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정서의 유년 시절에선 쿰쿰한 소주 냄새가 났다.
그냥 소주 냄새라면 나았을 텐데, 술에 취한 사람에게서 나는 특유의 악취가 정서는 넌더리가 날 정도로 싫었다.
술에 취하면 높아지던 언성과 발치를 굴러다니는 술병들, 이따금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던 손길.
‘되먹지도 못한 인간 주제에 어디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애한테 손찌검을 해!’
할머니의 호령에도 말을 듣지 않던 그 남자는 범죄자였다.
옆집 밥상에 숟가락이 몇 개 올라가는지까지 다 알 수 있는 작은 마을.
그 마을에서 도둑질을 하고 사기를 쳤던 그 남자는 영원의 골칫거리였다.
그런 사람의 딸로 사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 정서의 또래 애들은 알 수 없었다.
외톨이로 사는 건 익숙했다.
그러나 우습게 보이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당하고 살지 않기 위해 싸우는 건 삶이 됐다.
눈을 순하게 뜨는 법도, 친절한 말을 건네는 법도 정서는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할머니가 있을 땐 좋았는데.
항암이라도 한번 받아 보겠느냐는 의사의 말에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털어서라도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던 정서는 아버지가 제 통장을 훔쳐간 것을 알고 절망했다.
그 나이엔 부모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렇게 살 거면 그냥 죽어요. 차라리 보조금이라도 타게. 죽으라고요. 네?’
악다구니 쓰는 정서는 그날 맞다가 의식을 잃었다.
할머니는 일주일 뒤에 돌아가셨다.
그 정도 중병이면 항암 치료를 해봤자 의미 없었을 거라는 말을 위로랍시고 늘어놓는 동네 어른에게 소복을 입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서가 어리고 힘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고작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자식의 돈을 아무렇게나 가져갈 수 있다는 것도 문제였고.
때릴 때마다 맞아야 하는 것도 문제였으며, 이런 상황을 헤쳐나갈 힘이 어린애에겐 도저히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니까 그날, 그 여름.
견을 만나고 보내던 그 늦여름에 정서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정서의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아 갈 수 있는 대학이 다행히도 서울에 있었으니 수능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지긋지긋한 영원을 떠날 것이라고.
해방이다, 완전히.
이름도 바꾸고 필요하다면 얼굴도 바꿀 것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찾지 못하게.
‘네가 나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줬지?’
그랬던 그녀가 마주한 것은 결국 또 그 남자였다.
형사가 찾아와 그 남자의 행방을 묻기에 정서는 망설임 없이 제 아버지가 있을 만한 곳을 줄줄 읊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얼마나 오래 감방에 있을지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공부할 수만 있다면, 다시 그 인간을 안 볼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
‘너는 네가 나 없이 잘 살 수 있을 줄 알지? 딸X이라고 하나 있는 게 아빠를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서 감방에 처넣어?’
‘삼시 세끼 따박따박 따뜻한 밥, 여기서 못 드시잖아요. 거기서라도 드시라는 건데 문제 있어요?’
거칠게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이 싫었다.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씨도 잊을만하면 나타나 삶을 뒤흔드는 것도 죄다 싫었다.
무시하고 집을 빠져나가려 하자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가방을 거칠게 잡아챘다.
헤진 가방의 실밥이 뜯기며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쏟아졌다.
그 바람에 내일 통장에 입금할 예정이었던 봉투에 담아 둔 원서접수비도, 수시 접수 희망 대학이 적힌 진로 상담서도 전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본능적으로 봉투를 향하던 손이 옆으로 향했다.
‘대한대? 이거 서울에 있는 대학 아니야?’
‘…….’
‘꼴에 법학과를 가겠다고. 이거 다 서울에 있는 대학이지?’
‘…….’
‘그래. 개천에서 나는 용, 그거 해 보고 싶을 수도 있겠지. 근데 그거 아냐? 너는 그래 봤자 윤정서야. 윤희창 딸 윤정서.’
원서접수비야 어떻게든 구하면 됐다.
하지만 어떤 대학에 진학할지 들키는 것은 정서의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들켰단 사실이 믿기지도 않았다.
불길한 징조를 감지한 듯 하늘에선 돌연 그쳤던 비가 다시 퍼붓기 시작했다.
정서는 그대로 제 앞에 선 남자를 밀쳤다.
이 징글징글한 남자가 영원을 벗어난 곳까지 저를 따라올 것이라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히고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거칠게 쥐어낸 봉투와 진로상담서를 품에 넣고서 그대로 밖을 빠져나와 한참을 달렸다.
‘야, 윤정서! 이 XXX이. 아빠한테 버릇없이!’
그런 정서의 뒤를 남자가 따르기 시작했다.
어깨와 머리가 순식간에 젖어 들고 온몸이 차게 식었다.
그런데도 숨은 뜨거웠다.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망갈 수 있어야만 했는데.
