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85)

37.

“전지훈 씨에게 약물을 투여한 사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장소영 씨를 폭행한 사실은요.”

“그것 역시 없습니다.”

“변호사시니까 어련히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사건은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수사 방식이 대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형사님?”

정서의 물음에 형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허공을 보며 한 번 웃었다.

그리고 이내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내려놓고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폭행 신고를 받아 출동한 곳에서 발견된 것은 정서의 발치에 놓인 정신을 잃은 남자 그리고 피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소영이었다.

“그날 로열블러드 호텔로 전지훈 씨와 장소영 씨를 불러낸 이유가 뭡니까.”

“먼저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럼 거긴 왜 갔습니까?”

“…….”

“예약 결제 내역을 보니 윤정서 씨가 백영 엔터테인먼트의 법인 카드로 해당 호텔을 예약한 정황은 확인하였습니다.”

“법인카드요?”

정서는 되물었다.

단순히 그녀의 이름으로 예약된 것이 아니었다. 

결제까지 제 법인카드로 되었다는 건 누군가 대단히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이번 사건이 단순히 소영이나 지훈의 힘만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 확실했다.

“전지훈 씨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의식 회복 중입니다.”

죽지 않았구나.

안도의 표정이 되는 정서를 보고 형사가 혀를 쯧 찼다.

“형량이 걱정은 되셨나 봅니다?”

“형사님, 확보한 증거도 없으시면서 대단히 확신을 가지고 저를 대하고 계시네요.”

“다 압니다. 방금 기사 났습니다.”

“기사라뇨?”

“아주 대단한 러브스토리를 가지셨더군요.”

형사의 말투는 명백히 비꼬는 어조였다.

정서의 러브스토리는 정서만의 것으로, 그것을 알만한 누구도 없었다.

그러니 형사의 말을 곱씹을 필요도 없이 답이 하나였다.

“핸드폰 주세요.”

“조사 끝날 때까지는 사용 불가합니다. 왜요. 변호사라도 부르시게요? 변호사시니 따로 변호사 부를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주세요. 이 정도 요구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 조사가 몇 시간째 이어지고 있으니 휴식 시간이라도 주시던가요. 긴급 체포 건도 아니고 저를 여기 붙잡아 두는 것도 한계가 있으실 게 뻔합니다.”

“예. 어련하시겠어요. 예전부터 느낀 건데 말을 참 예쁘게 하십니다?”

예전부터?

정서는 형사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조사를 하는 동안 내내 삐딱했던 태도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예전에 한번 법원에서 마주친 적 있다.

증인으로 나왔던 형사는, 피고의 죄를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물론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정서의 꼼꼼하고 전략적인 변론 덕분에.

하필이면 이럴 때 저 형사의 관할로 사건이 배정될 것이 뭔지.

어처구니없는 우연에 정서는 짜증이 치솟았다.

“사사로운 감정까지 수사에 개입시키시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그런 일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런 게 아니라도 증거는 차고 넘치니까요.”

“무슨 증거요. 애초에 장소영 배우의 얼굴에 난 상해 역시 제가 냈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왜 없습니까, 피해자 진술이 있는데.”

“피해자가 거짓으로 진술했을 가능성은…….”

“있겠죠, 물론. 그런데 이 기사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려나?”

“아까부터 기사 운운하시는데, 대체 무슨 기사를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정서의 말이 끝나기 전 형사는 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는 듯하더니 입을 다시 열었다.

“재벌가 망나니 아들의 스캔들? 전담 변호사와 사랑에 빠져……. 사랑에 눈먼 치정극, 결국 여배우 얼굴에 돌이킬 수 없는 흉터를 남기다.”

설마 그런 막장 드라마 같은 제목이 신문 기사로 실렸을까.

아무리 언론이 엉망이 되었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걸까?

“주세요.”

정서는 손을 냉큼 뻗어 핸드폰을 낚아챘다.

『[단독] 재벌가 망나니 아들의 스캔들? 전담 변호사와 사랑에 빠져……. 사랑에 눈먼 치정극, 결국 여배우 얼굴에 돌이킬 수 없는 흉터를 남기다.

바로 어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배우 J양의 스캔들이 다시 한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최근 유명 드라마에 다수 출연하며 톱스타로 우뚝 선 J양은 B엔터테인먼트사의 본부장 H씨와 스캔들이 난 어제 오후 대한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얼굴에 난 상처 때문이었다.


[사진 – 응급실으로 급히 향하는 J양]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J양은 무려 6cm에 달하는 길고 깊은 상처를 뺨에 입었다. 

자칫하면 실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대체 왜 이런 상처를 입게 된 걸까.

어렵사리 입을 연 J양의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가 상처 입게 된 것은 그날 났던 스캔들 때문이었다.


J양은 앞서 알려졌듯 H씨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미래를 약속하고 싶을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어딜 가든 한 쌍이었다. 

