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설마 죽었나?
아니겠지.
그냥 정신을 잃은 거겠지.
정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혼란스러웠다.
견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소영의 눈빛을 보고 알았다.
지금 소영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장소영 씨,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좀 해 주셔야겠는데요.”
“뭐야. 엄청 똑똑하다더니. 나 좀 실망스러운데?”
소영의 시선이 견을 향했다.
견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파티에서 만나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에 거절하지 않은 것뿐이다.
정서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다른 무엇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재미없고 시시했다.
‘왜 그렇게 다 지겹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
그런 견에게 다가온 소영은 그가 어디에 있든 불쑥 나타났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던데, 필연인 김에 우리 잘래?’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소영을 보고 견은 그냥 웃었다.
우스웠기 때문이다.
견이 매일 생각하는 그 여자는, 그런 말을 절대 뱉지 않을 여자이니까.
그런 여자를 매일 생각하는데, 그 여자의 촌스러움에 대해 곱씹고 그 묘한 촌스러움이 사실은 고고함이나 우아함이라는 것을 깨닫고 헛웃음을 짓는데.
‘나는 발기부전이야.’
누군가와 입을 맞추고 몸을 섞고.
그런 일을 하는 대신 차라리 윤정서 생각을 하지.
그렇게 생각한 견은 여느 때처럼 제 곁을 맴도는 소영을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주위로 선을 긋고 소영이 그 안을 침범하지 않도록 선의 존재를 늘 상기시켰다.
‘그렇게 큰 사람 중에 안 서는 사람은 없는데. 아직 안 꼴려 본 거 아냐?’
‘그럼 너한테도 안 꼴리는 거네.’
‘뭣도 안 보고 어떻게 알아?’
이제껏 저를 마다한 남자가 없었으니, 저를 거부하는 견이 소영의 구미를 더욱 당기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냥 적당히 놀아. 너 그런 거 잘할 것 같은데?’
‘옷을 안 벗고 어떻게 놀아?’
‘그 방법 알아 오면 어울려는 줄게.’
처음엔 그냥 그 도도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었다.
고고한 척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제껏 본 남자들은 모두 유혹에 약했다.
끝까지 안 넘어오는 남자는 없었으니, 언젠가 견도 무너질 터였다.
쉬우면 재미없지.
소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견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전부 참석했다.
때로는 먼 발치에서, 때로는 가까이서 견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어쩌다 견이 작은 호의라도 보이면 그것이 꼭 관심 같았다.
‘너 취한 것 같다?’
‘걱정하는 거야?’
‘가슴 다 보여.’
‘보라고 입은 거니까.’
‘그래도 올리지? 배우한테는 이미지가 생명이라던데?’
견은 그 무렵 소영이 회사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가 친하게 지내서 영입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러니 건넨 말이었다.
나중에라도 골칫거리를 들인 것이 아니기 위해서.
‘너 나 좋아하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소영은 거의 확신했다.
견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만 자각하지 못할 뿐이라고.
무뚝뚝한 성정 덕분에 티를 내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그러니 그녀가 견의 비서 중 하나를 협박해 그의 스케줄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못 가. 가야 할 곳이 있어.’
‘나 말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쳤다니까? 이럴 땐 그냥 두말없이 와야 하는…….’
‘죽으면 연락해. 화환은 보내 줄게.’
‘…….’
‘그전까진 연락하지 마. 챙겨야 할 사람이 있어.’
성가시다는 목소리도, 진절머리 난다는 그 말투도.
전부 소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 좋았잖아, 넌 나 좋아했잖아.
‘……쟤가 뭔데.’
갑작스럽게 변한 견은 그때부터 제 옆에 여자를 뒀다, 윤정서라는 이름의 여자를.
명문대 출신의 변호사, 악질인 사건만 맡아서 한다고 평판은 구렸고 재미없게 생긴 정장을 입고 다니는 여자였다.
민무늬 검은 구두처럼 촌스럽고 시시한 게 있을까.
소영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견은 그게 퍽 좋았나 보다.
견이 그렇게 웃고 행동하는 것을 소영은 처음 봤다.
지금껏 제게 보였던 행동에 담겼을 거라 믿었던 그 마음.
그것이 다른 사람을 향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순간 소영의 세상은 전부 무너졌다.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려야지.
그게 사랑이잖아?
미친개인 너는 이해하잖아.
“우선 구급차를 부르겠습니다.”
“……불러서 뭐라고 하게?”
차분한 목소리에 소영은 잠겨 있던 생각에서 깨어났다.
따분하고 시시하다.
어째서 저런 여자에게 자신이 밀린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럼 죽게 둘까요?”
물음의 끝이 묘하게 경직돼 있었다.
무서운 건가, 설마 죽었을까 봐?
견은 소영이 줄곧 저만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두렵거나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골치 아파서였다.
“뭐?”