‘윤정서.’
그때 왜 환청처럼 견의 목소리가 들렸을까.
빗속을 걸을 때 정서는 분명 견의 목소리를 들었다.
‘윤정서는 영원을 떠난다.’
‘…….’
‘떠나서 자유롭게 산다.’
언젠가 견이 건넨 말이었다.
혼자 남아 공부하던 정서를 지켜보던 그가 농구공을 던졌다받으며 뜬금없이 던진 말이라 정서는 그 말을 새기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그 말이 생각날 건 왜일까.
견의 말은 정서를 멈춰 세웠다.
다리에 이르자, 아래로 넘실대는 강물이 보였다.
며칠 동안 내내 내린 비 때문인지 제법 물이 차 있었다.
‘아버지가 계속 부르는데 듣는 시늉도 않고 그냥 가? 너 아주 애비가 우습지?’
‘…….’
정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빗줄기가 거세어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하필이면 바람마저 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바람이 다시금 세차게 불자, 남자가 선 길가의 난간이 휘청이는 것이 보였다.
며칠 전에 누군가 난간에 기대었다가 빠질 뻔했다고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대로 밀어 버리면, 그러면 물에 빠질까.
술에 취했으니까, 술에 취한 사람은 실수하기 마련이니까.
발을 헛디뎌 빠졌다고 하면 모두 믿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충동이 일었다.
벗어나고 싶어.
더 나아지고 싶어.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대로 몸을 돌려 남자에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저에게 다가오는 정서를 보고 손을 들어 올렸다.
퍽, 하고 고개가 돌아감과 동시에 정서는 있는 힘을 다해 남자를 밀쳤다.
‘어억!’
당황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휘청이는가 싶더니 옆으로 몸이 크게 기울었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난간이 부러지며 남자의 몸이 떨어지는 순간이 꼭 억겁 같았다.
뒤늦게 정서는 제가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인지했다.
거대한 빗소리는 남자의 비명마저 집어삼켰다.
손이 떨렸다.
부러져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나무 난간과 아직도 얼얼하게 남은 이마의 통증이 남자가 그 앞에 서 있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꿈이 아니었다.
정서는 제 손으로 아버지를 다리에서 밀었다.
손이 떨렸다.
심장을 누군가 온 힘을 다해 쥐어짜듯 통증이 밀려왔다.
죄책감인지, 두려움인지.
그도 아니면 이제 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허망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윤정서.’
다시 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검은 장우산을 든 견이 정서의 앞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왔는지, 설마 본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벅저벅 망설임 없이 다가온 견이 정서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웠다.
‘너도 천국 가긴 틀렸구나.’
&
“!”
정서는 눈을 번쩍 떴다.
옅은 빗소리가 추적추적 들리는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비가 오면 자주 꾸는 꿈이었지만, 견을 만나고 나선 한 번도 꾼 적이 없는 꿈이었다.
찌뿌드드한 몸을 움직이려던 정서는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무언가에 움직임을 멈췄다.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널따란 가슴팍이 보이는 것을 보니.
“…….”
설마.
조금 더 시선을 올렸다.
순한 개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견의 모습이 보였다.
어쩌다 이렇게 끌어안고 자게 된 거지.
정서는 기억을 되짚었다.
어제 둘은 라면을 먹었고 정리를 하던 중에 습격을 받았다.
보안업체가 보여 준 CCTV 속 벽돌을 던진 남자가 누구인지 눈치챈 견의 얼굴이 굳었다.
‘신경호네.’
‘신경호……? 설마, 신엔터테인먼트 대표 신경호 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경호 씨가 대표님 댁에 왜…….’
‘장소영이랑 죽고 못 사니까. 이 새끼, 죽일 거야.’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견을 만류한 것은 정서였다.
정식 절차를 밟아 신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지만, 아직 스캔들이 터지기 전이라 조심스러웠다.
견 역시 엔터테인먼트 회사 본부장으로 재직 중이니, 괜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을 성싶었다.
‘증거는 확보하였으니, 나중에 따로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기사가 나가기 전 장소영 측에게 확인 차 문의 연락이 갔을 거예요. 때문에 화가 난 듯합니다.’
‘그렇다고 널 다치게 해?’
‘전 괜찮습니다. 다만 본부장님께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으니,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연락은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정서는 언제 뛰쳐나갈지 모를 견을 잡아두겠다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견은 통창이 깨진 탓에 위험한 곳에 재울 수 없다며 그럴 거면 저와 함께 방에 있자 권했고.
분명 문에 기대 있었는데 언제 침대로 온 걸까.
그나저나, 잠든 얼굴은 참 곱구나.
평소에도 이렇게 얌전한 얼굴이면 좋을 텐데.
물끄러미 견의 얼굴을 살피던 정서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뺨을 쓸어보던 때였다.
견의 입꼬리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곧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은 입맞춤으로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