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85)

33.

어떻게, 아니 어째서.

어째서 장소영의 스캔들에 견의 이야기가 포함된 것일까.

기사를 찬찬히 훑던 정서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배우 장소영은 전에 했던 드라마 제작사 대표의 소개로 하모 씨를 만나게 되었다. 둘의 사랑은 짧고 깊었다. 정재계 VIP 인사들이 다닌다는 프라이빗 전시회를 시작으로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에서 목격되었던 이들은 지인의 말에 따르면 장소영이 새로운 하모 씨의 기획사에서 제작하는 새 드라마에 캐스팅되면서 사이가 요원해졌다고 한다. 먼저 이별을 고한 것은 하모 씨로 장소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모 씨가 드라마 제작 지원차 현장을 방문했을 때 사랑을 고백하며 매달렸다고 한다. 사진은 그 모습을 담고 있다.」

요새는 별 기사가 다 나온다더니.

상세해도 너무 상세했다.

아무리 장소영이 톱배우라지만 이런 일상까지 공개되는 것은 이상했다.

더불어 견에 관한 이야기도 지나치게 많이 노출돼 있었다.

지이이잉.

곧장 울리는 핸드폰에 뜬 이름은 박 팀장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기사를 보고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 전화한 것이겠지.

정서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통화를 연결했다.

“네, 박 팀장님. 지금 내려가는 중입니다.”

―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지금 확인 전화가 빗발치는데 혹시 답변은 어떻게 나가는 게 좋을까요?

“장소영 측에서는 아직 연락온 거 없었나요?”

― 예. 대신 사실 무근이라는 답을 했다고 방금 떴습니다.

“저희 쪽도 입장은 동일하게 가죠. 명예 훼손 소송도 고려 중이라 덧붙여 주세요.”

― 알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도로 내려간 정서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핸드폰을 들어 어느새 외워버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꽤 길었다.

은호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기사를 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사를 보고 먼저 연락을 해왔을 것이다.

너무 쉽게 은호를 믿어 버린 것이 잘못이었을까.

은호는 따지고 보면 견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어제 전화를 했을 때만 해도, 자신이 해결했다고 전할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 일이 꼭 잘 풀린 것만 같았는데.

엘리베이터가 본부장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였을 때야 비로소 기나긴 신호음이 끊겼다.

정서는 곧장 핸드폰을 귀에 바싹대고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 어디예요.

“회사야. 어떻게 된 일이냐고.”

― 나와요. 만나서 얘기해요.

“나 지금 못 나가. 수습해야 해. 그러니까 최대한 간단하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 기자가 약속대로 기사를 쓰지 않았어요. 확인해 보니 기사를 쓴 것도 제가 접촉한 기자가 아니에요.

“뭐?”

― 같은 회사의 선배 기자가 쓴 모양인데 어떤 경위로 그 사람이 쓰게 됐는지까지는 아직 파악 못 했어요. 다시 연락해 보든가, 찾아가 볼게요.

“…….”

정서는 혼란스러웠다.

은호는 자신이 벌인 일이 아니라고 하고 있었다.

그럼 단순히 그 기자 하나가 후배가 낼 기사를 미리 파악해 작성하게 됐던 걸까?

아니, 이 정도의 기사 크기면 분명 윗선까지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백영과 척을 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견이 특정될만한 기사를 쓸 이유가 없었다.

믿어야 할까?

여기서 더 추궁해야 할까.

너를 믿은 게 잘못이었다고, 다시는 너를 믿지 않겠다고 잘라내야 할까.

알 수 없었다.

“……그럼 왜 나한테 만나자고 했어?”

― 네?

“내가 바쁠 거 알았을 텐데, 왜 만나자고 했어?”

그런 정서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뜻밖의 말이었다.

정서는 무언가를 확인해야겠다는 듯 복도 끝에 위치한 창문 앞에 섰다.

창밖은 이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맑기만 했다.

― ……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거기 있는 게 싫었어요.

“내가 하견 사람인 거 알잖아.”

― 알아요. 아는데 그래도 싫어요. 어젯밤에 같이 있었죠.

“응.”

― 그거 때문에 내가 기사 터뜨렸을 거란 생각은 안 해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한 발 물러선 보람도 없이 은호는 곧장 핵심을 찔렀다.

정서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안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그녀의 귀를 잡아챘다.

아마 조금 지나면 하 회장의 불호령도 함께 떨어질 터였다.

“안 해.”

― 왜 안 해요. 내가 그만큼의 임팩트도 없나, 당신한테.

“아니. 네가 나한테 그렇게 행동할 이유가 없으니까.”

―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내가 그 사람과 밤을 보냈건 안 보냈건, 그게 너한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야. 차은호, 잘 들어. 너는 나랑 거래를 하는 거야. 네가 나를 도와주면 나도 너를 도와주는 거라고. 거기에 다른 의미는…….”

―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은호는 빠르게 말을 뱉어내는 정서를 막았다, 마치 그다음 이어질 말을 듣기 싫은 듯이.

그러나 그런 내막까지 파악하기에 정서는 여유가 좀 없었다.

