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85)

34.

“그럼 같이 가죠.”

견은 단조롭게 답을 내려놓았다.

수연은 기분이 상했다.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니면서 벌써부터 이런 일에 관여하다니.

좋게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의 동행 여부를 정서에게 허락받는 견의 마음을 알기 어려웠다.

이전에 견은 수연에게 그랬다.

정서를 괴롭히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그때 수연은 확신했었다.

아, 정서는 장난감이구나.

마음 붙일 곳 없는 안하무인 재벌집 도련님의 고상한 취미생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구나.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수연의 눈에 들어온 정서는 특별할 것이 없는 여자였다.

몸에 걸친 것 중 크게 비싸 보이는 것이 없었고 그 흔한 향수 하나 뿌리고 다니지 않았다.

스타킹 역시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는 흔한 것, 머리 스타일은 단발을 조금 넘는 생머리.

봐줄 만 한 것은 그나마 옴싹하고 귀염성 있게 생긴 얼굴이었는데 그나마도 늘 싸우는 듯한 태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듯했다.

상대도 되지 않는다.

수연의 눈에는 딱 그랬다.

워낙 예쁘고 잘난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니 견이 심심했던 모양이라고.

그런데 왜 기분이 이상할까.

견과 정서 사이에 있으면 자신은 늘 불청객이 된 것만 같다.

그 느낌이 아주…….

“안 갑니까?”

생각에 잠긴 수연을 깨운 것은 견의 목소리였다.

수연은 견의 물음에 생각을 지워내고 외투를 챙겨 들었다.

“갑니다, 본부장님.”

수연은 빠른 걸음으로 견의 곁으로 붙었다.

미리 나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둔 정서는 견과 수연이 제 뒤로 서는 것을 느꼈다.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자연스레 두 사람 뒤에 서는 모양새가 됐다.

“……괜찮으세요?”

“…….”

수연이 조심스레 견에게 물었다.

견은 아무런 말이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가 돌연 입을 열었다.

“이 비서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예?”

“방금 막 동료들에게 결혼을 발표한 여자가 남편의 스캔들을 목격하게 된다면 말입니다.”

“…….”

정서는 견의 말에 놀라 고개를 들어 견을 보았다.

언뜻 드러난 옆얼굴은 견고했다.

장난스러운 기색이 묻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로 고심하고 있다는 듯 제법 진지한 얼굴인 것 같기도 했다.

다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걸 왜 하필이면 수연에게 묻는지.

수연을 도발하고자 함인지, 정서를 놀리고자 함인지.

“스캔들의 진위여부에 따라 다르겠죠.”

“헤프게 군 남자는 남자로서 매력이 없습니까?”

정면을 보고 있던 견이 고개를 돌려 수연을 마주했다.

잘 벼른 칼날처럼, 잘 빚은 조각상처럼 매끄럽게 이어지는 턱선이 꼭 그림 같았다.

어딘가 애처로운 듯하면서도 여유가 있어 보이는 그 모순적인 얼굴이.

수연뿐 아니라 정서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제법 우스운 일이었다.

지금 건네고 있는 질문이 헤프게 군 그의 과거에 대한 것임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건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능력?”

“예. 여자들은 아무 남자나 따르지 않으니까요. 본부장님께서 남자로서 매력을 가졌으니 많은 여성분들이 따른 게 아닐까요?”

“…….”

수연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견은 수연의 대답을 곰곰이 곱씹는 것 같더니 정서를 돌아보았다.

“윤 변호사님 생각도 그렇습니까?”

“…….”

정서는 선뜻 답하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그 찰나에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달했다.

내려야 하는데. 지금 이런 질문 따위를 골몰할 때가 아닌데.

게다가 견이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닌 것은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왜 굳이 이제 와서 제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둘이 진심으로 서로를 깊이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둘의 결혼은 어디까지나…….

“시시해.”

견이 작게 중얼거렸다.

정서의 사고가 순간 마비됐다.

그에게 시시한 여자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수연처럼 초연하게 반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렇게 저를 작고 볼품없게 만들 줄은 몰랐다.

“가죠.”

견은 훌쩍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뒤를 수연이 따랐다.

그러고 보니 둘은 오늘 옷 차림새가 비슷했다.

아마 같은 브랜드의 옷일 것이다.

정서가 어쩌다 옷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을 때 보지도 않고 지나쳤던, 그런 명품 브랜드의 옷일 터였다.

만약 자신을 만나기 전에 수연이 나타났다면, 그리고 그런 수연을 하 회장이 봤다면.

어쩌면 자신이 아닌 수연이 지금 제 역할을 하고 있었을까?

의미 없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정서는 잠시 생각했다.

“안 오고 뭐 합니까.”

