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입맞춤은 무슨……!”
“부드러운 손길로 깨워 주는 것도 좋긴 한데, 좀 아쉬운 느낌이라.”
“눈 뜨셨으면 몸 일으키시죠. 출근하셔야 합니다.”
“몇 시야?”
“……여섯 시 반입니다.”
“평소보다 더 늦게 깼네. 네가 옆에 있어서 그런가?”
견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가 잠기운을 털어내듯 머리를 쓸어올렸다.
은은히 흐르는 나른한 기운에 정서는 저도 모르게 잠시 홀린 듯 그 모습을 지켜보다 정신을 차렸다.
“피곤한 얼굴이네. 잠을 설쳤어?”
“그냥 꿈이 좀…….”
“악몽?”
그걸 악몽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건 그냥 과거의 재연일 뿐이었다.
꿈을 탓할 수는 없었다.
“아뇨, 그냥…….”
“하긴. 나 같은 남자를 두고 편히 잠을 자는 것도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 씻기 힘들면 씻겨 줄까?”
“사양하겠습니다.”
정서가 괜찮은지 기민하게 살피면서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견이 가볍게 말했다.
그의 말에 경악하듯 멀어진 정서는 손님방 욕실로 향했다.
씻고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가 그쳤다.
“같이 출근하니까 부부 같다, 그렇지?”
“오늘 아침에 기사 난다는 사실 기억하고 계시죠.”
“알아. 근데 난 법보다 빠른 주먹을 믿는 편이라, 그냥 찾아가서 처리하면 안 될까?”
“예. 안 됩니다.”
정서는 자신을 회사 근처에서 내려 달라 주장했으나, 견은 허락하지 않았다.
부득불 회사 주차장까지 들어와 차를 세우더니 조수석 문을 친히 열어 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인사하러 나온 경비 아저씨가 당황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침에 같이 오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눈치챈 것 같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예. 별일 없었죠?”
“없었습니다.”
“그래요. 수고하세요.”
인사성 좋게 인사하는 견을 따라 정서도 고개를 숙였다.
임원들만 사용하는 층은 아직 한산했다.
“다들 게을러터졌네. 이참에 다 자르던가 해야지. 아이돌 제작한다던 제작 1팀 이사 말이야, 걔 특히 마음에 안 들어.”
“회사입니다.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런 얘기는 들어가서 하시죠.”
“그래?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내 회사니까.”
“아직 대표님 따로 계시지 않습니까.”
“바지 대표잖아. 나한테 고마워하고 있을걸?”
정서는 이번엔 대꾸 없이 가만히 견을 바라보기만 했다.
견은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휘적휘적 오르며 어깨를 으쓱했다.
본부장실이 위치한 층의 버튼을 누른 그를 보며 정서가 자연히 두 층 아래 버튼을 눌렀다.
“어디 가게?”
“법무팀이요. 출근해야죠.”
“날 그냥 둬도 되겠어?”
“그냥 둬도 되냐뇨. 그게 무슨…….”
“내가 당장 찾아가서 신경호 처리할 수도 있잖아.”
정서는 견과 눈을 맞췄다.
그러지 말란 경고의 눈빛이었지만 견은 아랑곳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슬쩍 쓸었다.
붉게 난 생채기는 하루 만에 아물 리 없었다.
“지금도 난 네 얼굴만 보면 화가 나는데. 흠 하나 없는 얼굴에 이게 무슨 짓인지.”
“다른 일로 화를 내셔야죠. 아무리 배우와 본부장님께서 그런 사이라고 해도 사적으로 그렇게 행동해선 안 됩니다.”
“그건 내가 할 말이 없는데. 평소에도 사적 복수를 일삼던 사람이라.”
“…….”
“너 지금 업보라고 생각하는 중이야?”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겠네요.”
요새 견이 얌전히 지내기는 했지만, 평소의 행실을 생각해보면 신경호 탓만 하는 건 불합리하긴 했다.
얼굴을 찡그린 견이 정서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툭 쳤다.
“뭐 하시는 겁니까.”
“삐쳤어, 나. 풀어 줘.”
“뭘 잘하셨다고요.”
“그래. 잘한 건 없네. 나 때문에 네가 다쳤다고 생각하면 무력하고 싫어져서, 괜히 그렇게 말했어.”
견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가련한 얼굴이 된 견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해진 정서가 무어라 덧붙이려는 때에 문이 열렸다.
“……내릴 거야?”
“본부장실로 가시는 것 보고 내려가겠습니다.”
“좋은 생각.”
결국 정서는 져주기로 했다.
어제 놀란 것이 그녀뿐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같은 층에서 내려 들어서자 일찍 출근한 비서진의 모습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일제히 일어나 인사하는 비서들을 보며 견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나 때문인가? 이렇게 다들 일찍부터 나와서 분주한 거.”
그렇게 물으면 어느 누가 상사에게 맞다고 할까.
아니나 다를까 박 팀장이 곧장 아니라는 답을 늘어놓았다.
자료와 일정을 정리하고 있던 수연의 시선은 아까부터 내내 정서를 향해 있었다.
그녀를 샅샅이 훑는 듯한 눈빛에 정서는 조금 곤란했다.
무언가 알아내려는 것 같은 예리한 눈빛이었고 정말로 뭐를 알아낼 것만 같았다.