잘생긴 외모와 탄탄한 재력을 가진 H씨는 J양을 각별히 챙겼다고 한다. 

평소 다른 재벌가 자제들과 다투는 일이 잦았던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기에 두 사람 모두를 아는 지인들은 이 모든 게 J양의 특별한 내조 덕이라 여겼다.


이런 두 사람의 사랑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변호사 Y씨가 H씨의 전담 변호사가 된 다음부터였다. 

평소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켰던 H씨에게 Y씨는 큰 도움이 되어줬고 하필이면 그 무렵 드라마 촬영을 위해 해외로 나갔던 J양과 사이가 소원해지게 됐다.


J양은 H씨와의 사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엔 H씨도 이에 응하는 듯하였으나 Y씨가 두 사람이 만난 자리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등의 행동을 일삼자 H씨는 J양에게 정식으로 이별을 고했다.


[사진 – J양의 SNS 속 사진]


J양은 이별을 받아들였다. 힘들었으나 새 작품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런 J양을 향한 Y씨의 견제는 끝이 없었다. H씨와 교제와 무관하게 정식 오디션을 거쳐 발탁된 드라마에 캐스팅된 J양의 캐스팅을 취소한 것이다.


이로인해 J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H씨를 찾았다. 

제발 괴롭힘을 멈춰달라 호소하는 그녀의 모습이 하필이면 기자의 눈에 띄면서 열애 기사가 나게 됐다. 그 사실을 안 Y씨는 분노했고 J양을 불러내 결국 상해를 입히기까지 했다.


문제는 Y씨의 악행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연인끼리는 닮았다고 하던가. 현재 Y씨는 평소 다소 폭력적이고 불량스러웠던 H씨의 행동에서 더 나아가서 열애설을 낸 기자에게 약물을 주입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H씨의 지인은 이 사건이 알려지자,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었다. ‘트러블 메이커였던 H씨와 어울리는 것을 보면 Y씨 역시 보통이 아닐 줄 알았다’던 그는 두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끼리끼리 만나는 것도 축복이니 부디 다른 피해 없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해당 사건과 관련해 아직 B엔터테인먼트 측은 특별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으며 J양의 소속사에서는 J양의 심신이 걱정되니 억측을 최대한 자제해 달라 호소하고 있다.

이제는 이 눈먼 사랑에, 미친 사랑에 제동을 걸 때다.

전영데일리 김선주 기자』

기사를 전부 읽은 정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하나 없이 추측만으로도 기사를 쓰는 세상이라고 했지만, 이런 삼류 소설 따위를 기사로 썼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전지훈 기자가 소속돼 있는 전영데일리에서 해당 기사를 발행했다니.

“남의 핸드폰을 왜 가져가요. 뭐 하는 짓입니까?”

형사는 황급히 정서의 손에서 핸드폰을 거둬갔다.

그때였다.

입구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 견의 모습이 보였다.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함부로.”

“참고인 조사 받으러 왔습니다.”

“아직 약속한 시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중요한가? 무고한 사람을 세 시간 째 데리고 있으면 놓아줄 때가 된 것 같은데.”

견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정서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 앞에 선 형사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쯤 하시죠. 저도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요.”

“이번엔 또 어떤 조작된 증거를 들이밀려고요? 기사 읽어 보니 아다리가 딱 맞더만. 원래 치정과 돈이 가장 강력한 범행동긴데 두 개를 다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제가요?”

“예. 그리고 그 피 어디 갑니까?”

“그게 무슨…….”

“조회하면 다 나옵니다. 개천에서 난 용이더만, 당신. 온갖 잡범인 아버지 피해 신분 세탁 좀 해보려 애쓴 것 같은데. 안타깝네.”

형사는 자신이 정서보다 우위를 점유했다는 사실에 도취된 것 같았다.

하여 기어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정서의 굳은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빡.

미쳐 말릴 틈도 없이 형사의 고개가 돌아갔다.

정서가 손을 뻗어 견의 팔꿈치를 쥐었다.

“그만하세요, 본부장님.”

“입이 뚫려 있다고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김진오 형사님. 헛소리 지껄이다가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수 있거든. 입에 넣은 거 도로 아래로 질질 새게 턱주가리에 구멍 한 번 뚫어 줄까? 어때? 아주 재밌고 짜릿할 것 같은데.”

“본부장님.”

정서는 다시 한번 견을 불렀다.

주위에 있던 경찰들이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형사를 패? 그쪽도 콩밥 먹고 싶어?”

“어차피 기소도 못 할 사건에 시간 들이지 말고 다른 사건에 시간 투자하지? 그쪽이 이러는 시간에도 무고한 시민이 죽는다고.”

견은 그렇게 말하고 제 곁에 붙어선 이들을 쭉 둘러봤다.

형형한 눈빛과 날카로운 눈매가 마치 누구라도 걸리면 물어뜯을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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