저의 부재를 눈치챈 견이 돌아봐 저를 부를 때까지.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들의 뒤를 따를 때까지.

&

차 안에 어쩐지 조금은 냉랭하고 경직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전지훈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수연에게 커피를 사 올 것을 부탁한 견은 제 옆에 앉은 정서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신경해 보이는 얼굴은 정서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런데 지금은 느낌이 좀 달랐다.

눈꼬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처지고 입매가 조금 굳은 것이 서운한 것 같기도, 삐친 것 같기도 했다.

새삼스럽게 질투라도 한 걸까, 수연에게?

아니면 그의 말 중에 서운한 말이라도 있었을까.

견의 시선이 제 뺨을 달구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정서의 완고함을 보면 확실히 마음이 상한 것 같긴 했다.

“전지훈 기자에 대해 안 묻습니까, 윤 변호사님?”

“……말씀하시길 기다렸습니다.”

“평소라면 빨리 말하라 재촉하고 닦달했을 텐데. 열의가 꺾였나? 이런 말썽쟁이 상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나.”

“아닙니다. 그래서 전지훈 기자에게 연락은 왔습니까?”

“왔어. 그런데 좀 독특한 방식으로 연락했더라고.”

“설마 그 봉투?”

“예리하네.”

견은 양복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꼬깃꼬깃 접힌 사진 하나를 내밀었다.

정서가 그것을 받아들어 펼치자 그 안에는 깨진 유리창 안으로 견과 정서가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건…….”

“그 쥐새끼 같은 놈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던 걸 몰랐던 거지. 어쩌면 기사 정보를 미리 흘린 것도 그 새끼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서 전지훈 기자가 얻는 게 없습니다.”

“애초에 우릴 속인 거면?”

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정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견이 손을 뻗어 그런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손길에 당황한 그녀의 몸이 조금 굳자, 그가 고개를 숙여 눈을 맞췄다.

“왜 이래, 윤정서?”

“네?”

“하 회장의 말을 믿어?”

“……지금 전지훈 기자가 하 회장의 사주를 받고 이렇게 움직인 것이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 잠깐 사이 견의 의도를 파악한 정서가 물었다.

역시 머리가 좋다니까, 윤정서는.

속으로 만족스러운 감탄을 한 견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전지훈 기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한 것은 하 회장님이십니다. 자신이 연락을 취할 수 있다면 구태여 우리에게 전지훈 기자의 존재를 노출하고 더 나아가 찾아달라는 말을 전할 리 없습니다.”

“맞아. 그런데 하 회장이 바라는 게 그게 아니면?”

“예?”

“사진을 뒤집어 봐.”

정서는 사진을 천천히 뒤집었다.

하얀 뒷면에 날아가는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오후 1시, 로열블러드 호텔 1303호」

오후 1시면…….

아직 여유 시간이 있었으나, 로열블러드 호텔은 서울이 아닌 도심 외곽에 위치한 고급 호텔이었다.

“정말 하 회장이 찾지 못해서 너에게 부탁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돈 같은 걸 요구하는 편이 간단하고 쉽겠지. 전지훈은 그저 기자일 뿐이야. 아무리 사회부라고 해도 백영씩이나 되는 기업과 싸워 봤자 자신에게 득될 것이 없다는 손익 계산 정도는 쉽게 할 사람이겠지.”

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정서도 지훈이 기껏해야 스캔들을 묻어 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일이 틀어진 지금 나타난 지훈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망나니 재벌집 아들이라 소문난 견에게 사죄하여 목숨을 지키는 것.

혹은, 다른 협상 카드를 내미는 것.

어느 쪽이든 그들을 굳이 그 호텔까지 불러낼 이유는 없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면.

“아니면…… 하 회장님의 눈을 피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그 영감의 눈을? 왜.”

“하 회장님께서 전지훈 기자를 찾으려는 건 전지훈 기자가 무언가를 알기 때문이었어요. 아마도 세간에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난처한 정보겠죠. 그걸 막기 위해서 저를 동원했고 전지훈 기자와 마지막으로 접촉한 사람이 본부장님인 것을 더욱 신경 쓰신 것일지도 몰라요.”

두 추론 다 가능성이 있었다.

견은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정서는 이 순간에도 제 뺨에 얹어진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어 내렸다.

차 밖에서는 기사가 대기 중이었고, 곧 수연도 돌아올 터였다.

그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는 수밖에 없네.”

“지금 출발하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습니다.”

때맞춰 돌아온 수연이 창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견은 짧게 출발하자는 말을 건넸다.

견과 자신, 기사의 몫으로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 수연은 정서에게 차가운 커피를 건넸다.

정서는 그것을 받아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정서는 찬 음료만 마셨으나 그 습관을 수연이 알 리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로열블러드 호텔로 가지,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견의 말을 끝으로 차 안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