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무언가 이상한데.
뭔가 까먹은 것 같은데.
내내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정서는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강을 건너 도시를 빠져나오자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이 창밖으로 펼쳐졌다.
색색들이 예쁜 단풍이 든 산 대신 황량하고 민둥한 산이 보였다.
“불이 났네.”
시큰둥하게 말하던 견이 그대로 손을 뻗어 정서의 어깨를 둘렀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 뒤로 언제 바짝 붙었는지.
좁은 자리가 불편하지도 않은지 자연스레 반대편 어깨에 고개를 얹더니 손가락을 들어 산꼭대기를 가리켰다.
“새다.”
“…….”
볼 텐데, 이러고 있으면 분명 수연이 볼 텐데.
그동안 견과 정서를 태우고 돌아다녔던 기사야 이런 적이 간혹 있으니 모르는 척해줄 수 있다지만, 수연은 아닐 터였다.
정서는 제 어깨에 얹어진 견의 손을 슬쩍 떼어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까치인가.”
“……까마귀입니다.”
“불은 무서워. 그렇지? 쓸고 지나가면 저렇게 황량해지잖아.”
“…….”
다시 한번 정서는 견을 밀어냈다.
슬쩍 룸미러를 올려보자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수연의 눈과 코가 보였다.
분명 무언가 들릴 텐데, 보일 텐데.
애써 외면하는 건지, 아니면 매너라고 생각해서 모르는 척해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할 때만큼은 프로다워 보이고 싶은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견의 숨결이 어깨 위로 쏟아지며 그 아래로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어렸을 때, 아주 어렸을 때 불이 난 걸 본 적이 있어.”
“본부장님께서요?”
“응. 그때 엄마라는 여자랑 어디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아, 맞다. 목욕탕. 대중목욕탕에 다녀오는 길이었어.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다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깨끗해 보여야 한다고 어찌나 때를 빡빡 밀던지.”
견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살이 쓰라리는 것 같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어린 시절 얘기는 좀체 하는 법이 없던 견이었기에 정서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아프셨습니까?”
“윤 변호사님은 그게 궁금해?”
“예? 어머님께서 당연히 힘 조절을 하셨겠지만, 어린 피부는 연약하기 마련이니까…….”
“의외로 다정한 성정인 거 알아?”
“제가요?”
정서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으며 돌아봤다.
그제야 저를 보는 말간 그녀의 얼굴에 견은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픈 충동을 간신히 내리 눌렀다.
이렇게 가깝게 붙어서 순진한 얼굴을 하면 쓰나, 겁도 없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꼴이 될 뻔한 견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정서의 뺨에 제 뺨을 기댔다.
“나는 말이야. 그때 처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무엇을요?”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이.”
“…….”
“우리 집이 지하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지. 수행원을 시켜 집이 어딘지 알아냈으면서도 설마 반지하에 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주인집에 불을 질렀더라고.”
그 말은…….
하 회장이 불을 질렀다는 뜻인가?
그 어린 아들을, 자신을 사랑해 혼자 자식을 낳아 기르던 여자를 죽이려고?
정서는 순간 전신을 돌던 피가 차게 식고 심장이 어딘가 깊숙한 곳으로 푹 꺼지는 기분을 느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돌아온 견의 주위를 맴돌았을 매캐한 연기와 눈동자 위로 일렁였을 불꽃.
아버지라는 사람이 저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을 분노와 허탈함.
끝끝내 지었을 웃음.
도리 없이 흘러나왔을 그 쓰디쓴 웃음.
어린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견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기원이 어디인 줄도 모르면서 정서는 마치 제 몸 어딘가 활활 타오르듯 뜨거워짐을 느꼈다.
“…….”
“왜 그래?”
“…….”
“윤 변호사?”
“…….”
“윤정서.”
견은 그녀가 평소와 다름을 느끼고 그제야 바짝 안고 있던 몸을 떼어냈다.
아무 말 없는 얼굴, 굳은 표정. 어쩐지 형형히 빛나는 그 눈빛.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런 얼굴이 된 거지?
내내 앞을 보고 말이 없던 수연 역시 뒷좌석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분위기에 더 참지 못하고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정서는 뒤늦게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폐허가 됐습니까?”
“응?”
“불이 났던 그곳이 폐허가 됐습니까?”
“아…… 아니. 다행히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없었고 화재 보험을 여러 개 들어놓은 덕에 주인집도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갔지. 우리만 집을 잃어서 잠깐 곤란했지만.”
정서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견을 보았다.
