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 저예요, 차은호.
“응. 도착했어?”
― 네. 지금 병실 앞인데……. 다행히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좀 이상한 건 전지훈이 1인실을 쓰고 있다는 건데 기자 월급으로 1인실 쓸 수가 있어요? 좀 무리지 않나.
“수납을 누가 하느냐가 관건이겠네. 어쩌면 이미 전지훈이 돈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장소영이 전지훈을 도와주는 걸까?
그건 너무 병 주고 약 주고인데.
제가 약물을 주입해놓고 정작 1인실에 입원시켜 준다?
모순적이긴 했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 장소영일까요?
같은 생각을 한 듯 은호가 물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전지훈의 말을 들어야 좀 더 명확해질 것 같았다.
“일단 병실에 들어가서 전화 바꿔 줄 수 있어?”
― 네, 알겠어요. 다시 걸 테니 잠시만 기다려요.
은호에게 다시 전화가 오길 기다리며 정서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반박 기사가 나오고 나서도 여론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견이 자신을 폭행했다 주장하는 글이 커뮤니티에 올라와 SNS 상에 공유되기도 했다.
“어느 집 자식이야……. 계약서 꼼꼼히 안 살폈나?”
정서가 중얼거리며 뻐근한 눈두덩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지금껏 견이 저지른 일들을 수습하면서 단 한 번도 ‘비밀 유지 조항’을 누락시킨 적이 없었다.
이유가 있다고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건의 내막을 잘 살펴보면 대부분 상대측이 그에 상응하는 무례를 저지른 적이 많았다.
“소송당하기는 싫었구나.”
원문을 확인하려 링크를 클릭하자 삭제된 게시물이라는 알림이 떴다.
글을 올린 것을 확인한 담당 변호사가 글을 내릴 것을 종용한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못 올리게 단속을 똑바로 하지.
- 재벌들 무섭다더니 찐이네. 관상이 쎄하다 했어. 이래서 백영 애들 거르는 거임.
- 이때다 싶어서 우리 오빠들 물고 늘어지지 마시죠? 님 안티인 거 다 티나요;; 아니면 그쪽 오빠들이 못 탄 올해의 가수상 타서 억울하신 모양인가?
- 하다하다 이제 대표가 **를 터트리냐?
- 죄송한데 **라는 단어는 혐오 단어니 사용 지양 부탁드려요. 단어 쓰는 본새 보니 수준 알겠네요~ 그리고 대표 아니고 본부장이에요.
- 아빠가 백영 그룹 회장이라는데 본부장이라는 직함은 그냥 단 거겠지 ㅋ
아래에 달린 댓글을 확인하자 안 그래도 지끈거렸던 머리가 더욱 어지러운 것만 같았다.
반박 기사 하나로 달라질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론이 너무 장소영에게 호의적이었다.
평소에 장소영이 그렇게 사랑받는 배우였나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 이거 때문에 백영 출신 X군 만행 다 덮였는데. 본부장님이 수고가 많으시네.
정서의 의도를 완전히 뒤집어 해석한 경우도 있었다.
차라리 이런 댓글은 조명을 돌리니 나았다.
비슷한 댓글이 조금 더 달리기를 바라며 정서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금방 다시 전화가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전지훈을 설득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다른 문제라도 생겼나?
걱정이 되었으나, 먼저 전화를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련히 사정이 있으니 늦어지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리는 것이 나았다.
“…….”
초조함이 차츰 커졌다.
불안이 가끔 이렇게 가슴께를 출렁일 때 정서는 몸을 웅크린 채 제 체온으로 스스로를 덥히곤 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이상하게도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견이 떠오른 것이다.
안기고 싶다, 그가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충동이 들자 핸드폰을 쥐고 일어선 정서의 걸음이 자연스레 견의 침실을 향했다.
고작 하룻밤을 같이 보냈으나, 그 기억만으로 이미 이 침실은 견이 되었다.
견의 향이 슬쩍 밴 이불 속으로 들어간 정서가 몸을 웅크렸다.
곧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 납니다, 전지훈.
대뜸 들린 목소리가 날카롭고 위압적이었다.
은호의 성격이라면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한 뒤에 지훈을 바꿔 주었을 텐데.
지훈이 곧장 전화를 걸다니, 그것도 은호의 번호로.
“……윤정서입니다.”
― 나를 애타게 찾고 계시다고? 생명을 위협하실 땐 언제고.
“헛소리로 낭비할 시간은 없습니다. 제가 한 일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 잘 모르겠는데요. 그쪽이 윤정서라면 맞겠지. 그 이유로 조사받고 계시잖아요. 혹시 이 남자도 나 죽이라고 보냈어요?