“장소영 씨, 지금 스캔들로 인해 여러모로 곤란하고 불편하신 상황인 거 압니다. 사진을 찍은 기자에게 보복을 하고 싶으신 마음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나, 이렇게 행동하시는 것이 소영 씨의 배우 커리어에 도움이 되실지는 잘 모르겠네요. 우선 다른 방에 가 계시거나 이동해 계시죠. 이 방을 제 이름으로 빌렸으니, 상황이 수습되면 다시 얘기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서는 그 짧은 사이 생각을 마친 듯 막힘 없이 말했다.
실제로 구급차를 부르려는 듯 핸드폰을 찾아 꺼내기도 했다.
그것을 본 소영은 새어 나가는 분노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막고 싶지도 않았다.
그 순간,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견이 여전히 뒤에 세운 정서에게 다가갔다.
견은 가까워진 소영의 앞을 긴 팔로 가로막았다.
네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으며, 만약 그 짓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일엔 겁을 좀 먹어도 될 텐데.
정서는 저를 잡아먹을 듯 다가오는 소영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곤란한 상황이 될 수 있으니 하나만 묻겠습니다. 약물을 주입했나요? 아니면 먹였습니까. 외상은 없어요?”
“너 또라이구나?”
“물음에 대답해 주세요.”
“죽었어.”
“예?”
“죽었다고.”
“…….”
정서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견을 바라보았다.
“나가시죠.”
“이 비서한테 말해서…….”
“아뇨, 본부장님. 저는 여기 있을 겁니다. 본부장님께서 피하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견은 정서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태연하고 차분하기만 했다.
“이런 사건에 휘말려서 좋을 것 없습니다. 가뜩이나 스캔들로 어지러운 상황에 위험에 더 노출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윤정서, 너는. 너는 위험에 노출돼도 되고?”
“지금부터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겁니다. 필요하다면 접촉도 할 겁니다. 전지훈 기자에게 확인할 것이 있으니, 기왕이면 살리고 싶어요. 사람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요. 그러니 본부장님은 처음부터 여기 오지 않으신 겁니다.”
정서는 그렇게 말하고는 미처 견이 말릴 틈도 없이 두 사람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바닥에 쓰러진 전지훈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드리는가 싶더니 지체없이 고개를 숙여 숨소리를 확인했다.
잠깐 그녀는 말이 없었다.
덩달아 긴장한 견도 숨소리를 죽였다.
아무리 미쳤다지만 사람을 죽여? 그것도 고작 스캔들 기사 좀 냈다는 이유로?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영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게, 이 상황에 느닷없이 소영이 뛰어들었다는 게 계속 신경을 거슬렀다.
“……살아있네요. 숨소리가 옅지만.”
“그러게. 실망스럽네.”
“네?”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괜찮아, 뭐. 이제 시작이니까.”
“뚱딴지같은 말만 내뱉지 말고 어떻게 된 건지, 어떻게 할 건지. 하다못해 뭘 바라고 여기까지 왔는지 말을 해. 시간 낭비하는 거 딱 질색이니까.”
견은 더 기다려 주지 않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정서는 손을 들어 다시 한번 지훈의 어깨를 두드려 보곤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으니 자리를 피하세요, 본부장님. 신고하겠습니다.”
“내가 피한다고 뭐가 달라져? 어차피 장소영이랑 내가 한 호텔에 들어와 있는 것부터가 잘못된 건데. 너야말로 그 기자한테서 떨어져. 장소영이 무슨 짓을 할 줄 알…….”
한 공간에 있었으나, 소영의 존재가 묘하게 자꾸 무시됐다.
거슬리는 행동이 끊이질 않는다.
신인 시절부터 주인공 자리를 꿰차 했던 소영은 이런 것이 익숙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도 자기가 대체품이 되는 것도 전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럴 수밖에.
소영은 걸음을 옮겼다.
견의 눈이 다급히 그녀를 좇았다.
혹시나 정서에게 위협이 될까 걱정이 앞섰다.
“애틋해서 손 놓고 볼 수가 없네.”
그렇게 말한 소영이 제 품에 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조명 빛을 받아 번쩍이는 그것은 누가 보아도 날붙이였다.
재빨리 움직인 견이 미처 막기 전에 소영이 자신의 얼굴을 그었다.
뺨에 기다랗게 상처가 났다.
“지금 뭐 하시는……!”
“둘이 결혼한다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생각한 방법은 이거 하나야. 내게 모욕을 선물한 너희에게 줄 결혼 선물.”
정서가 소영을 말리려 손을 뻗었다.
소영은 그런 정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씨익 웃으며 그대로 칼을 떨어뜨렸다.
핏방울이 아래로 뚝뚝 떨어질 때, 소영은 곧장 핸드폰을 들었다.
제 얼굴을 찍는 손길엔 거침이 없었다.
정서는 서둘러 견에게 소리쳤다.
“나가세요, 본부장님!”
“뭐?”
“나가시라고요!”
도저히 말을 들을 기미가 없자, 정서는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외쳤다.
“이 비서, 1303호로 와서 본부장님 데리고 나가요. 지금 당장!”
곧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