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85)

28.

“열애 기사? 설마 나랑? 그 사진 뺏긴 거 아니었어? 차은호한테.”

“맞아요. 뺏겼습니다. 하지만 전지훈을 찾기 위해선 우리 쪽에서 먼저 나타날 명분을 줘야 해요.”

“그런 기사 나는 것쯤이야 나에겐 큰일이 아니지만, 무슨 수로 차은호가 가진 사진을 기사로 내보낸다는 거지? 아니, 그 전에. 차은호가 나에게 미친 스토커가 아닌 이상에야, 차은호에게 일을 의뢰한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이 허락한대? 내 사진을 지금 이 타이밍에 푸는 걸?”

“아니요. 본부장님은 그 기사에서 빠질 겁니다. 장소영의 열애설로만 내보낼 거예요. 상대가 누군지는 밝히지 않고. 그건…… 차은호 씨가 설득하기로 했습니다.”

“왜?”

목적지인 견의 자택에 도착해 열리는 주차장 문 안으로 차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차를 세운 그가 고개를 돌려 정서를 보았다.

“네?”

“왜. 차은호가 왜 네 말을 듣냐고.”

“그건…….”

“그 얘기를 네가 차은호와 나눴다는 건 날 만나기 전 차은호부터 만났다는 거고?”

통화 등으로 연락했을 가능성은 애초에 고려하지 않는구나.

정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견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이 전방을 주시했다.

싫다고 하면 어쩌지. 걱정이 밀려왔다.

은호의 속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백영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인물인 만큼 잘 활용한다면 정서에게도 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윤정서.”

“응.”

“네가 영감을 돕든, 돕지 않든 나는 너랑 결혼할 거야. 한 달 뒤에 결혼한다는 건 진심이니까.”

“…….”

“아무 생각 없이, 고작 말썽부리지 않겠다는 조건만으로 영감이 나의 결혼을 허락하리라 생각한 적 없어. 그러니 네가 결혼의 대가로 무엇을 제안받았든 가져.”

“뭐?”

“잡힌 약점이야 내가 끊어 주면 그만이야.”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속였다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곧장 잘라내도 모자랄 판에 견은 한술 더 떠 제 약점까지 없애 주겠다고 한다.

그녀가 믿을 수 없는 건 그의 능력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견에게 설령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견이 대체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 행동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넌 나한테 단 하나만 주면 돼.”

“……가진 게 별로 없어, 나.”

“상관없어. 내가 갖고 싶은 건 네가 반드시 가진 거니까.”

“뭔데. 대체 뭘 얼마나 받으려고 나한테 이러는 건데.”

“나중에. 그러니까 넌 그냥 웃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인 척할 준비만 하면 돼. 전지훈 기자 건은 네가 알아서 해. 반드시 찾아야겠다면, 어차피 그 자식이 뭘 알아서 나한테 그런 연락을 한 건지 궁금하기도 했으니 협조할게.”

“제일 어려운 부탁을 하네.”

정서가 중얼거렸다.

행복한 신부가 뭔지도 모르는데, 그런 척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이런 부탁을 왜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형식상의 결혼일 텐데, 한다고 해도 그건 견의 이미지를 위해서일 텐데.

아니, 오히려 반대인가.

이미 한 차례 그리 많이 갖지도 못한 명성을 한꺼번에 잃은 자신이 견의 옆에 선다고 견의 이미지가 크게 좋아질 일은 없었다.

이 결혼으로 견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결국 하 회장의 믿음뿐이었다.

하 회장의 지시로 움직이는 ‘정서’가 ‘견’의 약점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믿음.

오직 그거 하나 때문에 그냥 곁에 둔다고?

그런 건 말이 안 됐다. 

비효율적인 데다, 소모적이다.

“그럼 진짜 되든지.”

“응?”

“되면 되잖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

정서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은 마음에 멍하니 견을 보았다.

견은 그런 그녀를 뒤로 한 채 씩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

“둘이 같이 나갔다 왔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미희였다.

미희는 앞치마를 걸친 채로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던 듯 조금 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집에 계신 줄 알았으면 뭐라도 사 올 걸 그랬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저녁은 아직인데. 점심에 먹었던 한정식 집에서 파는 파김치가 너무 맛있더라고. 그래서 생각난 김에 사 왔지. 맛 좀 볼래요?”

“아…… 그럴까요.”

정서는 예상치 못한 미희의 등장에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장 살뜰하게 말을 붙였다.

견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조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서가 자신의 집에 있는 것이 어제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는데, 막상 미희와 만나 대화 나누는 것을 보니 그제야 조금 실감 났다.

정서는 그의 생활 안으로 들어왔다.

“옷 갈아입어. 짐 다 가져다 뒀으니까. 이모, 이제 좀 가시죠?”

“이제 얼굴 봤는데. 그 조금을 떨어져 있질 못하겠어?”

두 사람의 낯간지러운 대화를 견디지 못한 정서의 귀 끝이 붉었다.

견은 그런 그녀를 배려하듯 어깨에 팔을 둘러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정서가 임시로 자신의 짐을 둔 손님방 앞까지 친절히 에스코트한 견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천천히 나와도 돼.”

