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뭐라는 거야!
정서는 이제 더 미룰 수 없어 통화 종료 버튼을 급하게 눌렀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견을 돌아보았다.
“맞잖아. 라면, 식으면 맛없잖아.”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잖습니까.”
“내가 그 자식 오해하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예?”
“그리고 오해 좀 하면 어때. 어차피 결혼하면 이것저것 다 할 텐데.”
“그러려고 결혼하는 게 아닌, 아니 그보다…….”
정서는 몸을 일으켰다가 저를 끌어당기는 견의 허벅지 위로 다시 앉았다.
몸이 조금 틀어져 얼결에 품에 바싹 안기게 된 그녀가 견의 어깨를 밀어냈다.
“놓으세요, 이거.”
“화났어?”
“아닙니다.”
“그럼 그 자식이 신경 쓰여?”
“……내일 기사 뜰 겁니다. 그럼 아마 전지훈이 움직임을 보일 거예요. 아니면 우리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해도 되고요.”
“장소영이 또 귀찮게 굴겠네.”
“피곤하실 일 없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그건 좀 그렇지 않나?”
“네?”
“결혼할 여자잖아, 윤정서는.”
“…….”
정서가 가만히 견을 바라보았다.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이제 참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견도 정서의 눈빛에서 그걸 느꼈는지 놀리는 것을 멈추고 그녀를 끌어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얼결에 정서는 공주님처럼 견의 품에 안겨 방을 빠져 나왔다.
“뭐 하시는 겁니까?”
“통화하느라 진이 다 빠져서 걸을 힘도 없을까 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대꾸할 힘은 없었다.
뒤에서 다시금 전화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견은 돌아보지 않았다.
몇 차례 울리던 핸드폰은 곧 조용히 소리를 죽였다.
“라면이 어딨습니까?”
“아직 안 끓였어.”
“예? 아까 분명 식는다고…….”
“불면 맛없으니까. 맛없는 걸 네 입에 먹일 순 없지.”
정서는 상대하는 것을 포기했다.
식탁 앞 의자에 얌전히 내려 주는 견을 따라 자리에 앉아 한쪽 뺨을 대고 엎드렸다.
머리가 복잡했다.
견을 좋아하지 않는 은호는 정서와 견이 같이 있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할 것이 뻔했다.
아직 은호의 속내를 전부 파악하지 못했고 은호를 완벽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도 못했는데.
굳이 눈 밖에 날 필요까지는 없었다.
“생각이 바쁘네, 윤정서.”
“맵게 끓여 주시는 것도 됩니까?”
“매운 걸 좋아해? 언제부터?”
“안 좋아합니다.”
“근데 왜?”
“매운 거 먹으면 혀가 아프잖아요. 아픈 걸로 이 창피함을 잊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창피해?”
“말꼬리 그만 잡아 주실래요.”
견은 알겠다는 듯 입을 다물고 얌전히 라면을 끓여 정서의 앞에 대령했다.
소담하게 담아낸 그릇이며 정갈한 플레이팅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았다.
김치까지 잘 담아 놓은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면 남편감으로 훌륭하지 않나?”
“예. 않습니다.”
정서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며 밉지 않게 흘겨보던 견이 기대감이 담긴 눈빛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냄새를 맡으니 이상하게 또 허기가 졌다.
“잘 먹겠습니다.”
예상 외로 견이 끓인 라면의 맛은 훌륭했다.
물론 미희가 사 온 파김치 덕분이기도 했다.
견은 그녀가 먹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피식 웃었다.
정서가 좋은 것을 보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을 낯설어했듯, 견 역시 제 어머니가 제가 무언가를 먹을 때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막상 정서가 오물오물 먹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냥. 맛있나 싶어서.”
“맛있습니다, 본부장님.”
정서가 고개를 슬쩍 갸웃하다 먹으라는 듯 견에게 눈짓했다.
그는 웃음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은 채 젓가락을 들었다.
&
식사를 하고 치우는 건 정서의 몫이었다.
그녀가 설거지를 자처했으니, 견이 이길 도리가 없었다.
“내가 정리까지 해야 면이 서는데.”
“다음에 하세요, 다음에. 오늘은 제가 치우겠습니다.”
“물 뜨겁지 않나?”
“괜찮습니다.”
흘러내리는 소매가 불편한 듯 인상을 찡그린 정서를 본 견이 손을 뻗어 소매를 걷어 주려던 때였다.
그녀는 무심히 고개를 숙이고 제 옷소매를 앙 물었다.
그리고 야무지게 걷어 올렸다.
견은 이제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그를 정서가 의아한 낯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는 건지…….”
“아니야.”
견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뚱한 얼굴로 그런 견을 바라보던 정서가 설거지를 마쳤다.
“궁금한 거 하나 물어도 돼요?”
“물어도 돼. 뭔데.”
“혹시 이모님이 좋아하시는 거 있습니까?”
“미희 씨?”
“네. 선물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핀도 받고 음식도 해 주시니, 받는 입장에서 정서는 몹시 곤란했다.
이제껏 자신에게 대가 없이 호의를 베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라는 게 있으시긴 해.”
“뭔데요?”
“근데 그게 구하기 쉽지는 않아.”
견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덩달아 심각해지는 정서의 얼굴을 응시한 견이 그녀가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겨내 정리해 주었다.
