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일을 이 지경까지 잘도 끌고 왔구나.”
하 회장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바스러진 찻잎이 조금 떠 있는 찻물은 투명해 보였으나 맛만큼은 확실히 썼다.
정서와 견을 앞에 세워둔 채 동동 떠 있는 찻잎 구경이나 하는 폼이 우스워 견은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견이 하 회장의 집을 찾은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사실 첫날은 어영부영 끌려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첫 번째로 보아도 무방했다.
하 회장을 닮은 집은 늘 조금 춥다는 인상이 들었다.
높은 층고와 흰 외벽 때문이기도 했지만, 과시하듯 놓인 몇 개의 오브제들과 고가의 가구들은 위압적이었다.
특히 하 회장이 앉아 있는 검은색 가죽 소파 뒤에 놓여 있는 그림이 그랬다.
한 벽면을 빼곡히 채울만한 크기의 그림이었는데도 빨려들 듯 어두컴컴한 검은 구체의 형태만이 캔버스를 채우고 있었다.
그 앞에 앉은 하 회장은 아마 제가 그 구멍 앞에 앉는 것까지를 계산하고 그림을 두었으리라.
누구든 제 아래에 두고 싶어하는 성미, 압도하고 싶은 성미가 그렇게 드러났다.
지금처럼 둘을 벌 세우듯 저 혼자 앉아 한가롭게 차나 홀짝이다니.
“너는 대체 뭐 하는 계집애냐?”
“……죄송합니다.”
“나는 전지훈을 데려오라고 했지, 죽이라는 말은 한 적 없다.”
“더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네가? 소란의 시발점인 네가 뭘 어쩌겠다는 거지? 대체 뭘 할 수 있지? 네가 움직이는 게 더 소란스러울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거냐?”
“…….”
하 회장이 불호령을 내뱉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만히 일렁이는 찻물을 바라보다 그대로 정서에게 뿌렸다.
견이 손을 급하게 뻗어 정서를 끌어당겼으나, 정확히 조준된 물은 그녀의 얼굴에 끼얹어졌다.
“뭐 하시는 거지?”
견이 싸늘하게 물으며 정서의 얼굴을 살폈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얼굴을 맴돌았다.
다행히 큰 화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이미 견의 심사가 단단히 뒤틀렸다.
견은 하 회장의 앞에 놓인 테이블을 구둣발로 짓이기듯 내리누르며 하 회장 쪽으로 몸을 숙여 마주 보았다.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 발 안 치워?”
“내 걸 망가뜨리셨으면, 본인 거 망가지는 꼴도 지켜보셔야죠. 내가 모를 것 같아요? 애초에 전지훈이 목적이 아니었지? 이렇게 윤정서도, 나도 엉망으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잖아. 한패인 거야, 전지훈이랑? 전지훈이 장소영을 꼬드기게 해서…….”
“억측이 심하구나. 나는 네게 꿈도 못 꿀 자리를 줬고, 그 자리를 지키라고 계집까지 붙여 줬다. 그런데 계집질에 눈이 멀어 맡은 역할 하나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 건 너다. 네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네 스스로 망쳤는데 누굴 탓해?”
하 회장은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견을 치우라는 듯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에게 눈짓했다.
비서가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으나, 견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찻잔을 발로 짓밟아 깨트렸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거실을 울렸다.
하 회장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하견!”
“아까우세요?”
“뭐?”
“고작 이 찻잔이 아까우시냐고요.”
“되먹지 못한 네 놈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니 아깝지. 아깝고 말고.”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
견이 손을 내려 깨진 찻잔의 유리 조각을 쥐었다.
정서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그를 막으려 손을 뻗었으나, 어쩐지 그를 막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이었으니까.
지금 견이 느끼는 분노도, 어쩌면 이으려는 말도.
전부 견이 지금껏 전하지 못한 진심일 거란 생각에.
“소중한 걸 하나하나 잃어가는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어, 당신이.”
“…….”
“다행이다. 소중함이란 감정을 모르면 어떡하나 내내 걱정했거든. 만약 정말 윤정서가 전지훈을 찾길 바랐다면, 그래서 당신이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을 막아 주면 윤정서를 다르게 대했을까? 다르게 봐 줬을까?”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아니. 난 아니라고 생각해. 그럴 마음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이런 쓸데없는 행동 집어치우고 바라는 걸 말해. 나한테서 윤정서를 가져가는 걸 바라는 건지, 아니면 윤정서랑 나락으로 떨어지길 바라는 건지.”
하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서는 그것이 분노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하 회장은 견이 지금 자신을 향해 던지는 물음에 대한 답이 앞으로 견의 선택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굳게 예감한 듯했다.
정서도 견처럼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제껏 하 회장은 어찌 됐든 견을 필요로 했다.
그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 굳히기 위해서.
형제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백영 그룹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그 아이에게 물려 주기 위해서 견이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그녀의 도움을 빌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견의 스캔들이 세간에 떠벌려진 지금, 아마 회사에서는 견을 몰아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됐을 것이다.
