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85)

45.

침묵이 흘렀다.

고의로 사람을 상처 주는 일은 너무 쉽다.

이래서는 안 됐다.

상처를 내면서 상처를 받아야 하는데.

정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내는 상처가 더 큰 것 같았다.

제 손이 다 베인 줄도 모르고.

“그래?”

“…….”

“그래, 확실히 두렵긴 했어.”

“…….”

견은 그녀에게서 드디어 몸을 떼어냈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힘을 주고 있다는 것을 그도 그녀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빽빽하고 육중했다.

“지금도 난 두려워, 윤정서가.”

“……비꼬지 마.”

“지금 내가 그러는 걸로 보여?”

날 선 물음이 비수처럼 차갑게 가슴에 와 꽂혔다.

처음으로 제법 큰 목소리가 났다.

정서도 따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침대에서 내려오는 정서를 눈으로 좇던 견이 그녀가 휘청이자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정서 역시 무심코 그 손을 쥐려다 멈칫했다.

그때였다.

삭이고 있던 감정이 폭발한 것은.

고작 내민 손 하나도 안 잡아주는 정서가 견은 이해되지 않았다.

“윤정서, 너 지금 되게 웃긴 거 알아?”

“…….”

“내가 싫다며. 내가 걱정하는 게 네가 아니라, 너로 인해 무너질 나 같다며. 그러면서 내 침대엔 왜 있어?”

“…….”

“본능적으로 편한 곳을 찾은 거야. 너는 내가 그리웠고, 나와 떨어져 있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내 생각을 한 거라고.”

“그만해.”

“더 나가 봐? 너는 지난 십 년간 나를 못 잊었어. 내가 너를 계속 기억한 것처럼 너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어. 네가 대체 나에 대해 뭘 알아? 네 약점, 네 악행. 그걸 기억하는 건 나뿐인데. 네게 유일한 사람이 나인데. 네가 그런 날 어떻게 잊어?”

견의 말이 시리고도 뜨거웠다.

너무 차갑거나 뜨거우면 오히려 온도를 알 수가 없어진다.

정서는 지금 그랬다.

견이 정서를 향해 퍼붓듯 쏟아내는 말들이 그녀를 향한 원망인지 고백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이라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느 마음도 정서는 받아 줄 수 없었다.

견을 마주한 순간 알아차린 탓이다.

그가 하 회장에게 잡힌 그녀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 순간 그녀 때문에 물러섰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옆에 남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가진 게 없는 것은 견이 아니라 정서였다.

정서는 지금 견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는데.

견의 옆에서 견을 챙기고 돌보며 그 감정을 즐겨왔던 것을 정서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하견은 사랑에 목매는 여자를 싫어해, 자기 엄마가 생각나니까.

그걸 알고 있어서 더 부정했던 건지도 모른다.

윤정서는 견을 그리워한 적이 없다고, 윤정서가 견의 옆에 머문 것도 견의 뒤를 봐 준 것도 전부 견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하 회장이 두려워서라고.

그 알량한 마음을 전부 들키기 전에, 그래서 다른 여자들처럼 견에게 시시해지기 전에.

도망가려는 것도 전부 정서의 이기심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러면 어때.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그거뿐인데.

“그러니까. 난 지금 이 상황이 하나도 이해 안 되고, 납득도 안 되니까. 설득할 생각도 말고 그냥 가서 자. 아니다. 그냥 여기 있어. 여기서 나랑 있어.”

“……갈 거야, 나는.”

“어디를.”

“가서 빌 거야.”

“어디를 가서 빈다는 건데. 누구한테 빈다는 건데. 너 지금 나한테 잘못하고 있어. 용서를 구하고 싶으면 나한테 빌어야지, 정서야.”

견은 고개를 숙이며 정서의 눈을 찾아 맞췄다.

내내 피하고 있던 시선을 어렵사리 마주한 정서가 손을 들어 견의 턱을 쥐었다.

그리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눈, 코, 입.

이제는 눈을 감고도 확실하게 그릴 수 있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듯 움직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주시하던 견이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자꾸 애틋해지지 마, 안 볼 사람처럼.”

“시시해지지 마, 하견.”

