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85)

40.

“본부장님!”

“결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견은 심지어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하 회장을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 모든 일이 정서는 믿기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갑자기 저래?

“가자, 정서야.”

“본부장님, 잠시만요. 회장님!”

견이 정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걸어나가는 견의 앞을 하 회장의 비서가 가로막았으나, 하 회장이 그냥 보내라는 듯 고개를 젓자 옆으로 비켜섰다.

앞을 막아선 비서를 노려보던 견이 씩 웃으며 정서를 밖으로 끌었다.

“다음에는 차라도 주세요.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던데.”

쯧.

혀를 짧게 찬 뒤 기나긴 복도를 걸어 지나가는 동안 견은 정서를 제 품으로 바짝 당겼다.

하 회장의 집안일을 돕는 사용인들이 힐긋거리는 시선이 뒤를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드디어 결혼 허락받았네.”

장난스레 말을 거는 견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속도 없이 웃음이 나오나?

정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견을 보자 현관문이 열렸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됐어요. 김 비서님은 책임지고 기사나 내 주시죠. 저희 아내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도요?”

“……예. 알겠습니다.”

진짜 왜 이래?

정서는 돌연 돌변한 견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집을 빠져나와 정원을 걷는 동안 뉘엿뉘엿 지는 햇빛이 그들을 붉게 물들였다.

그것은 마치 핏빛 같기도, 따스한 불빛 같기도 했다.

“이 골목은 지나가는 택시가 없어. 죄다 기사 딸린 사람만 사는 곳이라서.”

“대체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긴. 윤정서랑 결혼할 생각이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정문이 닫혔다.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하 회장이 거주하는 저택의 주변으로는 별다른 건물이 없었다.

넓은 부지를 독점하듯 쓰고 있는 몇 채의 저택들의 주인은 모두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재벌가의 오너들이었다.

“이런 곳에서 살고 싶어?”

“아니.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아까 그 집, 잠깐 봤는데 내 취향은 아냐. 그래도 윤정서가 갖고 싶으면 가질게.”

“무슨 생각이냐니까?”

정서는 제 어깨를 안은 견의 팔을 밀어내며 멈춰 섰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그녀의 태도에 견은 한숨을 짧게 내뱉었다.

“아까 말했잖아. 너랑 결혼할 생각이라고.”

“그러니까 왜.”

“왜긴 왜야. 처음부터 너랑 결혼할 생각이었어, 난.”

“상황이 변했어. 아까 싸워 보자고 했던 건 다 뭐야? 왜 그렇게 쉽게 수긍해. 주식 사 둔 거, 모아 둔 거. 백영 빼앗으려고 그런 거잖아. 어떻게든 이겨 보려고 그런 거잖아. 생각 없이 구는 것처럼 보여도 아니었던 거잖아.”

봇물 터지듯 말이 쏟아졌다.

하 회장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저조차 이렇게 화가 나는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속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멍청한 사람은 더더욱 아닌 견이 이러는 데에 이유가 있을 텐데.

정서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알았으니까 숨 골라. 얼굴은 괜찮아? 아까 나오자마자 물었어야 했는데, 늦어서 미안해.”

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분히 정서의 얼굴을 살폈다.

뺨을 감싸 쥐고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을 본 정서는 더 화를 낼 수 없어 긴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견.”

“이제 본부장이라고 안 부르네, 둘이 있을 땐.”

“병원 갈까? 화상 입은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모르잖아.”

“괜찮아. 무슨 생각인지 말 안 할 거야? 알아야 내가 돕든지, 피하든지. 뭐라도 할 거 아니야.”

견은 걱정 어린 정서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살짝 튀어나온 입술하며 속상하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저를 보는 눈빛이 사랑스러웠다.

이런 순간에도 인간적인 감정을 죄다 느끼고 있다니.

스스로 물러터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별수 없다고.

“일단 집으로 가자. 지금쯤이면 유리는 갈아 끼웠겠지. 오늘은 쉬어. 무리했으니까.”

“그럴 시간 없어. 기사 나가는지 확인하고 기자 쪽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는 공지 띄워야 하니까.”

“그래, 어련하시겠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잖아. 회사 가서 그 사람들 다 마주하게? 아무리 윤정서라도 가끔은 정면돌파 말고 측면돌파를 해봐.”

마침 운명처럼 옆을 지나치는 택시로 견이 손을 뻗었다.

정서는 더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지, 자신이 연거푸 물었던 것처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는 건지 대답해달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 이후 그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정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눈을 감기까지 했다.

“진짜 못 말린다니까…….”

중얼거리듯 말한 정서의 고개를 끌어 제 고개 위로 기대게 한 견이 나직이 말했다.

“윤정서.”

“왜.”

“눈 감아.”

“…….”

“키스할까 봐 겁나서 그래?”