“……이모님한테 쓸데없는 말만 하지 마요.”

“무슨 말? 우리 결혼한다는 말?”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정서의 머리칼을 장난스레 흐트러뜨린 견이 걸음을 옮겼다.

정서는 방으로 들어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무언가 많은 일이 잔뜩 벌어진 것 같은데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견에게 전부 들킨 이상, 하 회장을 도와 견을 무너뜨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걸 안 지금, 안도감이 드는 걸까.

살기 위해선 뭐든 다 하자고 해놓고.

견에 대한 알량한 마음을 남겨두었나. 여전히 그를 신경 쓰고 있나.

“후우…….”

모르겠다. 모르겠고 일단 나가야 했다.

정서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편한 평상복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 보니 제 짐을 견은 꽤 야무지게도 챙겨 왔다.

여권과 통장을 작은 파우치에 담아 가져왔으며 옷도 잘 챙겨…….

그러고 보니 속옷도 챙겼잖아?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정서는 손에 잡히는 속옷을 다급히 캐리어에 다시 담아 캐리어를 닫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화려한 것을 사 놓을 것인데.

견과 잠자리를 함께했을 여자들은 분명 이렇게 밋밋한 검정 속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어딘가 허망했다.

이런 순간에 속옷 걱정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습기도 했다.

정서는 터덜터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옷을 갈아입은 견이 미희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 도와드릴 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라니까.”

“아니야.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다시 생각해.”

“내 말이 맞아요, 이모. 지금 고용주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

“나이를 먹어도 내가 너보다 스물 몇 살을 더 먹었는데. 누구 말이 맞겠어? 어?”

두 사람의 분위기가 조금 심각했다.

뭘 그렇게 투닥이고 있나 싶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테이블 위에 두 개의 머리핀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진주 알이 세 알 나란히 박혀 있는 심플하고 우아한 디자인의 핀이었고 다른 하나는 붉은 리본이 달린 귀여운 모양새였다.

“두 분 혹시 뭐 하시는…….”

“얘가 자꾸 네가 이게 더 마음에 들 거라고 하잖아.”

견이 고른 것은 리본 모양의 핀이었다.

정서는 아연실색했다.

한평생 이런 핀을 달아 본 적이 없었다.

“얘 머리끈도 귀여운 것만 했다니까요.”

머리끈?

아, 그 머리끈.

정서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내내 가지고 있던 방울이 달린 머리끈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제 취향이라기보다는 할머니의 취향이었다. 

사실 그마저도 가짓수가 얼마 되지 않았을 영원 시장 아동복 판매장의 악세사리 코너 위에 놓여 있는 것 중 그나마 나은 것일 뿐이었다.

“내가 봤을 때 부담 없이 평소에도 할 수 있는 건 이건데.”

“웬 핀이에요?”

“영기 씨랑 길 가다가 우연히 봤는데 예쁘더라고. 물론 비싼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비싼 걸로 고른 건데. 마침 정서 씨가 생각이 나더라고.”

정서는 조금 당황했다.

어떻게 길을 가다가 우연히 자신의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런 건……. 

그런 건 너무 다정했다.

“……봐, 네가 고른 건 영 아니라니까.”

“진짜 아냐?”

마음이 이상해서 정서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눈치를 살피던 미희가 견의 배를 툭 쳤다.

견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연신 옆으로 갸웃거렸다.

그게 아닌데, 둘 중 무엇이 더 낫거나 좋아서가 아닌데.

그럼에도 지금의 마음을 솔직히 말할 수 없던 정서는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가 놓았다.

“……둘 다 가지면 안 돼요?”

그래서였을까, 겨우 내뱉은 말은 고작 저런 말이었다.

욕심쟁이 같은 말이라고, 뻔뻔해 보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미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가 싶더니 입이 벌어졌다.

“진짜? 그럴래?”

“너 왜 그래?”

견은 기민히 정서의 변화를 파악했다.

그러나 지금 견은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정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미희는 덥석 핀을 들어 올리더니 다가와 정서의 양쪽 귀 옆으로 핀을 꽂아 보았다.

“봐라, 견아. 이쪽은 귀엽고, 이쪽은 우아하고. 둘 다 너무 잘 어울린다.”

“아까 리본은 아니라면서요.”

“아니긴 뭐가 아냐.”

“아!”

견은 자신의 등을 철썩 때리는 미희에 인상을 찡그리며 엄살을 부렸다.

정서는 얼결에 모델이 되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견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작게 웃었다.

“둘 다 어울리네.”

“산 보람이 있네. 나중에 둘이 데이트할 때 예쁘게 하고 가.”

“감사합니다.”

정서는 핀을 소중히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견이 이만 가보겠다며 나서는 미희를 배웅했다.

정서는 이 호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알 수 없어 복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파김치 꼭 먹어 봐, 간다.”

미희가 나서고 문이 닫히자 정적이 깃들었다.

견이 정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어깨에 턱을 괴었다.

“뭐야, 너.”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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