“이러면 대화할 수 없습니다. 원하시는 게 있으시면 요구하세요. 원하는 걸 얻으시는데 차라리 그편이 확실할 겁니다.”
― 협박하는 건가?
“…….”
전혀 협조적이지 않다.
어쨌든 통화를 허락했으니, 무엇이라도 협상 테이블 위로 올려둘 것이라 믿었다.
이대로라면 말려든다.
정서는 정신을 차리려 허리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협박은 당신이 했죠. 우리 본부장님께 스캔들 기사를 내겠다 협박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어 전달한 사진 역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본부장님께서는 평범한 시민 중 한 분이실 뿐입니다. 게다가 그날은 괴한이 침입한 날이기도 했고요. 그런 상황에서 사진을 찍는 건 기자 윤리에 어긋나는 것뿐 아니라 사생활 침해입니다.”
― 변호사라 그런가, 달변가시네. 근데 난 기자로서 취재를 한 것뿐입니다. 그게 뭐 견해의 차이일 거고요.
“그래서 전지훈 기자님이 바라시는 게 뭡니까. 왜 우릴 거기로 불러낸 거죠?”
― 내가 당신을 불렀다고?
“예. 부르셨습니다. 로열블러드 호텔로, 오후 한 시까지. 그러니까 제 카드로 결제를 어떻게 했는지 소상히 밝히셔야 할 겁니다.”
―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지나치게 방어적이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대화는 소모적이었다.
통화를 허락했으면서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정면돌파를 해야 하나.
“소모적인 대화는 그만하시죠, 전지훈 기자님. 기자님께서 평소 백영에 우호적이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계셨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본부장님의 모습도 마음에 안 드셨겠죠. 하지만 이번엔 선을 넘으셨습니다.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전 기회를 드리려 소통의 창구를 열어드린 겁니다. 왜 그날 저를 호텔로 불러내셨는지, 그 사진으로 무엇을 협상하려 하셨는지 말씀하세요. 그래야 서로간의 유의미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 이유가 어딨어.
“네?”
― 이유가 어딨냐고. 그냥 너희 X돼 보라고 하는 일에 이유가 어딨냐고.
목소리가 순간 돌변했다.
차갑고도 날카로운 그 목소리는 어딘가 저열한 기색이 역력해 더 말을 잇기 꺼려졌다.
위험이 감지됐다.
지금껏 지훈에 대해서 제대로 조사해 볼 생각을 하지 않고 기사 몇 개만 찾아본 것이 잘못이었다.
돈을 노렸다면 이렇게 악의적으로, 거추장스럽게 나올 필요가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설마 견에게 악감정이 있는 걸까. 아니면…….
― 재밌는 기삿거리가 하나 있어요, 나한테.
“…….”
― 하 회장님이 특별히 주신 거죠. 지금 이 상황에서는 특히 그쪽한테 불리할 기사고.
전지훈의 입에서 결국 그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정서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하 회장이 전지훈에게 줬을 기사는 뻔했다.
이렇게 쉽게, 이렇게 빨리 제 약점을 남에게 넘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버렸기 때문일까?
버리는 처지에 견과 결혼시키려는 것은, 견까지도 버렸다는 뜻일까.
― 그러니까 이 정도의 무례는 견디세요.
“하 회장님과는 언제 접촉하신 겁니까. 시간이 없으셨을 텐데요.”
― 없었죠. 조언 하나 드릴까요, 변호사님?
“…….”
― 과거보다는 미래에 집중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보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느냐. 그게 중요할 겁니다. 아무튼 제가 언제든 당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만 기억해 주세요. 아시겠죠. 이런 허튼짓도 이번만 봐주는 겁니다.
뚝.
전화가 끊겼다.
하 회장은 결국 전지훈을 ‘정서’보다 빨리 찾았다.
그녀에게 찾는 일을 맡기고도 그녀를 믿지 못해서 따로 찾은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다른 식으로는 어떻게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건 괜찮았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 괜찮았다.
문제는 저를 믿지 못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무덤을 손수 파 주었다는 것이다.
전지훈은 아직 기사를 발행하지 않았다.
이쪽을 배려해서는 아닐 테니, 때를 기다리는 것이거나 하 회장이 자신의 지시 전까지 올리지 말 것을 종용해서겠지.
그럼 하 회장은 그 모든 걸 알고도 그냥 지켜본 거구나.
내가 무력함을 느낄 수 있도록 기다린 거구나.
기사가 나가도록, 조사를 받도록 내버려 두고, 조사실에서 다시 꺼내 주면서 그의 힘을 과시한 거구나.
언제부터 쥐고 있었는지 모를 주먹 탓에 그녀의 손이 희게 질렸다.
그때였다.
밖에서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정서의 핸드폰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