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85)

46.

“……웬 차야.”

정서는 제 앞에 놓인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은 차체는 다소 무거워 보였으나, 선이 날렵하게 생긴 것이 빠른 느낌을 주어 차 앞에 선 은호와 닮아 있었다.

“춥잖아요.”

은호는 짧게 대답한 뒤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아까 울렸던 클랙슨 소리는 그럼 이 차의 클랙슨 소리였구나.

그녀를 재촉하던 소리, 이제 그만 나올 때가 되었다고 알려주던 소리를 은호가 아무것도 모르고 냈을 리는 없다.

“고마워.”

“별말씀을.”

정서는 천천히 차에 올랐다.

그녀가 타는 것을 확인한 뒤 운전석에 오른 은호가 대뜸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받아 보니 핫팩이었다.

“……아직 핫팩 챙길 만큼은 안 추운데.”

“알아요. 아는데, 마음이 추운 날은 이렇게 따뜻한 거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더라고요.”

“…….”

은호의 시선이 흘깃 정서가 덮고 있는 외투로 향했다.

고급 캐시미어로 만든 크림색 숏코트는 언뜻 보아도 정서의 몸에 비해 너무 크고 헐렁했다.

옷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내 줬나? 

누구를 만나는 것인지 알았다면 결코 보내지 않았을 텐데.

정서를 살피는 눈빛이 빠르면서도 정확했다.

울지 않았지만 운 얼굴처럼 지긋하고 피곤하고 처연하다.

하 회장처럼 지긋지긋한 인간의 아들을 왜 만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왜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이런 얼굴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호는 풀이 죽은 정서가 신경이 쓰였다.

곧장 차를 출발시켜 빠르게 견의 집에서 멀어지며 뒤늦게 정서는 제가 지갑도 챙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새 너무 자주 지갑을 두고 다닌다.

다행히 챙긴 핸드폰만 덜렁 그녀의 손에 남아있었다.

“꺼요.”

“응?”

“지금 당장 하 회장 찾아가서 싸울 거 아니면 좀 꺼둬요. 필요 없는 연락 올 것 같은데.”

은호는 그렇게 말하며 힐긋 정서와 눈을 맞췄다.

정서는 잠시 은호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수긍하듯 핸드폰을 껐다.

혹시나 마음이 약해져서 견을 찾게 될까 봐 걱정됐다.

해결하기 위해 떠나왔으나, 사실 막막하다는 것 또한.

“어디로 갈까요.”

“……글쎄.”

갈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서는 살고 있던 집이 있었다.

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비록 누가 찾아오긴 했지만, 다시 찾아오리란 보장도 없었고.

사실 그게 누군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를 마주한 것은 견이었다. 

견에게 누구인지 제대로 물었어야 했는데.

대체 누가 나를 그렇게 위협했는지, 제대로 알았어야 했는데.

견은 정서에게 도와달라 청하라고, 언제든 그러라고 했었지만 사실 그러면 안 됐다.

누군가의 도움을 얻어 갈 수 있는 길은 늘 한계가 있었다.

결국에 문제를 직면하는 것도 그것을 헤쳐나가는 것도 본인의 몫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해결한 것이라 믿었던 문제가 마치 귀신의 집의 철 지난 귀신처럼 나타나 발목을 붙잡을 테니까.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바닥을 기는 생활은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우리 집 갈래요?”

“……응?”

신호를 받아 차가 멈춰 서자 은호가 시선을 돌려 다시 정서를 보았다.

그녀는 잠겨 있던 생각에서 깨어나며 그를 마주했다.

물론 아직 그가 던진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한 표정이었다.

아직도 견을 생각하는 걸까.

뭐가 그렇게 애틋할까, 이 여자는.

당장 자신을 협박한 남자의 아들이 뭐가 좋다고.

은호의 눈엔 하 회장이나 하견이나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견은 더 나빴다.

정서를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면서, 정서의 뒤에 숨어서 이렇게 도움이나 받는 사람이라면 없는 편이 나았다.

“우리 집이요.”

“아…….”

“짐이 하나도 없잖아요. 당장 필요한 것만 사서 들어가요. 당분간 지내도 돼요. 혼자 지내곤 있는데 침실은 따로 있고. 불편할 것 같으면 침구도 바꿔 줄게요.”

“아니, 괜찮아. 내 집으로 갈게.”

“집 나온 이유 있는 거 아니에요? 그 사람 집으로 들어간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

정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은호는 눈치가 좋은 편이었고, 따지자면 지금은 순순한 호의로 저를 도와주고 있었다.

아까 전지훈이 한 말이 무엇인지 물어볼 법한데도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곧장 데리러 온 것만 봐도 그랬다.

“이유를 묻는 게 아니에요. 말하기 싫은 걸 억지로 말하게 하는 사람들을 나는 제일 싫어하니까. 어떤 아픔이나 고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역이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찾아왔어.”

“누구요.”

“초록불.”

“네?”

“초록불. 신호 바뀌었다고.”

“아.”

은호는 정서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시선을 앞으로 돌리곤 액셀에 발을 올렸다.

매끄럽게 도로를 가르고 나아가는 차의 움직임을 느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짐작가는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해.”

“위험한 사람이에요?”

“…….”

정서는 잠시 침묵했다.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린 지가 너무 오래됐다.

은호가 말했던 것처럼 어떤 것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어쩌면.”

“그런데 집에 가겠다고요?”

“가야지. 가서 이제 어떻게 할지 정리도 해야 하고 내일부터는…….”

