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85)

38.

의외로 대치 상황은 쉽게 마무리됐다.

누가 윗선에 연락을 한 건지 형사는 제게 온 연락을 받고 잔뜩 억울해하는 얼굴로 정서를 풀어 주었다.

“이래서 재벌들이 싫다니까, 씨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는 형사를 뒤로한 채 정서와 견은 빠져나왔다.

경찰서를 빠져나온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 회장의 비서였다.

“우리도 차 가지고 왔는데.”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차는 자택으로 옮겨두겠습니다.”

“나 내 차 남한테 안 맡겨.”

“예. 타시죠.”

비서는 익숙하다는 듯 견의 말을 잘라 냈다.

견이 그런 비서를 잠시 가만히 응시하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정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서는 그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맞잡았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회장님 자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집으로 절대 안 들이시겠다더니 어쩐 일이래, 그 영감.”

“밖에는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하 회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둘의 기사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보도된 마당에 밖에서 만났다가는 세간의 주목을 끌 것이 뻔했다.

비서의 깔끔하고 무심한 대답에 견은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찾아오자 정서는 비로소 지금의 상황을 천천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않는 한, 가령 칼에서 제 지문이 나오거나 약물을 구입한 내역이 발견되는 등의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기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평판이었다.

기사가 나는 바람에 정서뿐만 아니라 견의 입지가 엉망이 됐다.

당장 백영 엔터테인먼트에서 아무런 입장도 내지 못하는 것부터가 그랬다.

비서실과 법무팀에서 온 전화는 총 다섯 통이었다.

특별히 입장을 내지 않았으니, 다시 연락할 법도 했으나 이제 핸드폰은 잠잠했다.

그들끼리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거나 손을 놓고 도망갔거나.

어느 쪽이든 그녀가 배제되었음은 자명했다.

아마 소영도 정서가 처벌받으리라 믿고 그런 행동을 벌인 것은 아닐 터였다.

견과 정서를 한번에 보낼 방법을 찾으면서,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오기 위한 선택이었겠지.

지금 그녀가 궁금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전지훈 기자가 어떻게 소영과 접촉했는지.

두 번째, 왜 제 법인카드로 호텔이 예약됐는지.

“도망치듯 나간 게 잘못이었어. 아무리 이 비서가 나를 끌어냈어도 네 곁에 남았어야 했어. 그럼 나도 목격자가 될 수 있었잖아.”

견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후회가 담겨 있는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서 정서는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사건이 더 복잡해졌을 겁니다.”

“지금보다 어떻게 더? 사람들이 내 욕하는 건 괜찮아, 늘 그랬으니까. 그런데 윤정서는 달라. 윤정서가 그 자릴 어떻게 올라갔고 지켰는데. 고작 이런 스캔들 하나로 망칠 생각을 하다니.”

정서는 힐긋 앞 좌석을 바라보았다.

조수석에 탄 하 회장의 비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운전 기사 역시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둘 다 하 회장의 사람이니 눈에 띌만한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너무 염려 마세요, 해결하겠습니다.”

“회사 홍보팀에 연락해서 반박 기사 내게 할게.”

“기다렸다 내일 내죠.”

“왜? 그 사이에 기사는 싹 돌 거고 네 신상 찾아내는 것도 시간 문제야.”

견은 초조했다.

정서에게는 약점이 너무 많았다.

정서의 탓이 아닌, 그러나 정서의 탓처럼 돼 버린 약점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을까 두려웠다.

“우선 오늘 회장님께 가서 결혼 얘기를 철회하세요.”

“뭐?”

“이렇게 된 이상 저희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을지 뻔히 알면서 그런 위험을 짊어질 순 없어요. 저도, 본부장님도. 또한 반박 기사를 내는 데에 있어서도 그편이 좋을 겁니다.”

정서의 말에 견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흐르는 냉기가 그의 기분이 상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정서라고 다른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같이 죽거나 따로 산다.

그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면 따로 사는 게 맞았다.

견과 정서에게 삶은 늘 쉽지 않았고, 살기 위해서 뭐든 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정서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느 쪽이야?”

“예?”

“살기 위해 나를 버리는 거야. 아니면 나를 살리려고 너를 버리는 거야?”

“……둘 다 아닙니다. 본부장님의 안위나 저의 안위가 별개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요. 지금 상황에서는 그냥…….”

“다행이네. 둘 중 어느 쪽이어도 너를 용서 못 했을 것 같거든.”

견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정서의 허벅지에 크고 늘씬한 손이 닿자 그녀의 몸이 경직됐다.

룸미러를 통해 확인한다면 보일지도 모르는데.

정서가 조용히 그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견은 어림없었다.

제 손 위에 얹어진 정서의 손을 제 손을 뒤집어 깍지 껴 쥐는가 싶더니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마치 아까 조사를 받느라 진이 다 빠졌을, 두려웠을 그녀를 위로하고 걱정하는 손길 같았다.

