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뭐가 뭐냐는 건지…….”
“살뜰하게 먼저 말 거는 타입도 아니면서 다가가고 그것도 모자라 두 개 다 달라고 해? 머리 질끈 묶을 때 빼고 뭘 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나.”
“알면서 리본이 더 낫다고 하셨습니까.”
“진짜 왜 그랬는데.”
견이 손을 들어 정서의 턱을 제 쪽으로 당겼다.
정서를 살피는 눈길 속에 호기심이 번득였다.
마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아서 정서는 별안간 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신기해서요.”
“신기해? 뭐가. 이런 촌스러운 디자인의 핀이 아직도 나온다는 것?”
“촌스럽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럼 촌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제게 권하신 겁니까?”
“난 원래 좀 촌스러운 걸 좋아하는데.”
견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런 견을 빤히 보던 정서가 무심코 손을 내려 제 배를 감싸 안은 그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길 가다 뭔가를 보고 생각 나는 게 진짜였구나.”
“응?”
“왜.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맛있는 걸 먹거나, 좋은 데 가거나. 그러면 그냥 누가 생각 난다잖아. 영원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고, 영원 어디 동네에 가도 할머니랑 같이 갔던 곳이니까. 나는 그런 적 없었거든. 서울 오고 나서 좋은 거 먹을 일은 더러 생겼는데 그땐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일하느라 정신없었고. 그래서 난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근데 진짜네. 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네.”
“…….”
견은 물끄러미 정서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더욱 바싹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숨 막힌다며 정서가 밀어내려 해도 놔주지 않고서는 자신의 뺨과 그녀의 뺨을 맞댔다.
“질투 나.”
“예? 아니, 숨 막히니까 이것 좀 놓고…….”
“나도 했어, 윤정서 생각. 비싸고 좋은 거 먹을 때 한 게 아니라서 문제긴 한데.”
“그럼 언제 하셨는데요.”
“외로운 밤에?”
“아, 진짜!”
정서가 경악하며 견을 밀쳐냈다.
견은 여전히 삐쳤다는 듯 입술을 조금 내밀었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제부터 내 생각해.”
“네?”
“아니다. 그럴 일도 없겠구나. 어차피 네가 가는 좋은 곳엔 내가 있을 거고, 네가 먹는 좋은 음식은 내가 산 걸 테니까.”
“애처럼 굴지 마세요.”
“애들은 못 그러지. 애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부엌으로 향한 견이 찬장을 열었다.
정서가 뭐 하는 거냐는 듯 그를 보자 장난스레 웃은 견이 라면 두 봉지를 꺼냈다.
“김치엔 라면.”
“예?”
“이모 말 들어야지, 안 들으면 나 혼나.”
“아……. 그럼 제가 끓이겠습니다.”
“왜? 나 못 믿어?”
“예.”
정서는 대번에 대답했다.
정서의 대답을 들은 견이 저만 믿으라는 듯 소매를 걷어붙였다.
냄비를 꺼내 물을 받고 올리는 간단한 동작이 깔끔하게 이어졌다.
무엇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 것 같은 효율적인 움직임에 정서는 견이 생각보다 생활력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무심코 생각했다.
변호사로 일하며 만났던 돈 많고 나이 어린 의뢰인들은 대개 뭐 하나 스스로 하는 법이 없었다.
“기대해. 아마 먹어 본 것 중 제일 맛있는 라면일 테니까.”
“……예.”
“진짜 기대해.”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정서는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견을 뒤로 한 채 방으로 향했다.
손에 들고 있던 핀을 잘 챙겨 두기 위함이었다.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한 것은 습관이었다.
「전화해 주세요. - 차은호」
은호의 문자가 보였다.
하종훈을 설득해 기사를 내기로 한 걸까?
확인하기 위해선 전화를 해야 했지만 밖에 있는 견이 신경 쓰였다.
“…….”
그래도 일은 일이지.
정서는 머뭇거리던 것을 멈추고 핸드폰을 들고 방을 빠져 나왔다.
이제 막 끓기 시작한 물을 들여다보고 있던 견이 고개를 들어 정서를 보았다.
“잠깐 통화하고 오겠습니다.”
“이 시간에?”
“아직 일곱 시밖에 안 됐는데…….”
“휴일 저녁이고 사고 칠 나는 여기 있고. 그럼 업무 연락이 아니잖아?”
“따지자면 업무 연락입니다.”
“차은호구나?”
정서는 태연하려 노력했다.
별거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얼굴을 짓는 것이 중요했다.
어디까지나 이건 업무고 은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이.
“예. 맞습니다. 앞서 말한 스캔들 건으로…….”
“다녀와.”
“예? 아니다. 밖에 추우니까 그냥 여기서 해, 통화.”
“…….”
“방에 들어가서 해. 그럼 되잖아.”
웬일로 이렇게 순순히 허락하는 걸까.
정서는 섣부르게 걸음을 옮기는 대신 견을 살폈다.
그는 정말 괜찮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 분.”
“예?”
“라면이 익는 시간 삼 분, 그 시간이면 충분하지?”