“그 전에 맞고 싶어서 그래?”

“……하.”

이러니까 옛날 같네. 

견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서의 허리에 팔을 둘러 제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맞닿은 몸이 따뜻했다.

“옛날에 우리 이런 적 없는데.”

“우리 사이 좋았잖아. 애틋하고.”

“……시간이 지나면 다 미화된다더니 너도 그랬나 보네.”

“그래. 시간이 지나면 다 미화될 거야. 오늘의 일도.”

“…….”

“조금만 쉬어, 윤정서. 너는 늘 너무 경직된 채로 살아왔어.”

“…….”

“싸우듯이, 버티듯이 그렇게 살지 마.”

하 회장은 정서의 아버지를 빌미로 무엇이든 할 것이다.

견의 약점이 정서라는 것을 안 이상 그녀를 계속 괴롭히고 뒤흔들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 하 회장이 그렇게 나왔을 때 더 망설이지 않고 굽힌 것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아주 타당한 일이었다.

견은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후회할 일은 하지 않을 것이고.

&

「정서 씨, 이럴 때일수록 밥을 잘 먹어야 해요. 안 넘어가면 죽이라도 먹어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연락해요. - 미희」

정서는 미희가 남긴 메모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냉장고를 가득 채워놓고 간 미희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마주치면 더 불편할까 봐 얼굴 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감췄겠지.

자신의 조카를 곤란하게 했으니 정서가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그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연고 바르자.”

“그 정도 아니야.”

“그럼 밥 먹을래?”

정서가 고개를 저었다.

집에 오자마자 곧장 전화를 돌리느라 진이 다 빠졌다.

박 실장은 정서가 연락할 줄 알았다는 듯이 곧장 그녀의 지시대로 홍보팀에 연락해 백영 엔터테인먼트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더불어 법무팀에게 자문을 구해 고소 공지 역시 띄웠다.

“전영데일리 김선주 기자한테 전화해야 해.”

“내가 할까?”

“해서 뭐라고 하게.”

“할 말은 많은데, 내가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 주는 걸 좋아해서.”

“그냥 가만히 있어요.”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 없겠다. 나가 봐야 해.”

“어디?”

정서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견을 붙잡았다.

견은 저를 붙잡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 위로 제 손등을 포갰다.

“왜. 잠시라도 떨어지기가 싫어?”

“그게 아니라, 지금 나갔다가 괜히…….”

“믿을 만한 사람 만나는 거니 걱정 마. 지금 저기 계신 어떤 분이 지분 정리되는지 안 되는지만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서.”

또, 또.

정서의 눈꼬리가 미세히 처진다.

견이 손으로 그녀의 눈꼬리를 슥 쓸어 보더니 이마를 쿵 하고 부딪혔다가 떼었다.

“어디 나갈 생각하지 말고 집에서 쉬어. 기자랑 통화한다고 또 진 다 빼지 말고.”

“일찍 들어와.”

“이런 대화 나누는 거 보니까 벌써 부부네.”

“……아직 안 갔어?”

“지금 가.”

견은 정서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훌쩍 집을 나섰다.

검은색 세단이 미끄러지듯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 정서는 주저앉았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자 신음이 옅게 섞인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견의 앞에서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최악이었다.

좀 더 경계했다면 달라졌을까.

전지훈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하 회장이 전지훈을 먼저 찾아 덫을 친 것일지도 몰랐다.

“전지훈을 만나야 해.”

번뜩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미 전지훈에게 약물을 주입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지금 자신이 전지훈을 찾아가는 일은 그대로 자수하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아, 차은호.”

뒤늦게 그의 생각이 났다.

핸드폰을 열어 찬찬히 다시 살피니, 어제부터 오늘까지 전화가 세 차례 온 것이 보였다.

하도 많은 연락이 와 묻힌 모양이었다.

문자도 한 통 와 있었다.

「괜찮은지 알 도리가 없어 답답해요. 점이라도 좋으니까 찍어서 보내요.」

정서는 그 문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채 세 번을 울리기 전에 은호가 전화를 받았다.

― 윤정서?

“……응, 나야. 이름을 부르네. 내가 너랑 친구…….”

― 어디예요. 괜찮아요?

“괜찮아. 집이야.”

― 갈게요, 지금.

“여길 오겠다고?”

― 네. 하견 집이에요?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구나.

정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나가지 말라고 견이 신신당부를 했으나, 은호를 부르는 일은 따지자면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집 안에 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여긴 견의 집인데 괜찮으려나?

머뭇거리는 사이, 수화기 너머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너 지금 오는 거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 하견 집 어딘 줄 알아요. 확인해야겠어요, 괜찮은 건지.

“……알았어.”

꼭 부탁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

정서는 그렇게 합리화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뭐 이렇게 빨리 왔…….”

문을 열어 주던 정서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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