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85)

27.

“정서야.”

더 속이는 것도, 변명을 하는 것도 무의미했다.

견은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고 있었고 그 생각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정서에겐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사랑했다면 나았을까?

아니, 사랑하는 척이라도 했다면?

정말로 견이 가지고 싶어서, 견을 욕심내서 그랬다고 하면 믿어 줬을까.

“너는 지금껏 내가 널 왜 곁에 뒀을 거라고 생각해?”

“하견, 나는…….”

“그 경찰서 근처에서 너를 다시 만났을 때, 그건 우연이 아니었어. 네 소식을 내가 모르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무심은 어디서 나온 거야?”

“……뭐?”

“정말 내가 십 년간 너를 찾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정서는 견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아니, 정확히는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다.

그렇게 먼저 사라져서, 한 번도 자신을 찾지 않았으니까.

정서로서는 현실을 생각해야 했다.

당장 대학에 가고 이 지긋지긋한 영원을 벗어나는 것.

어떻게 해서든 영원에서의 윤정서를 지우고 아무도 그녀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다시 살아내는 것.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을 찾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느냐니.

십 년 전 매몰차게 등을 돌렸던 건 하견이었다.

저를 찾아낸 건 하견의 아버지, 하 회장이었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나 보네. 그 정도면 천치는 내가 아니라 윤정서고.”

이 상황에 적절한 반응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서가 인상을 찡그렸다.

견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입술 끝을 작게 비틀어 웃었다.

“이런 와중에도 미련하단 소리는 듣기 싫어?”

“무슨 말인지 설명해.”

“설명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윤정서.”

“난 그날 우연히 널 만났다고 생각했어. 조사를 받고 나오는 길에 비가 왔고. 마침 곤란하고 불미스러운 일이 있던 네가 경찰서를 향하다가 나를 마주쳤고…….”

“우산을 펼쳐 줬다?”

“…….”

아니냐는 듯 저를 빤히 보는 시선에 견이 한동안 정서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 순진한 믿음을 지켜 줘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이내 결심을 한 듯 그가 손을 뻗어 정서의 목덜미를 끌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몸은 더욱 바싹 붙었다.

입술 위로 서로의 숨결이 내려앉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견이 입을 뗐다.

“정신없이 지냈던 건 사실이야. 그때, 갑자기 후계자 수업을 받게 돼서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가 갇혀 살았어. 그동안 말썽부렸던 기록을 전부 세탁하려는 듯 외국에서 대학도 나와야 했고 경영학이니, 뭐니. 이것저것 머릿속에 급하게 때려 박느라 윤정서가 무엇을 하는지, 살아는 있는지. 살아있다면 아직 누군가를 해치진 않았을지. 그런 생각을 했지.”

정서의 얼굴이 경직되는 것을 알면서도 견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치켜 올라갔던 눈꼬리가 유순하게 내려와서 조금 가련하고 애틋한 얼굴이 되기도 했다.

“다칠 바에는 그냥 해치라고. 상대가 누구든 물어뜯으라고.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으라고, 그런 생각도 했고. 한국에 돌아와 자리를 잡고 나서야 뭘 할 여유가 생겼어. 영감의 감시도 좀 피할 수 있었고 숨도 쉴 만 해졌고. 그래서 너부터 찾았어. 역시나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더라, 그새 로스쿨도 가고 변호사 시험도 통과하고. 할 줄 알았는데, 진짜 했다고 들으니까, 그때의 기분이란.”

“…….”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자랑스럽다가 그럴 줄 알았다고 납득하다가, 정말 멀쩡히 산다는 게 묘하게 열이 받는 거야.”

“뻔뻔해.”

“맞아. 뻔뻔해. 나 없이 멀쩡히 사는 네가, 정말 꿈꾸던 삶을 살아가는 것 같은 네가 나는 짜증 나고 안 믿겼어.”

‘정서’는 ‘견’을 지웠는데. 아니, 지운 채 살기 위해 노력했는데.

정작 그는 자신을 생각했다는 게, 심지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게 억울하고 허무했다.

정서가 아무 말도 없이 물끄러미 보자 견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허탈하다는 듯 헛웃음이 함께였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겁먹는 시늉이라도 해. 너 방금 나한테 들켰어. 내가 순순히 고백하고 있다고, 네가 하 회장 손잡고 나한테 접근한 걸 봐주겠다는 뜻이 아니야.”

“……내가 어떻게 봤는데.”

“예쁘게.”

“……멀쩡히 사는 게 왜 안 믿겨? 나 잘 살았어.”

견의 말을 가뿐히 넘긴 다음 정서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때만 해도 정서는 자신이 곤란한 일을 맡아 하고 있기는 했어도 삶을 어느 정도 안정된 궤도에 올렸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그 자만이 잘못된 걸지도 몰랐다.

그 이후 나타난 남자 하나 때문에 다시 그녀의 삶은 아래로 처박혔으니까.

“설마 너 없이 잘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이제 자발적으로 낯간지러운 말을 하네.”

“대답해.”

“윤정서는 숨기고 감추는데 능숙한 사람이니까.”

“…….”