두 사람이 특별하고 애틋한 사이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정서는 포개어진 두 손을 내려보며 잠시 숨을 죽였다.

견은 왜 그러는 걸까.

이럴 수 있는 사이가 아닌데, 두 사람은. 

특히 이렇게 엉망이 된 지금에서는 도저히.

아무리 잘해보려고 해도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것만이 답인 것 같은데.

“……그래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거짓말을 사람들이 믿는다고?”

“자극적인 진실은 재밌으니까요.”

“남의 삶 망가뜨리는 게 재밌지, 내 삶 망가지는 건 재미없어.”

“유감이네요. 본부장님께서 재밌게 여기는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서요.”

“나는 내가 그냥 개새끼라고 생각했거든?”

갑작스러운 견의 말에 정서가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매끄럽고 또렷한 옆얼굴을 타고 약간의 처연함과 씁쓸함이 흘렀다.

“그런데 멍청한 개새끼였어. 위험한 사람인 줄 알았으면 피했어야 해. 네게 닿기 전에 부러뜨려서라도 닿지 못하게 했어야 해.”

드물게 약한, 자책하는 모습이었다.

견은 이제껏 늘 여유로운 모습만 보여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 번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자책하지 않았다.

난감하고 곤란한 상황 앞에서도 자신의 페이스대로 밀고 나갔고 정서가 해결해 주기를 뻔뻔스럽게 바라기도 했다.

그랬던 견이 이렇게 유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정서는 어쩐지 마음이 저릿하고 아팠다.

소영이 한 것이 사랑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사랑이 무엇인지도 저도 잘 몰랐으나.

이런 마음이 사랑이라면, 어쩌면.

잠시간 착각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견이 저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도착했습니다.”

건조한 목소리로 하 회장의 비서가 말했다.

차에서 먼저 내려 문을 열어 주려는 비서에게 문을 잠그는 것으로 화답한 견은 내내 쥐고 있던 정서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이 크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그의 몸 위로 쓰러지듯 안겼다.

“본부장님!”

지켜보는 눈이 있는데.

그것도 하 회장의 집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정서가 다급히 견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그는 더욱더 그녀를 깊이 끌어안았다.

쥐고 있던 손을 놓고선 그녀의 등을 끌어안은 뒤 다른 손으로 목덜미를 쥐어 제 어깨에 고개를 기대게 했다.

“내내 안아 주고 싶었어.”

“…….”

“그렇게 달려서 도망쳤는데 고작 이곳이라고, 결국 네 아버지라는 사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자책할까 두려웠어.”

“…….”

“그래서 네가 날 미워하게 될까 봐, 싫어하게 될까 봐. 겁이 나.”

“…….”

견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쿵쿵 뛰는 심장의 박동이 정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진심이었다.

견은 이번 일 때문에 정서가 저를 미워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그에게 불리한 상황이 될 것을 알면서도 형사에게 주먹을 뻗었구나.

자책했구나, 슬퍼했구나.

결혼을 못 하게 되었다고 마음이 상하거나 실망한 것보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든 바로 잡아. 무엇이든 가질게.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이면 뭐든. 네가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듣지 않도록 할게. 바란다면 백영도 다 가질게. 원하면 두 번 다시 너의 삶을 아무도 해칠 수 없도록, 침범할 수 없도록 할게. 내가 보기 싫으면 안 봐도 돼. 그냥 가끔…….”

“본부장님.”

“생각했어, 널. 그 지루한 곳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너를. 아득바득 살아가던 너를. 자주 생각했어. 그러면 이 지리멸렬한 생활을 조금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하견.”

정서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시야에 들어온 견의 눈동자에 담긴 혼란과 두려움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정신 차려.”

“…….”

“네가 말한대로 하려면, 정신부터 차려야지. 지금 이 순간에도 하 회장은 너 무너뜨릴 생각만 해. 이 차 하 회장 차고 블랙박스에 우리 목소리 고스란히 녹음될 거야. 바깥에 서 있는 저 비서? 우리 말 하나하나 다 듣고 있을걸. 어떤 보고를 할지 몰라.”

“…….”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너 안 싫어해.”

“……정말?”

“고작 이런 일로 싫어할 거라 생각하는 거면, 날 너무 과소평가한 거지. 알잖아, 나 미친 X인 거. 받은 건 돌려줘야 해.”

“…….”

“그러니까 너도 싸워. 정신 차리고, 제대로.”

견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정서를 응시하더니 이내 조금 허무하다는 듯, 안도했다는 듯 피식 웃음을 뱉어냈다.

“고고하게 싸우는 건 못 해. 진창 같은 곳에 빠져서 허우적거려도 목만 물어뜯으면 그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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