그저 갑자기 왜 은호가 이렇게 고분고분해졌는지 조금 의아할 뿐이었다.

― 일 해결하고 만나요. 우선 알아보러 갈게요. 뭐라도 알아내면 연락할 테니까, 이번에는 연락 잘 받아요.

“……알았어.”

― 혹시 또 하 회장이 불러내서 괴롭히면…….

그때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수연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나간 지 꽤 된 것 같았는데.

정말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갑작스러운 견의 결혼 소식에 놀란 마음을 추스르러 나갔다가 기사가 난 것을 확인하고 급하게 돌아오는 길이었을까.

“!”

수연은 제 앞에 선 정서를 보고 조금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동요도 잠시, 곧 평소의 얼굴을 되찾은 수연이 본부장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운 기색이 없어서 정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땐 뭐. 네가 어떻게 하게.”

― 와서 욕이나 하라고요. 들어 주는 건 잘하니까.

“됐으니까 몸조심하고 뭐라도 알게 되면 연락해. 아, 그리고…….”

― 전지훈 움직이는 것 같으면 그것도 연락할게요.

“응. 고마워.”

정서는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든 손을 내리고 심호흡을 한 뒤 본부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저의 실패를 눈치챈 견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쉽게 은호를 믿었다고 책망할까.

이런 순간에 하 회장보다 견이 신경 쓰이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서는 속이 상했다.

조금만 더 철저했다면, 그 기자에게 제가 연락을 취했다면.

견의 기사가 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오셨어요.”

박 팀장이 그녀를 맞이했다.

연거푸 울리는 전화기에 지친 모양인지 고작 십오 분 남짓한 시간 사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수연 역시 자기 자리를 찾아 전화를 응대하고 있었다.

아까의 당혹스러움은 사라지고 프로답게 집중한 모습이었다.

“반박 기사 낼게요.”

“예. 안 그래도 홍보팀 인력 불렀습니다.”

“우선 장소영 캐스팅은 처음부터 아니었던 겁니다. 지금 주연 물망에 오른 배우 분 누구였죠?”

“김보람 씨와 유혜미 씨입니다.”

“두 분 다 좋네요. 이미지도 좋고 드라마도 잘 어울리니까. 아직 캐스팅 확실히 하기 전이면, 뉘앙스만 풍겨 주세요. 두 분껜 죄송하지만, 저희부터 살아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소속 아이돌 중 제이든 있었죠?”

“맞습니다.”

“계약 기간 얼마나 남았죠? 얼마 남지 않은 걸로 아는데.”

“삼 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어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사고 자주 쳤었죠? 같은 그룹 멤버도 폭행하고 클럽 목격담 매일 같이 뜨고.”

“맞습니다.”

“그 친구 기사 내보냅시다. 우린 할 도리 다 했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짝, 짝, 짝.

바쁘게 머리를 굴리며 말을 잇는 정서의 귓전에 박수 소리가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나갈 채비를 마친 듯 외투를 걸친 견의 모습이 보였다.

“훌륭하네. 이런 일 처리하는 건 역시 윤 변호사뿐이야.”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이렇게 기사가 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알았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알고도 내보냈으면, 그건 배신이잖아.”

배신.

견은 그렇게 말하면서 정서와 눈을 맞췄다.

설마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은호와 자신이 짜고 이런 짓을 벌였으리라 믿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불안했다.

“갑시다.”

“예? 어디를…….”

“덫을 놨으면 잡힌 사냥감을 확인해야지.”

설마, 전지훈이?

동요하듯 흔들리는 정서의 눈빛에 견이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였다.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아채는 그의 모습에 비서진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지금 가시는 겁니까?”

“여기 있어 봤자 기자나 달라붙지. 안 그래요? 윤 변호사가 말한 대로 잘 처리해 두고 계세요.”

“본부장님, 오늘 일정은 소화 안 하시는 건가요?”

수연이 물었다.

이 상황에서 시사회에 갈 거라고 생각해서 물은 것은 아닐 텐데.

예상을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이 비서.”

“예, 본부장님. 혹시 일정 외의 부분을 소화하시는 거라면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같이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비서가요? 스캔들이 터진 날 곧장 사람들 앞에 세우려고 했던, 그 이 비서가요?”

견은 수연을 응시했다.

자신을 보는 빤한 시선에도 지지 않듯 눈을 맞춘 수연이 몸을 일으켰다.

“네. 제가 맡은 업무는 본부장님의 일정 보조입니다. 비단 정해진 일정 뿐만이 아니더라도, 수행하시는 일정이 있으면 도와야 하는 게 비서의 의무고요. 특히나 오늘 같은 날에는 수행원과 함께 안전히 움직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정서는 저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느꼈다.

견이 이제는 정서를 보고 있었다.

자연히 수연의 시선도 정서를 향했다.

동의를 구하는 건가.

지훈과 원활히 만나기 위해선 수연이 따르지 않는 편이 좋았지만, 이미 계획이 틀어진 지금, 다른 돌발 변수가 나타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면 차라리 그편이 나을까.

“…….”

정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견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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