“그럼 같이 있어요.”

아득하게 느껴지는 미래의 일들을 정리할 막막함을 느낄 새도 없이 은호가 파고들었다.

정서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제 어깨를 감싼 외투 옷깃을 잠시 쥐었다가 놓았다.

“같이 있자는 말을 되게 쉽게 하네.”

“어렵게 해요, 그럼? 위험한 사람이라면서요. 그럼 누구라도 있는 게 낫죠. 저 싸움 잘해요.”

“…….”

“안 믿겨요?”

“아니, 그게 아니라. 만약 정말 그 사람이 날 찾아온 거면 내가 나가야 해.”

“위험한 줄 알면서도요?”

“응. 그 위험한 사람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 나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어느덧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검고 깊게 일렁이는, 속을 알 수 없는 강물을 바라보며 정서가 중얼거렸다.

“강을 보면 비가 생각나.”

“비요?”

갑작스럽게 바뀐 대화 주제였으나, 은호는 어쩐지 다시 묻지 않았다.

정서는 손바닥을 따뜻하게 데우는 핫팩을 쥔 채로 시트 깊숙이 몸을 묻었다.

누구의 품속도 아니었지만, 옷깃에서 나는 체향이 그녀를 은은히 덮고 있었다.

“비 오는 날 다리를 건넌 적이 있거든.”

“무서웠어요?”

“응. 무서웠어.”

“지금도 무서워요?”

기어에 올라가 있던 손이 덥석 정서의 손등을 덮었다.

그녀가 슬쩍 시선을 들어 은호를 보자 전방을 주시하는 꼿꼿한 눈빛이 들어왔다.

“조금은.”

“나 지금 안전 운전 중.”

눈을 부릅뜬 은호의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

“집이 좀 더러운데…….”

“상관없어요.”

“뭐 먹을래? 먹을 게 없으니까 시켜 줄게.”

“그럴까. 뭐 먹을래요? 아무것도 안 먹었죠.”

“응, 좋아.”

은호는 꾸역꾸역 정서를 따라 집까지 올랐다.

혹시 모르니 제가 앞장서겠다며 나서는 몸짓에 집을 아느냐고 정서가 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도 했다.

뒤늦게 은호가 사과했고 정서는 이제 와 무슨 소용이냐 대꾸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래도 비밀번호는 안 볼게요.”

“그거 보면 도둑이지. 도둑질할 것도 없지만.”

“먼저 들어가지 마요. 제가 들어갈게요.”

은호가 텅 빈 집안을 바쁘게 둘러보았다.

짐이 거의 없이 휑뎅그렁하게 비어있는 집의 모습이 꼭 견의 집과 닮았다.

미묘하게 나빠진 기분을 애써 지운다.

짐을 많이 두지 않는 것은 그냥 깔끔한 성정일까.

아니면 불안에 기인한 것일까, 사실 그런 걸 묻고 싶었다.

“뭘 그렇게 봐.”

“혹시 누가 있을까 봐.”

“없어. 오랜만에 와서 먼지 투성일 거야. 그럼 음식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정리 좀 할게. 앉아 있…… 을 만한 곳이 없네.”

“여기 있잖아요.”

은호가 접이식 식탁에 딸린 작은 의자를 가리켰다.

다리가 낮아서 은호의 큰 키에 비해 불편할 것 같은데.

소파도 뭣도 없는 집에서 달리 권할 곳이 없다.

“그래, 그럼 거기 앉아. 뭐 먹을래?”

“난 다 좋은데. 근데 나 궁금한 거 있어요. 마지막 식사가 언제예요?”

“어, 그러니까…….”

언제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잠시 머뭇거리는 정서를 대신해 은호가 메뉴를 골랐다.

“그럼 죽 먹어요.”

“너 그걸로 되겠어?”

“나 죽 좋아해요. 어렸을 때 자주 아팠는데 운이 좋으면 아버지가 죽을 끓여 줬어요. 평소엔 그냥 김밥이나 주먹밥 같은 걸로 때웠거든요. 근데 죽엔 참기름도 들어가고 계란도 들어가고. 무엇보다 죽을 끓일 땐 계속 저어 줘야 하니까 이십 분 남짓한 시간을 집에 가만히 서 있었거든요.”

“……비싼 거 시켜 줄게.”

“응?”

“제일 비싼 거.”

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결연한 표정으로 죽을 주문하는 정서를 가만히 바라보던 은호가 피식 웃었다.

주문을 마치고 청소기를 돌리려는 정서를 욕실로 밀어 넣은 것은 은호였다.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고. 일단 씻어요. 씻어야 언제든 잘 수 있잖아. 지금 엄청 피곤해 보여요. 싸우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하지. 내일부터 해요, 내일부터. 자고 일어나서부터.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씻고 밥 먹고 자요.”

“그래도 청소는 내가…….”

“됐으니까 얼른요. 꼭 따뜻한 물로 해요.”

나긋한 음성과 함께 문이 덜컥 닫혔다.

정서는 허망한 표정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밖에서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까 집에 누굴 부른 게 처음이었다.

“내일부터…….”

은호가 던졌던 말을 곱씹던 정서는 그의 말처럼 따뜻한 물로 씻고 나왔다.

깨끗이 정리된 집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죽이 배달되기를 기다리며 식탁에 마주 앉아있던 그녀의 고개가 꾸벅꾸벅 앞으로 쏟아졌다.

“……이렇게 무방비해도 돼요?”

은호는 조용히 정서에게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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