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85)

42.

‘예약 결제 내역을 보니 윤정서 씨가 백영 엔터테인먼트의 법인 카드로 해당 호텔을 예약한 정황은 확인하였습니다.’

맞아. 법인 카드.

정서는 호텔을 예약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서의 이름으로 예약이 됐다는 건, 누군가 그녀의 법인 카드를 대신 사용했다는 뜻이다.

그것 역시 백영엔터테인먼트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조작하기 쉬웠다.

“짐작 가는 사람 있어요?”

은호의 물음을 들은 정서는 생각에 잠겼다.

견의 생활을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녀의 카드를 사용할만한 사람.

견의 비서실 사람들이면 누구든 가능했고 그 외에도 경리팀이나 회게팀 직원, 그녀가 속해 있는 법무팀 직원이라면 가능할 수는 있었다.

“없으면 찬찬히 생각해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그래서 이제 용건은요? 어느 쪽이에요. 전지훈, 장소영.”

“우선 전지훈. 장소영은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 만나기 어려울 거야. 전지훈은 지금 병원에 있는 거 알고 있지.”

“들었어요. 회복 중이라던데요.”

“전지훈을 만나야겠어. 그런데 나는 만날 수 없으니까…….”

“통화라도 하게 해달라는 거죠?”

“응. 가능하면. 근데 그럼 네 신분이 노출될 수도 있어.”

“상관없어요. 연기는 잘하니까 그냥 친구나 동료인 척하고 들어가면 될 거예요. 혹시 몰라 어느 병원인지 찾아놨어요.”

“…….”

정서는 제 앞에 서 있는 은호를 잠시 올려다봤다.

척척 대답하는 것이 잘해 주리라는 것은 의심되지 않았으나, 괜히 걱정이 앞섰다.

은호가 너무 순순히 말을 들어 주니 괜히 부려먹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조심하라고.”

“걱정하는 거예요, 지금?”

정서가 몸을 일으켜 은호와 마주 섰다.

그래도 은호의 키가 한 뼘도 넘게 커 올려다보는 건 매한가지였으나, 아까보단 나았다.

“어. 걱정.”

“어차피 전지훈은 내 얼굴도 몰라요. 행여 잘못될 것 같으면 냅다 도망가면 되고. 나 그거 잘하거든요, 도망가는 거.”

“어련하겠어.”

“진짠데.”

“그래. 알았으니까 이만 가 봐.”

“기왕 걱정한 거…….”

조금 더 해보지.

그렇게 말하며 은호가 고개를 숙였다.

비로소 맞은 눈높이에 자신이 고스란히 비치는 눈동자를 무심코 바라보던 정서가 가까워지는 인영에 몸을 뒤로 물렀다.

“뭐 하려고.”

“잘하고 오라고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뭐?”

“그럼 힘내서 잘하고 올게요.”

은호가 눈을 반짝였다.

아까까진 혼자 알아서 잘할 듬직한 청년처럼 보이더니, 이번엔 그 청년은 어디 가고 웬 대형견 한 마리가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주인이 간식 주기만을 기다리며 강렬한 눈빛으로 애원하며.

정서는 머뭇거렸다.

요새 어린애들은 이런가?

그냥 칭찬에 목이 마른 건가?

정서 역시 어렸을 때 누군가 건넨 칭찬에 들뜰 때도 있었다.

그녀에게 누군가 호의로 말을 건네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

결국 그녀는 손을 뻗어 은호의 복슬복슬한 머리칼을 쓸었다.

탈색모는 상한 듯하면서도 이상하게 감촉이 좋았다.

몇 번 쓰다듬자 은호의 입꼬리가 완만히 올라오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들었다.

“기다려요, 금방 연락하게 해 줄게요.”

“응. 기다릴게.”

은호는 잠시 지금의 정서를 눈에 담아 두겠다는 듯 그녀를 응시하다 이내 몸을 틀었다.

배웅을 위해 현관까지 따라나선 정서는 은호가 집을 나서자마자 제 방으로 향했다.

그러곤 노트북을 켰다.

카드 결제 내역을 확인하면 얼추 결제 시간을 알 수 있을 테니 뭐라도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전 아홉 시 삼십칠 분? 그럼…….”

전지훈이 회사 근처에 나타난 것이 아홉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CCTV에 적힌 숫자를 복기해 보면 그랬다.

그럼 화면에 잡혔던, 전지훈과 접촉한 여자가 정서의 카드를 이용한 것일 확률이 높았다.

전지훈이 계획을 전달한 뒤 호텔을 예약했다.

이후 우편함에 그 봉투를 넣고 유유히 떠났다.

그 봉투는 견에게 전달됐고 스캔들은 예정과 다르게 견의 존재가 고스란히 담겨 나왔다.

전지훈이 거기까지 예상하고 불러낸 것일까.

아니, 그건 지훈 혼자서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너무 많은 구멍이 있다.

퍼즐을 맞춰 완성하려 해도 찾지 못한 조각이 너무 많아 전체적으로 무슨 그림이 그려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문제는…….

“어디를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거지.”