평소에도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니, 얼마나 반갑고 좋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정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하 회장은 자신을 여기로 불러들였으면 안 됐다.
적어도 견이라도 건지기 위해 저를 내치거나, 이 사건의 수습을 위해서 직접 반박 기사낼 것을 지시하는 듯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다른 믿는 구석이 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내가 널 데려올 때 했던 말 기억하겠지.”
“무슨 말.”
“네 엄마가 너를 나에게 맡기고 갔다는 말.”
“…….”
“네 엄마는 나를 사랑했어, 하견. 아마 지금도 그럴 거다. 사랑한 채로 죽었으니까.”
“……입 닫아.”
그런 하 회장에게서 느닷없이 견의 어머니 얘기가 튀어나왔다.
정서는 이 대화의 맥락을 쫓기가 어려웠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견과 하 회장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자신은 알지 못하니까.
다만, 지금 하 회장의 언행이 몹시 부적절하다는 것만은 또렷이 알 수 있었다.
감히 견의 앞에서 견의 어머니 얘기를 꺼내다니.
무슨 권리로, 무슨 자격으로.
“그러니까 그런 네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처신을 똑바로 하라고 누누이 말했지. 네가 나만 잘 따라온다면 아들로 키우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그렇게 약속했고.”
“…….”
“넌 이미 나를 여러 번 실망시켰다. 애초에 믿지 않았으니 새삼스럽게 실망하진 않았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이지.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 돌려받아야겠다.”
“무엇을.”
“본부장 직함 반납하고 나가.”
지금 견을 자리에서 내리겠다고?
정서의 눈이 크게 뜨이는가 싶더니 더 참지 못하고 결국 입을 열었다.
“그건 좋지 않습니다. 지금 내려오면 스캔들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현재 백영 그룹의 경영권을 두고 큰 혼란이 야기될 것입니다. 회장님께서도 그걸 아시니 본부장님을 그 자리에 앉히신 것 아닙니까?”
하 회장이 눈동자만 굴려 정서를 바라보았다.
네가 감히 낄 자리냐 책망하면서도 일리 있는 말이라는 듯 수긍하는 눈빛이었다.
“내가 그걸 감수하고라도 내리려는 이유가 있겠지?”
“다른 조건이 뭐야.”
그래도 오래 본 사이라고, 그동안 겪을 만큼 겪었다고.
견은 하 회장이 내민 선택지 외에 다른 옵션이 있다는 것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어차피 지금 하는 말은 그냥 던지는 거잖아. 진짜 원하는 게 뭐야.”
“지분 전부 반납해.”
“…….”
“다른 애들 이름으로 지분 사 모으는 거 모를 줄 알았던 건 아니겠지.”
견의 눈매가 눈에 띄게 굳었다.
하 회장은 비로소 제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 마음에 드는 듯 일으켜 세웠던 몸을 다시 소파 깊숙이 묻었다.
다리를 꼬고 앉는 오만한 자세를 취한 하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처분해. 그리고 둘은 결혼하는 게 좋겠다.”
“같이 묻을 생각이네.”
“아직 넌 아무것도 없지 않니? 백영의 이름 없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것보다야, 그렇게. 언젠가 나를 무너뜨리고 깔아뭉갤 수 있다는 허튼 희망을 품고 바닥을 기며 살아.”
“…….”
무거운, 밀도 높은 정적이 거실을 메웠다.
견은 지금 생각하고 있었다.
이토록 하 회장이 견의 굴종을 확신하는 건 패를 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패가 무엇이 됐든 정서와 관련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결혼 준비는 이쪽에서 돕겠다. 반박 기사 역시 이미 준비됐어. 그동안 올라간 기사도 전부 삭제 조치될 거다. 뭐, 이제 나간다고 여론이 쉽게 뒤집히지는 않겠지만.”
“…….”
“결혼 준비를 도울 사람도 붙여 줄 테니 걱정 말거라. 애만 낳지 않는다면, 둘이 뭘 하든 관여하지 않겠다. 그 사사로운 사랑 놀음을 하든, 어쩌든. 지금처럼 백영의 명성에 금이 가는 일만 벌이지 않으면 된다.”
정서의 시선이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내 침묵하고 있는 견을 향했다.
하 회장이 견을 이렇게 깔아뭉개고 있는데, 드러내놓고 무시하고 있는데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평소에 견이라면 ‘아이 같은 건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워낙 혈기 왕성한 나이인지라.’라며 말을 끊어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회장님. 이런 상황에서 결혼을 속행한다면 분명 이목이 더욱 집중될 겁니다. 말씀하셨다시피 백영의 명성에도 결코 도움되지 않을 것이고…….”
결국 입을 연 것은 정서였다.
일단 과잉된 감정들을 조금 내리누르고 차분히 생각하자고.
그때 견이 앞으로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늘이 진 옆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어 불안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주식 처분하고 연락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