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85)

44.

정서는 몸을 일으켜 나가 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견에게 알리고 제 존재가 견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확신하게 됐다고 말해야 했다.

하 회장의 목적이 견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견의 옆에 있는 그녀는 그를 막는 장애물이 될 것이 자명했으니까.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 싫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발신인은 차은호였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두운 집에 그의 방만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으니, 견은 정서가 어디에 있는지 훤히 알 것이다.

알면서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여보세요.”

정서는 전화를 받았다.

어두운 집을 혼자 걸어들어올 견을 위해 불을 켜둘 걸 그랬다 생각하면서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모질어져야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

― 갈게요, 지금. 아직 거기 있어요?

“…….”

조금 열려 있던 문틈 사이로 그림자가 졌다.

문 앞에 선 견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정서를 보겠지.

나를 보고 웃을까, 너는?

정서는 돌연 그런 생각을 하며 숨을 들이켰다.

이상하게 숨을 죽이게 됐다.

― 여보세요? 괜찮아요? 그 자식이 헛소리 못 하게 입을 막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건방지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어쩐지 태도가 수상쩍더라니. 몇 번이고 빼앗고 싶었는데, 그래서 통화 못 하게 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당신 화날 것 같아서. 그래도 당신이 나에게 부탁한 일이니까 잘해내고 싶어서. 그래서 못 말렸어요. 미안해요.

스르륵.

문이 밀리고 열린 문틈 새로 견의 얼굴이 보였다.

정서는 견을 마주하지 않으려 시선을 허공에 박아 둔 채 핸드폰을 더 바짝 쥐었다.

“?”

그런 정서를 발견한 견은 조금 의아한 기색이 되었다.

아까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야.”

겨우 정서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시 돋친 듯 까끌거리는 입술을 뚫고 나온 목소리가 볼품없음이 서글펐다.

그 목소리를 들은 은호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 갈게요, 지금.

“…….”

― 전지훈이 말한 당신의 약점이 뭔지 나는 몰라요. 하 회장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한 건지도. 그 사이엔 누가 분명히 있어요. 하 회장과 전지훈을 연결해 준 사람, 또 전지훈과 장소영을 연결해 준 사람. 그게 누군지 알아내야 해요. 하지만 그 전에…….

견이 정서의 옆에 앉았다.

견의 무게가 느껴졌다.

정서는 제게 꽂히는 시선을, 저를 집요하게 쫓고 살피는 시선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몸을 조금 웅크리듯 숙이며 목소리를 짜냈다.

“그 전에, 뭐?”

― 위로부터 하고요.

“위로?”

― 필요할 것 같아서. 재능은 없는데 최선 다할게요.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요.

“…….”

견이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서 옅은 바람의 냄새가 쌉싸름하고도 청결한 비누 냄새가 났다.

좋아하는 향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은 향이기도 했다.

“…….”

견은 정서를 부르는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손바닥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그의 시선만큼이나.

위압감이 느껴지는 눈빛과 손길에 정서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고개를 떨구지 않으려 힘을 주었다.

“……그래, 와.”

한참만에 열린 입에서 허락이 나왔다.

견은 전화를 끊고 천천히 저를 돌아보는 정서와 눈을 맞췄다.

조금 충혈된 두 눈과 야윈 듯 더 날카로워진 턱선, 피로해 보이는 안색에 그녀는 조금 마음이 상했다.

내색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뭐야, 방금 그거?”

“…….”

“이상하네. 전지훈한테 오라고 한 건 아닐 테고.”

“…….”

“설마 차은호한테 오라는 건가? 전지훈한테 뭐라도 받아온 거야? 심부름시킨 거면 내가 나갈게. 밖에 춥고 어두운데 네가 나갈 필요 없잖아.”

달라진 분위기와 낯선 기운을 빠르게 감지한 견이 그렇게 말하며 조금 웃었다.

입꼬리가 평소처럼 예쁘게 치켜 올라갔으나, 눈매가 서늘했다.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하견.”

정서가 견을 불렀다.

견은 정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맞추면서도 손을 뻗어 정서의 허리를 찾아 안았다.

정서가 그런 그를 밀어내듯 고개를 돌렸으나 떨어지지 않았다.

거부하는 몸짓에 마음이 상할 법한데도 그랬다.

물러날 곳이 없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전지훈이 무슨 말을 한 것이 분명한데, 그것의 여파로 정서가 저를 외면하고 있는 것도 확실한데.