“도와줘?”
“도와주시면 사례는 확실하겠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견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까 따라와.”
“지금 사게요?”
“씻고.”
“씻고요?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는 겁니까? 해외 직구 뭐 그런 거?”
“아니, 그렇게는 어렵고.”
“그러면…….”
“손주.”
“예?”
“손주 원하셔. 어른들이 다 그러시듯.”
우뚝 멈춰 선 정서가 견을 가만히 보았다.
견은 그 눈빛에 담긴 환멸과 원망이 귀여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거실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의 인영이 정원을 향해 난 통유리창에 비쳤다.
“…….”
“…….”
정적이 흘렀다.
정서는 미동도 없이 견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화가 났나.
슬쩍 견이 불안해지려던 때였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리더니 유리창이 깨어졌다.
반사적으로 정서를 끌어안은 견이 제 몸으로 그녀를 감쌌으나, 유리 파편이 날아오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뺨을 조금 긁힌 정서의 몸이 떨렸다.
놀란 듯 움찔거리는 정서를 깊숙이 끌어안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밖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들렸다.
어딘가로 도망가는 사람의 발소리였다.
견은 정서의 상처를 본 뒤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깐만요, 본부장님! 하견!”
누구인 줄 알고 그렇게 따라가.
위험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정서는 다급히 그를 따라 달렸다.
그런 그녀를 뒤로 한 채 급하게 빠져나갔으나, 이미 상대는 담을 넘어가고 있었다.
긴 다리로 곧장 따라 담을 넘은 견이 가까스로 그를 따라잡는 듯했으나, 주차된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몸짓이 더 빨랐다.
머리에 모자를 깊이 눌러 쓴 남자는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오토바이 소리를 들은 정서는 그대로 멈춰 섰다.
설마 차은호?
왜 굳이? 왜 차은호가 여기 와서 돌을 던져.
멀어지는 오토바이의 번호판을 외운 견이 저를 따라 달려 나온 정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정서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애써 다잡고는 견의 어깨를 따라 안았다.
견도 분명 놀랐을 것이다.
동요한 모습도, 겁먹은 모습도 정서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윤정서?”
견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핏방울이 길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눈물처럼.
“아프지.”
“그냥 긁힌 정도입니다.”
“긁힌 정도가 아니라 피가 나잖아. 얼굴인데, 지금.”
“정말 괜찮습니다. 본부장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유난 떠는 것 같아서 일부러 보안을 최소로만 하고 지냈는데, 그게 익숙했는데. 네가 아직 내 공간에 왔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나 봐. 내가 위험한 게 네가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어.”
“…….”
견이 손을 들어 정서의 뺨을 쓸어내렸다.
손에 핏방울이 묻어나자 그녀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손 더러워집니다. 그리고 조금 긁힌 것뿐이니까 우선 보안 업체 부르고 신고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신고는 내가 할게. 우선 들어가자. 추우니까.”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뛰쳐나온 두 사람이라 돌아가는 걸음이 느렸다.
견은 곧장 구급상자를 찾아 꺼냈다.
보안업체에 연락하려던 정서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간 견이 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연락하는 듯하더니 곧 전화를 끊었다.
“잘 뛰는 것을 보니 몸이 단련됐고 젊은 남자였어. 번호판 조회도 가능하겠지만…….”
“가짜 번호겠죠.”
“비싼 브랜드의 오토바이였으니까 못 사는 집 애는 아닐 거야.”
정서는 오토바이를 보지 못했다.
은호가 아닐 거라 믿었지만, 견이 줄줄 읊은 신상 정보는 너무나도 은호의 것과 비슷했다.
“본부장님.”
“따가울 텐데, 참아.”
소파에 앉은 정서의 아래에 한쪽 무릎을 굽혀 자리한 견이 소독약을 묻힌 거즈를 조심스럽게 상처 위에 가져다 댔다.
따가움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린 그녀가 손을 뻗어 견의 어깨를 쥐었다.
“더 세게 쥐어도 돼.”
“아닙니다.”
“천치가 맞았네, 나. 그 순간에 유리 조각 하나 못 잡고.”
“잡으셨다면 의심했을 겁니다. 사람이 아니라고.”
“…….”
분위기를 풀어 보기 위해 정서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견의 굳은 얼굴을 풀긴 부족했다.
집중한 채 정서의 얼굴을 살핀 견은 상처가 그다지 깊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야 조금 안도했다.
상처 위에 연고를 덧바를 때 즈음 보안 업체에서 사람이 도착했다.
“바로 인력을 배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돼서. 유리 역시 빠르게 업체 불러 시공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임시 조치도 당연히 취해 둘 거고요. 다시 한번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게 해 정말 죄송합니다.”
“알았으니까 CCTV 좀 확인하죠.”
견의 앞에 세팅된 화면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각까지 정확히 기억한 탓에 해당 화면을 부르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화면 속 남자는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낀 채 조심스럽게 담을 넘는가 싶더니 메고 있던 가방에서 벽돌을 꺼냈다.
붉은 벽돌이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두 사람을 향해 벽돌을 던졌다.
“잠시만요. 화면 좀 확대해 보죠.”
견의 말을 따라 확대된 화면 속 남자의 얼굴은, 견과 정서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