줬어요.”
“어?”
“이미 조금은 줬다고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안 해도 돼요. 그럼 준비해서 나와요. 어딜 가려는 거든, 가긴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데려다줄게. 그 정도면 됐죠? 그리고 당분간은 같이 지내는 게 좋겠어요.”
“차은호, 내가 지금 너한테 하려는 말은⋯⋯.”
“내가 몰라서 이러는 거로 보여요?”
분명 웃으면서 묻고 있었지만, 목소리 역시 쾌활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뚜렷하게 느껴지는 위압감이 있었다.
정서는 저도 모르게 조금 뒤로 몸을 물렀다.
그것을 본 은호가 짧은 한숨을 내뱉고는 잠시 천장을 올려봤다가 제 입꼬리를 문질렀다.
“미안해요.”
“⋯⋯.”
“나와요. 지하철역이라도 데려다줄 테니까.”
정서가 대답할 새도 없이 은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현관에서 신을 꿰고 나가는 동안 가만히 서 있던 정서가 뒤늦게 은호의 말을 복기했다.
이미 줬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껏 정서는 은호에게 받기만 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줬다는 그게 뭘까.
그걸 알아내기 전까지 정서는 은호를 안전하게 대할 수 없었다.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엔 알람이 아니었다.
&
“거길 가겠다고요?”
“응.”
“지금 만나서 뭘 어쩌게요?”
“뭘 어쩌려는 게 아니야. 불렀으니 만나려는 거야.”
“싸울 무기는 있어요? 아무것도 갖추지 않고 싸울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야.”
“가끔 보면 속을 진짜 모르겠어요.”
은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차를 멈추지는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연락을 하는 것을 보면 할 말이 있는 모양이지.
정서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만나서 묻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슴푸레한 주변의 풍경을 보며 정서는 메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었다.
“같이 가죠.”
“아니, 괜찮아.”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차은호. 다시 연락할게.”
정서는 그렇게 말하곤 차 문을 열었다.
은호가 말리려는 듯 따라 벨트를 풀었으나, 그녀는 그를 똑바로 보며 더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를 줬다.
은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굳은 낯이 되어 전화를 받는 은호를 뒤로한 채 정서는 한강 공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편한 차림을 한 채로 달리거나 걷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벤치로 다가가자 미리 와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그때처럼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다.
“전화 주셨죠. 윤정서입니다.”
“⋯⋯.”
물끄러미 정서를 올려보는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정서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았다.
찬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장소영 씨는 잘 지내시나요? 기사는 잘 봤습니다. 덕분에 제가 아주 난처해졌죠.”
“그 기사는 내가 낸 게 아니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소영 씨에게 나쁜 기사는 아니었으니 소속사 대표로서 만족스럽지 않으셨을까요. 아, 본부장님 댁까지 찾아와 주셨던 선물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벌인 일이 아니니까 그런 건 협박도 안 돼.”
“알고 있어요. 용건으로 넘어갈까요. 이렇게 오래 같이 마주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경호가 고개를 돌려 정서를 보았다.
그리고 갈라지고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영이가 이렇게 정신이 나가게 만든 여자를 찾아야겠어.”
경호의 말은 정서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소영이 정신이 나가게 만든 여자가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설령 그게 있다고 하더라도 흐름에 따르면 그것은 자신이 돼야 마땅했다.
소영은 견을 좋아했고, 가지고 싶어 했으니 끼어든 저를 망가뜨리고 싶었을 테고.
그 과정에서 미쳐도 단단히 미쳐 말도 안 되는 자작극을 꾸몄다.
“그게 무슨 말인지 대체 모르겠는데요.”
“소영이가 사라졌어.”
“예?”
“무슨 협박을 받은 것 같은데 불안해하는 것 같더니 지난 밤부터 연락이 되질 않아. 언뜻 들은 바로는 상대 목소리가 여자인 것 같았는데, 번호를 조회했더니 대포폰이라고 하더라. 보통 사람은 아닌 거지. 그 여자 전지훈과 한패일 거야.”
“전지훈 기자랑요? 전지훈 기자는 장소영 씨랑 짜고 일을 벌인 게⋯⋯.”
“아니, 아니야.”
경호는 답답하다는 듯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서의 앞에 섰다.
정서는 고개를 들어 경호를 보았다.
눈에 초점이 흐릿한 것이 꼭 무슨 일을 당장이라도 저지를 사람처럼 보였다.
이미 한 차례 위험한 짓을 했으니, 또 그런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힐긋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라도 위험에 처했을 때 도울 사람이 있는지 찾는 동안 경호가 말을 이었다.
“소영이가 갔을 땐 이미 전지훈이 쓰러져 있었어. 전지훈이 지 스스로 약을 넣었든, 어쨌든. 그런데, 그래놓고 이제 와서. 전지훈이랑 짜고 소영이를 협박해? 지가 이 일에 끼어들었으면서. 결혼 소식을 전해 사람 미치게 해놓고선 이런다고?”
“잠깐만요. 결혼 소식이요?”
정서가 되물었다.
동시에 경호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이게 다 너희 때문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