그런 사람에게 약점을 잡혔다는 이유만으로 견을 져버리려고 했나.
떠났다는 이유로 오래 원망했던 것 역시 어쩌면…….
어쩌면 전부 제 이기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정하기 싫었을까.
견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 지금도 사실은 견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고 시선의 끝에 늘 그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걸까.
“여기가 황량해지지는 않았습니까.”
“…….”
정서가 손을 들어 견의 가슴께에 얹었다.
견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듯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이런 표정은,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어떤 것 같은데.”
“…….”
“네가 보기에 어떤데, 나.”
견은 겨우 입을 열어 정서에게 물었다.
궁금했다.
그녀의 눈에 그가 어떻게 보이는지.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일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듯이 그저 정신 나간 미친놈처럼 보이지는 않는지.
어떤 마음은 눈에 보인다는데, 정말 제 마음도 눈에 보이는지.
그조차 확신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예뻐할 수 있다고.
“……하견, 아니. 본부장님은…….”
정서가 무어라 답하려던 찰나였다.
차가 주차장에 들어서는 것 같더니 멀리서 직원이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내리시죠. 도착했습니다.”
맥을 끊듯 수연이 끼어들었다.
견은 신경질적인 눈매가 되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요한 답을 들을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 순간에.
반면 정서는 곧장 시간을 확인하고 메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 사람을 도와 견을 해치려 했던, 해칠 수도 있었던 자신을 책망하는 것도 잠시.
지금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시죠, 본부장님. 이러다 늦겠습니다.”
“윤정서, 나 아직 대답 안 들었는데.”
“다음에요. 지금은 이것부터 해야 합니다. 이 비서님, 혹시 주변에 따라 붙은 차량이 없는지 이상한 사람은 없는지 한 번 점검만 해주세요. 혹시 위험하거나 수상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저, 호텔에 오신 건 어떤 이유에서인지 물어도 될까요? 지금 어디로 가시려는 건지.”
“이따가 돌아와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정서는 성큼성큼 호텔의 로비를 가로질렀다.
견은 그런 정서를 뒤따르며 뒤에 선 수연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수연이 그 모습을 보고 약이 오를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무언가를 기점으로 정서는 변했고, 지금 견은 변한 그녀의 모습이 신기했다.
될 수 있으면 가까이서, 세심히 지켜보고 싶었다.
“1303호 객실 키 받을 수 있을까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윤정서, 아니……. 하견입니다.”
“아, 윤정서님. 네, 예약 확인 되셨습니다.”
정서는 여기서 두 번째로 찝찝함을 느꼈다.
부른 건 견이면서 어째서 제 이름으로 방이 예약됐을까.
마치 그녀가 언제라도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윤정서 이름으로 예약된 거 맞아요?”
그리고 같은 것을 견도 느꼈다.
견의 물음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의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서 묵으실 건가요?”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서는 일단 맞다고 대답한 뒤 건네주는 카드키를 받았다.
엘리베이터로 향해 13층의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놓친 게 무엇인지 다시 되짚었다.
“아, 연락.”
그제야 정서는 기사를 봤을 하 회장이 여전히 저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이래서 내가 너를 어떻게 믿느냐.
닦달하기에도 바쁠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조용하다니?
“응?”
“아닙니다. 일단 타시죠.”
시간이 벌써 열두 시 오십팔 분이었다.
로비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른 정서는 어쩌면 견의 말처럼 하 회장과 전지훈이 미리 연락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렇다면 구태여 왜 자신을 여기로 부른 걸까.
견은 또 왜?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기사로 전지훈에게 덫을 놓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전지훈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 십삼 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작게 심호흡을 하는 정서를 보던 견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쥐었다.
정서가 돌아보자 괜찮다는 듯 견이 웃었다.
“겁먹지 마, 윤정서.”
“…….”
“너는 이미 그곳을 떠나왔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일은 없어.”
“…….”
“그러니 무엇도 네가 두려울 것은 없어. 너는 네 힘으로 거기를 떠났으니까. 그런 네가 못 할 것이란 건 아무것도 없지.”
울컥.
아까부터 내내 뜨겁게 펄떡이고 있던 심장이 피를 뿜어내는 느낌이 생생했다.
정서가 답하지 못하는 사이 견은 정서를 끌고 곧장 1303호로 향했다.
카드키를 꽂자 문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렸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단내가 진동했다.
머리까지 아픈 그 냄새에 얼굴을 찌푸린 두 사람 앞에 등장한 것은.
“…….”
“늦었어요, 이 분 정도.”
장소영이었다.
발치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전지훈을 둔, 장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