지끈거리는 통증에 정서는 그대로 이불에 고개를 묻었다.

푹신한 이불에서 옅게 나는 섬유유연제 향만이 그녀를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벌써 몇 시간 째 깨어 있는 걸까?

지난밤 조사받기 전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그건 견도 마찬가지일 텐데.

오래 걸리려나.

문득 견의 생각이 들었다.

전화해볼까 싶다가도,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니 괜히 방해될까 싶었다.

돌아오면 재워야겠다. 벌써 밤이 되었으니까.

운전하다가 졸면 안 되는데, 기사라도 데려가라고 말할 걸 그랬나 보다.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정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정신을 차려야지.”

자책하듯 머리를 두어 번 아프지 않게 내리치던 정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렇게 빨리 도착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발신인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은호가 아닌 견이었다.

“여보세요.”

― 김이 샌 목소리네. 기다리는 다른 전화라도 있나?

“응?”

대번에 핵심을 찌른다.

정서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견은 그녀를 잘 알았고 그녀에 관한 것에 예민했다.

“그게……. 전지훈이랑 연락하려고.”

― 전지훈이랑? 어떻게.

“연락책을 찾아서 일단 보냈는데 기다리고 있어. 전화가 오면 물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 그 자식이야?

“……응. 맞아. 차은호.”

― 찝찝해. 왜 순순히 말을 들어 주는지 잘 모르겠어.

“나도 그건 그렇지만 의심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적어도 아직은. 물론 이건 그냥 내 감이니까 하견, 네가 믿지 못해도 할 말은 없어. 그렇지만…….”

― …….

&

침묵이 흘렀다.

견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에 별이 몇 개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을 좀체 믿는 법이 없고 제 곁에 두는 법도 없는 정서였다.

그런 정서가 어째서 은호를 곁에 두는 건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정도뿐이었다면 이런 기분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은호는 하연정의 아들입니다. 하연정은 아시다시피…….’

‘내 사촌 동생이라고, 차은호가.’

‘예. 물론 아버지가 키우다시피 했고 호적에도 올리지 않았으니 법적으로 가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생물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저 역시 이번에 별도로 조사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은호가 나타난 이유가 하 회장에 대한 복수 때문이라면, 그래서 견의 뒤까지 캐고 다녔다면 정서의 말을 들어 주어서는 안 됐다.

정서와 이렇게 가까이 지내서도, 그녀의 믿음을 받아서도 안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은호가 어떤 사람인지 밝히기 어려운 까닭은.

역시 멍청한 질투심 때문인 거지.

아버지에게 외면받고 사랑에 미친 어머니를 두었다는 것이 견을 가련하게 만들었다.

정서는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본 정서는 정이 많았다.

가진 것 없는 주제에 꼿꼿하게 살려고 발버둥 치고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티가 나지 않게 배려하는 것이 그녀였다.

십 년 전에도 죽은 새를 가방에 넣어두는 기행을 펼쳐 놓고선 그 새를 묻어 주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그녀니까, 그런 윤정서니까.

그러니까 견을 아껴 준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고 싶었다, 견은.

그녀의 삶에 불쌍하고 처량한 것은 그 하나이면 족했다.

다른 이가 끼어들어 그 관심과 애정을 앗아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 하견, 나 전화 들어오는데? 끊어야 할 것 같아. 다시 전화할게.

“통화 잘해.”

― 응.

그래도 대답을 하고 끊는다.

그게 윤정서 식의 예의지.

고작 이런 게 좋다고 마음이 풀리는 그나, 그런 그가 마음에 쓰여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 그녀나.

멍청하긴 매한가지지.

“오래 기다리셨어요?”

견은 저를 향한 목소리에 하늘을 보고 있던 시선을 내렸다.

원래 저렇게 짧은 치마를 입었던가.

평소에는 정서처럼 무릎께에 이르는 치마를 입었던 것 같은데.

“예. 오래 기다렸는데.”

“죄송해요. 나가려는데 박 팀장님께서 도와달라고 하신 일이 있어서…… 괜찮으신 거예요? 많이 야위신 것 같네요. 피곤하신 것 같기도 하고. 걱정돼요, 본부장님. 운전 직접하신 거예요?”

“새삼스럽게 이런 얘기 나눌 사이는 아니니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괜찮나?”

“…….”

수연은 못내 아쉽고 서운한 얼굴이었지만, 견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차체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켜 수연에게 다가간 견이 수연과 눈을 맞췄다.

“지금부터 딱 한 번만 물을 테니까 제대로 대답하세요, 이수연 씨.”

“……네. 말씀하세요.”

“이수연 씨, 고용한 사람이 누굽니까.”

“면접에 참여하신 분은 박 팀장님, 김 실장님 그리고…….”

“내가 지금 그런 걸 묻는 걸로 보이나.”

“제가 알기론 정식적인 절차를 통해 고용된 것으로 아는데 혹시 무엇 때문에 이런 걸 물으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수연의 경직된 얼굴과는 달리 목소리는 힘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으려는 듯해 보여 견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하 회장이랑 무슨 사이냐고 묻는 거야, 나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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