충분했다.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정서는 곧장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온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는가 싶더니 곧 달칵하고 전화 받는 소리가 들렸다.
― 뭐 하고 있어요. 바빠요?
“확인이 늦었어. 무슨 일이야?”
― 바로 용건부터 들어가네요. 매정하긴.
“시간이 얼마 없어서 그래.”
― 뭐 하는 중인데요. 중요한 자리라도 불려 나갔어요?
“하종훈 회장한테서 사진 다시 받았어?”
― 네. 믿을만한 기자도 구했어요. 연예부 초짜 기자고 쓰는 기사도 다 고만고만해서 열애 상대까지는 모를 눈치예요.
“그럼 됐어. 내일 아침에 나가?”
― 예. 내일 아침, 열 시 정도?
“수고했어. 근데 어떻게 설득…… 아니다. 다음에, 그건.”
― 왜 이렇게 쫓기듯 통화를 하지?
은호는 정서의 말이 미묘하게 빨라지는 것이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정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은호에게 견과 같이 있고, 자신이 허락 받은 시간은 고작 3분이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정서가 머뭇거리자, 걱정이 되었는지 은호가 다시 물었다.
“괜찮아요? 어딘데요. 위험한 거예요?”
―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집이야. 별일 없고.
“저녁은요. 먹었어요?”
― 아직. 차은호, 내일 기사 나기 전에 다시 연락할 테니까…….
“같이 저녁 먹을래요?”
― 뭐?
“나도 저녁 아직이니까. 같이 먹어요.”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지?
‘차은호’와 ‘윤정서’는 밥을 함께 먹을 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망설이는 사이 은호가 말을 다시 이었다.
― 밥 정도는 사야죠. 제가 방금 되게 곤란한 문제 해결해 준 거 아니에요?
“알았어, 살게. 살 테니까 날짜 다시 정해서…….”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기척이 들렸다.
견이었다.
이제는 진짜 전화를 끊어야 했다.
“……연락할게.”
― 내일 연락한다면서요.
“응. 내일, 그래. 내일.”
― 내일 언제요?
“응?”
은호는 이상하게 집요해졌다.
마치 무언갈 알아낸 사람처럼 말이다.
정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끊어 버리고 싶어졌다.
“…….”
견이 손을 뻗어 정서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손길이 주는 은근한 압박감에 그녀가 숨을 죽일 때였다.
견이 고개를 숙여 정서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
“!”
뜨거운 감촉에 당황한 정서가 몸을 움찔하는 사이 견이 그녀를 끌어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풀썩 앉은 그가 정서를 그대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정서는 놀라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사이, 둔부 아래로 무언가 느껴졌다.
― 듣고 있어요?
“……응, 듣고 있어.”
견이 손을 들어 정서의 배를 조금 문질렀다.
자연스레 몸에 힘이 들어간 정서가 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으나 복부를 쓸어내리던 손은 태연하게 내려가 허벅지 위를 향했다.
― 오늘 보고 싶은데.
수화기 너머로 소리가 샜을 것이다.
정서가 은호의 도발적인 발언에 당황해 반사적으로 견을 돌아보았다.
견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하게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오늘 해야 할 이야기라도 있어?”
정서가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아니면 이제 그만하라는, 이제 그만 전화를 끊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냥 어설프게 끊어 봤자 견의 의심만 더 살 뿐이다.
―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야 보나.
아니, 안 돼. 그만해.
정서는 핸드폰을 세게 움켜쥐었다.
은호는 분명 장난으로 이러는 것일 테지만, 이런 말들이 견의 귀에도 장난으로 들리진 않을 게 뻔했다.
― 보고 싶으면 보는 거지.
견의 손가락 끄트머리가 정서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는가 싶더니, 곧 힘줄이 돋아난 손이 그녀의 손을 완전히 덮었다.
정서의 손이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 은밀한 곳으로 조금씩 빨려들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숨결이 가늘게 뻗은 목덜미로 쏟아졌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허벅지 안쪽 여린 살결을 어루만지는 것이.
하필이면 얇은 재질의 바지를 입어서인지 뜨거운 손바닥의 열감이 전부 생생히 느껴졌다.
― 신발은 발에 맞아요?
“차은호. 우리 이런 얘기할 사이는…….”
― 선물한 사람이 선물 잘 받았냐고 묻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야박하네.
“……아!”
허벅지 안쪽으로 기어들어가던 손이 문득 허벅지를 느릿하게 문지르는가 싶더니 그가 그대로 몸을 숙였다.
정서의 상체가 견의 품으로 쏙 빨려 들어가며 크게 앞으로 기울었다.
― 왜 그래요. 괜찮아요?
“미안한데 나 이만 끊어야 할 것 같아. 자세한 얘기는 내일…….”
더 미룰 수 없었다.
정서는 이러다간 큰 사고가 날 것만 같아서 황급히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견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자기야, 준비 다 됐어.”
“……!”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당황한 듯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다 낮은 은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지금 같이 있어요?
“…….”
“식으면 별로잖아. 따뜻할 때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