“아니라면 다행인데, 오늘 일정이 많던가?”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 배우분들이 본사 건물에서 대본 리딩 있을 예정입니다. 격려차 방문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과거> 시사회가 저녁에 있으니 참석 부탁드립니다.”
“거기 게스트 명단 공유해 줄 수 있습니까.”
“예. 바로 공유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윤 변호사님은 제 방으로 오시죠.”
“잠시만요, 본부장님.”
본부장실로 들어가려는 견과 정서를 불러 세운 것은 수연이었다.
수연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견에게 내밀었다.
“이거 본부장님 앞으로 도착했는데 보내는 이 부분이 비어 있어서. 좀 걱정이 돼서요. ”
“그렇습니까? 직접 확인할 테니 걱정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혹시 위험하거나 잔인한 게 들어있으면…….”
수연이 울상을 지어 보였다.
견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단순히 상사를 걱정하는 부하 직원의 모습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정서는 숨을 죽였다.
괜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눈치를 보게 되는 건 역시 수연이 주는 어떤 압박감 때문일까.
“그럼 더욱 이 비서가 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네?”
“나 때문에 다치면 곤란하잖아.”
견의 말에 순식간에 수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서의 마음 역시 조금은 불편해졌다.
물론 곤란하겠지, 곤란한 건 아는데.
그게 뉘앙스가…….
“나 때문에 다친 여자가 있어서, 그 여자 인생 책임져야 하거든.”
“…….”
견이 던진 말에 정적이 흘렀다.
수연의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정서의 뺨에 가닿았다.
아까부터 다친 것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아, 맞다. 박 팀장님. 우리 경조사 휴가 말입니다.”
“예, 본부장님.”
“결혼하면 휴가가 며칠 나오죠?”
“일주일 정도 나옵니다.”
“일주일 가지고 되나……. 그래도 신혼여행은 발리 정도는 가줘야 하는데 오고가는 시간에 사랑도 나눠야 하고, 관광지도 들려야 하고. 주변에 돌릴 선물까지 산다고 하면 부족하지 않나?”
“그게 인사팀에서 정한 거라……. 시정 의뢰를 해 보겠습니다.”
“예. 아무래도 이 주 정도는 가야 할 것 같아서. 안 그래요, 윤 변호사님?”
“이 주는 무리…… 예?”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정서의 눈이 경악으로 번쩍 뜨였다.
동요한 것은 정서뿐이 아니었다.
비서실에 있는 견을 제외한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박 팀장이 겨우 입을 열었다.
“윤 변호사님께서 결혼을 하시나요?”
“예. 결혼합니다.”
“설마 상대가…….”
“예. 접니다.”
“……축하드립니다.”
어쨌거나 축하할 일이었다.
결혼이 믿기든, 믿기지 않든.
상사가 결혼 소식을 전할 때 부하 직원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털썩.
수연의 손에 들려 있던 봉투가 아래로 떨어졌다.
발치에 떨어진 봉투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수연에게 다가간 견이 친절히 봉투를 주웠다.
“다음 달로 예정돼 있으니 구체적인 날짜 나오면 공유하겠습니다. 일정은 비워둬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휴가는 일주일이면 될 것 같네요. 윤 변호사님은 일하는 거 미뤄두고 자리 비우는 거 싫어할 만한 사람이라.”
“…….”
“예, 알겠습니다.”
정서는 저를 보며 씩 웃는 견을 보고 마주 웃지 못했다.
&
무슨 정신으로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다.
수연은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비웠고 견은 명단을 받아 정서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조금이라도 껄끄러울 여지가 있는 사람이 있는지, 있다면 대충 몇 시쯤 도착할 것 같은지 확인해달란 요지였는데.
정서는 태연한 그의 얼굴에 대고 묻고 싶었다.
‘네가 누굴 만났는지, 누굴 만나 뭘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그렇게 묻지 않은 것은 이미 전의가 한 풀 꺾여서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봤다.
어디서 소문이 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비서들만 그곳에 있었으니, 비서 중에 하나일 터였는데.
대체 누가?
지금까지 새어나간 비밀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다 소문이 났다고 할지라도 그건 숨기기 어려울 정도로 큰 스케일의 잘못이었거나, 견에게 당한 상대방이 앙갚음으로 먼저 터뜨린 경우라서 비서의 가벼운 입 탓을 하긴 곤란했다.
그럼 수연인가?
하지만 수연이 왜.
수연이야말로 그런 소문이 나는 걸 가장 피하고 싶었을 텐데.
정서는 자신을 자꾸 힐끔대며 수군거리는 법무팀 사람 때문에 자료를 챙겨 사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 층에 있는 카페에 가기도 그렇고, 휴식 공간에서 일을 하기도 그렇고.
결국 숨을 곳은 거기뿐인가.
옥상.
엘리베이터로 향한 그녀가 꼭대기층의 버튼을 누르고 긴 한숨을 내뱉을 때였다.
몇 층 오르지 않고 멈춰 선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올라탔다.
모자를 눌러 쓰고 피곤해 보이는 것이 제작부인 것 같았다.
따로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을 보니 옥상에 가는구나.
흡연자인가.
같이 있으면 불편한데.
무심코 생각하던 정서가 울리는 핸드폰에 고개를 들었다.
기사가 떴구나.
정서는 핸드폰에 온 알림을 확인했다.
「[단독] 배우 장소영, 모 엔터테인먼트 본부장 하모 씨와 열애 중?」
애틋해 보이는 사진 속 남성은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지만, 누가 보아도 하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