대체 무슨 말을 들어서 정서가 이러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견.”

다시 한번 정서가 견의 이름을 불렀다.

떨어지라는 뜻임을 알면서도 견은 더 깊숙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정서는 견을 더 밀어내지 않았다.

제 품을 파고드는 견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을 뿐이다.

“일은 잘 해결했어?”

“……응.”

“네 몫으로 빼둔 지분 다 처리했어?”

“응.”

“그럼 이제 너한텐 아무것도 없어?”

감정에도 문이나 둑이 있다면 방금 그것이 무너졌다.

견에게 그렇게 물으면서, 정서는 그것을 톡톡히 느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이를 악물면서.

가슴 부분을 누가 꽉 움켜쥔 채 놓아 주지 않는 것만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아무것도 없는 남자는 볼품 없지.”

견이 끝내 그렇게 묻도록 내버려 뒀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든 그가 정서를 보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네가 왜 다 잃었는지 생각했어.”

“…….”

“하견, 네 말처럼 나 네 아빠, 아니. 아빠 자격도 없는 사람 도우려고 너한테 접근했어. 처음부터 그랬어, 첫 만남부터. 십 년 전의 추억? 사실 기억도 못 했어. 했더라도 뭐가 달라졌겠어. 나한테 넌 그냥……. 그냥 잠깐 만났다가 사라졌던 그런 애일 뿐인데.”

견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아득하고 어두운 심연처럼 그의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고요히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 감정조차 정서는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원하는 걸 준댔어. 그게 큰 돈이든, 자유든. 믿었어. 사실 지금도 믿고 있어.”

“뭘.”

“…….”

“그 인간을 믿어, 너?”

“…….”

“그 인간이 네게 무언가를 줄 것이라 믿어?”

물음이 견고했다.

견도 정서도 하 회장을 믿지 않았다.

그는 믿음으로 사람을 굴종시키는 법이 없었다.

약점을 잡아 비틀고 눈에 거슬리면 치우는 사람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지 않냐는, 네가 지금 하는 말을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뜻이 담긴 물음에 정서는 잠시 침묵했다.

“……내게서 무언가를 가져갈 것이라는 건 믿어.”

“윤정서.”

“알잖아, 하견. 난 가진 게 없어.”

“아까까지만 해도 잘 싸우자고 했잖아. 잘 싸워 보라고 했잖아. 그새 미덥지 않아졌어?”

“…….”

“전지훈이 뭐라고 그랬든 없애면 그만이야. 그 나불거리는 혀를 뽑고, 그딴 것도 기사라고 지껄이는 손들을 자르면 그만이라고.”

“…….”

견의 눈이 번득였다.

정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상처가 된 듯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전지훈이 뭐라고 했어?”

“회장님이야.”

“뭐가.”

“전지훈의 뒤에 있던 게 하 회장님이라고.”

“…….”

그러니까 견의 예측이 맞았던 것이었다.

애초에 그들을 불러낸 것 자체가 덫이었고 둘은 그걸 알면서도 걸려들었다.

둘에게는 그 방법밖에 없었으므로.

“풀렸네, 실마리. 너랑 나 가지고 놀면서 재미 본 거네. 그럼 이제 됐잖아. 끝났잖아. 갚아 주면 되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쉬워? 그 조사실에 날 집어넣은 것도 끄집어낸 것도 전부 하 회장님이야. 정말 그것만 하실 수 있을까? 가진 것 없는 나를 그렇게 쥐고 흔드는 게 네 아버지라고.”

“윤정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따끔거렸다.

정서와 견은 아버지가 없는 편이 더 나은 삶을 살아왔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정서가 잘 알았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견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밀어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정말 둘 다 진창으로 빠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하지만 그게 감정의 끝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정서는 견을 조금은 원망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해 봐. 너 왜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어?”

“뭐?”

“회장님 댁에서 갑자기 회장님의 말을 수긍했잖아, 너. 쉽게 물러섰잖아.”

“아직도 그 얘기야? 지긋지긋해, 윤정서. 좀 넘어가. 어련히 이유가 있으니까……!”

“전지훈이랑 통화하니 알겠어. 네가 왜 그랬는지.”

우뚝.

항변하듯 움직이던 견의 몸짓이 멎었다.

정서는 그런 견을 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렸다.

“너는 나를 걱정한 거야.”

“…….”

“너는 나 때문에 네가 무너질까 두려운 거야, 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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