“누구한테 들키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니까, 그래서 필사적으로 숨기니까. 강한 척하고 일단 싸우려 들고. 근데 나한테는 늘 들켰으니까.”

“아니야, 너 몰랐어.”

“진짜 몰랐어, 내가? 몰랐으면 너랑 안 놀았지.”

“네가 언제 나랑…….”

“놀았냐고?”

“됐어. 넘어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날은 대체 왜 나타난 거야? 그전부터 내 소식 듣고 있었다며. 별안간 나타난 게 왜 하필이면 그날이어서…….”

“걱정됐으니까.”

정서의 물음에 견은 곧장 답했다.

스스로도 고민하거나 생각하지 않고 대답해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정서는 드물게 그런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거짓말.”

정서가 손을 들어 견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말도 안 됐다. 

견이 자신을 궁금해했다는 것도, 소식을 듣고 있었다는 것도.

정서와 견은 처한 상황이 달랐다.

평생 영원에서 자란 그녀가 견을 만났을 때 느꼈던 압도감을 견이 느꼈을 리 없었다.

그저 두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의 심심풀이.

도시에서 자란 애가 별안간 시골에 처박혀 이상한 애를 보고 궁금해하는 정도, 그 정도로 생각했음이 뻔했는데.

그런 그녀가 뭐가 애틋해서 소식을 궁금해한단 말인가. 

그것도 모자라 걱정을 한단 말인가.

“키스하게? 지금 그 타이밍이야?”

견은 뒤늦게 자신이 드러낸 마음을 수거하듯 말을 돌렸다.

견이 정서의 목덜미를 감싸 쥐고 정서는 견의 옷깃을 쥐어 끌어당기고 있으니 언뜻 보면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 같은 연인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헛소리 그만해. 네가 날 걱정해? 웃기지 마. 너는 내 약점을 쥐고 있었고 그냥 그게 재밌었던 거야. 그 지루한 영원에서 뭐라도 가지고 놀아 보고 싶었던 거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윤정서, 대답해 봐.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황당하고 황망한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견이 대체 왜 자신을 생각했단 말인가.

왜 찾고, 심지어 걱정하여 찾아왔단 말인가.

갑작스레 재벌집 후계자가 되어서 예전 인연이 그리워지기라도 했던 걸까?

곁에 사람을 두지 않는 그였으니, 그렇게라도 자신을 생각해야 버틸 수 있었던 걸까?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바쁘게 그녀의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동안 견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아!”

입술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정서가 얼굴을 찌푸렸다.

견은 그녀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더니 다시금 물었다.

정서가 그런 견을 밀어내기 위해 옷깃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더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더욱 붙어 깊숙이 입술을 맞춰 오며 견은 혀를 내어 그녀의 입술 안을 파고들었다.

미운 말을 했으니 벌을 주겠다는 듯이, 고른 치열과 입천장을 훑는 그의 혀는 집요했다.

정서의 몸짓에 상관없이 밀착한 두 사람의 어깨에 체중이 실렸다.

견이 그녀의 혀뿌리를 삼킬 듯 빨아들이다가 뭉개진 낮은 신음이 새는 것을 듣고 멈칫했다.

“…….”

“…….”

정서는 이제 밀어내는 것을 포기했다.

제가 거칠게 굴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잠시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었다 떼던 견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렸다.

“대답해야지.”

“……아니.”

“착하다.”

대답이 마음에 든 듯 견이 엄지로 정서의 입술을 훑어 주었다.

그리고 눈을 맞춘 채 말을 이었다.

“걱정됐어. 네가 사람의 죽음을 목격했다고 하니까. 그것도 하필이면 네가 승소를 이끈 다음 그렇게 됐다고 하니까. 내가 기억하는 너는 매정하지 못했거든.”

“…….”

“그래서 찾아간 거야. 더 미루지 못하고, 더 기다리지 못하고.”

“기다리다니?”

“입술 하나에 모든 걸 내어 주는 건 이쪽이 너무 손해 보는 거래라서. 오늘은 여기까지.”

견은 그렇게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누군가 정서가 타고 있는 조수석의 창문을 두드렸다.

흠칫 그녀가 몸을 떨자, 그제야 견이 한숨을 내쉬며 차를 움직였다.

“지금 우리 설마 도로 한복판에서…….”

“맞아. 네가 생각하는 거.”

“…….”

“창피해?”

“정말 그게 전부입니까? 그 이후로 전지훈 기자의 연락을 받은 적도 없고요?”

“너는 나와 맞춘 입술을 떼자마자 다른 남자 얘기구나. 나도 몰라. 네게 말한 게 전부야.”

정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매끄럽게 나아가는 차와 달리 생각이 자꾸 끊겼다.

이제 하 회장의 명령으로 자신이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앞으로 하 회장의 지시를 비밀리에 수행하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다만 견은 지금껏 상황을 다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고, 심지어 자신을 돕기까지 했다.

어쩌면 하 회장의 죽은 아들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다는 사실까지는 견이 모르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 회장이 그 아이가 자랄 때까지 견에게 백영을 맡기려 한다는 것도.

그렇다는 얘기는, 아직 방법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정서는 견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게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장소영 열애 기사 나갈 겁니다, 본부장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