“…….”

“시시한 거 질색이야. 알잖아.”

“…….”

“이대로 우리가 결혼하면 난 초라해질 거야. 초라한 채로 너와 결혼해서, 초라한 채로 너와 살겠지.”

“내가 널 그렇게 둘 것 같아?”

“안 둔다고 해도 내 기분이 그래. 내가 이룬 게 아니면, 평생 같을 거야.”

“그래서 뭘 하려는 건데. 네 계획이 뭔데. 나를 떠나서, 대체 뭘 하려는 건데.”

목소리 끝이 작게 떨리며 뭉개졌다.

정서는 견과 대화하며 어떤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잠깐의 다툼은 괜찮았다. 

몇 번을 싸우고 다퉈도 질리지 않고 지치지 않을 자신이 그에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실패는 참 무서운 것 같아, 견아.”

견아.

언젠가 견이 정서에게 어떻게 죽은 새를 손에 쥘 수 있었냐고 물었을 때처럼, 꼭 그때처럼 애틋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견을 가만히 마주 본 정서가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잠깐 그의 입술을 물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물리며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달큰한 숨이 샜다.

거칠한 입술의 감촉과 씁쓸한 혀끝의 맛은 애써 모른 체하며 정서가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그때 실패했기 때문에 지금 너와 나 모두 힘든 거야.”

“……윤정서.”

“가끔 생각했어. 어떻게 하면 그 지긋지긋한 그늘을 벗을 수 있을지,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

“네가 말했었지. 할 수 있는 것도 부탁해 보라고. 못 한다, 안 하고 싶다 투정 부리고 아파 죽겠다고 엄살도 부려 보라고. 그런 사람은 사랑스러워. 그렇게 자란 애들 많이 봐왔어. 볼 때마다 부러웠어. 부럽고 미웠어. 그런 내가 우스웠어. 창피했어.”

“…….”

“너는 좋은 사람이야, 하견.”

그러지 마. 부서질 것처럼, 사라질 것처럼.

그렇게 굴지 좀 마. 네가 그러면 나는 미칠 것 같아.

견은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정서의 손을 겹쳐 쥐었다.

그녀의 작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부볐다.

불쌍하게 보여서라도, 가엾게 보여서라도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이번에 정서를 놓치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나한테 마음껏 굴어 보라고 말한 첫 번째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니까. 옆에서 좀 기대 보면 안 돼? 내가 그 정도 믿음도 못 줬어, 너한테?”

“이번엔 아무한테도 안 들킬게.”

“…….”

“너도 모르게 할게.”

빵.

밖에서 요란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왔구나, 끝내.

정서의 시선이 창 너머를 향하는 것을 본 견이 다급히 정서를 잡았다.

다시 입술을 감쳐물고 혀를 들이밀었다.

뜨거운 입천장을 쓸고 입 구석을 훑는 동안 정서는 까치발을 든 채 그를 받아들였다.

묶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견은 정서의 숨을 빼앗듯 모조리 삼켰다.

“읍……!”

한참만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정서가 견을 밀어냈다.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제 손등으로 가린 그녀는 선언하듯 말했다.

“해결하고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

“혼자 하지 마. 뭐든 혼자 하려는 그 개같은 습관 좀 버리라고 몇 번을 말해, 윤정서.”

“어쩔 수 없어, 이게 나니까. 전지훈한테 회장님, 아니. 하 회장이 윤희창 얘기를 했어.”

“…….”

“하 회장한테 더 휘둘리지 않아. 누구에게도. 그러니까 내가 해결하고 올 때까지 넌 네 것을 찾아.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내가 없어도, 잘해야 해.”

정서는 그렇게 말한 뒤 견에게서 떨어졌다.

견이 그런 그녀를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붙잡지 못했다.

밖에서 다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더 지체하면 아마 문을 두드리겠지.

안 봐도 뻔했다.

정서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견을 뒤로 한 채 애써 등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달려가 신을 신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위로 툭 무언가가 덮였다.

“추워.”

“…….”

“입고 가.”

견의 외투였다.

정서는 제 몸에 너무 크고 무거운 외투의 앞섶을 꼭 모아 쥔 채 집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견의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