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85)

26.

― 어디야, 자기.

정서는 제 귀를 의심했다.

다정하고 능글 맞은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느끼하지 않고 담백해서 모르는 이가 들으면 친밀한 연인 사이라 오해할 법도 했다.

이런 간지러운 건 해 본 적이 없는데?

설마 견은 이미 해 본 건가.

해 봤다면 누구랑? 어떻게?

아니, 지금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닌데.

정서는 생각을 다잡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입술을 열었다.

“회장님께 연락을 받고 나왔습니다.”

― 왜. 또 뭐라고 해? 앞으로 그 영감 만나기 전에 나한테 먼저 얘기해 주면 안 되나?

“말씀드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요. 회장님 눈 밖에 나서 좋을 것 없습니다.”

― 누가 뭐래?

견의 대답은 정서의 예상 밖이었다.

왜 저에게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느냐. 그것도 모자라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느냐.

그렇게 추궁할 줄 알았는데.

― 영감이 할 말이야 뻔하지. 힘 빠지는 소리 들으러 가는 길인데 적어도 데리러는 가게 해.

“…….”

정서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일인지 잘은 몰라도 분명 견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전에 없던 여유가 생긴 것 같기도 했다.

― 그래서 어딘데.

“그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 묻고 싶은 거? 뭔데.

“……전지훈 기자와 혹시 따로 연락했습니까?”

― 전지훈?

견이 되물었다.

정서는 수화기 너머로 보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 은근히 걱정됐다.

저번에 이 상무를 아무도 모르게 해치운 것도 그렇고.

가끔 속을 알 수 없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이, 이번에도 전지훈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봐.

저도 모르게 겁이 났다.

― 글쎄. 그랬던가?

“회장님께서 전지훈 기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본부장님과 마지막으로 연락했다고 하더군요.”

― 아아……. 기억났다. 아마 전화했을 거야.

“혹시 무슨 얘기를 하셨는지 기억…….”

― 그런데 그 사진 말이야. 장소영이랑 찍힌 사진 가지러 갔을 때 만난 게 차은호랬나?

이제껏 따뜻하고 여유롭던 목소리가 묘하게 날이 선 것을 느끼는 것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서는 말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골랐다.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주위가 평소보다 조용한 것이 차 안인 것 같았는데, 견은 이럴 때 꼭 배우처럼 숨소리 하나도 조절하곤 했다.

“……네.”

― 전지훈은 전화해서 말했어. 거래를 하자고. 오늘 찍은 사진뿐 아니라 좋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돈을 준비해 달라고. 그래서 그 정보가 뭔지 물었지, 내가.

“뭐라고 답했나요?”

― 뭐라고 답했더라…….

견은 뜸을 들였다.

고뇌하는 척 시간을 들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치레라는 것을 정서와 견 둘 다 알고 있었다.

“어디십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만나서 얘기하시죠.”

― 찾아 주면 뭘 준대?

“네?”

― 나랑 결혼하게 해 준대?

“그게 무슨…….”

― 그 정도는 약속받아야 기운이 나는 거 아냐? 그 영감이 네게 줄 수 있는 것 중 제일이 나잖아.

“하 회장님이 제게 줄 수 있는 것입니까, 본부장님이?”

정서는 무심코 되물었다.

이번엔 견이 그녀의 물음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러나 금세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은 듯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데리러 갈게. 갤러리 근처지?

뻔하다는 듯 묻는 목소리에 왜 기운이 빠졌을까.

무얼 기대하기라도 한 걸까.

알 수 없지만 일단 만나야 했으므로 정서는 맞다고 답했다.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끝으로 끊긴 전화에 정서는 핸드폰을 느릿하게 내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을 향하자 머리 위를 덮은 불투명한 유리 천장 위로 그새 찌푸려진 하늘이 보였다.

아까까지는 맑던 하늘은 징그럽게도 변덕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은호의 말처럼 정말로 견은 무서운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견이 무색할 만큼, 그녀 역시 무서운 사람이었다.

정서는 사람을 죽이려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아마 실패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

“정말 여기 있네. 영감도 지독하다. 쉬는 날까지 본인이 일하는 곳 근처를 맴돌다니.”

“본부장님, 요새 개인 활동이 잦으시네요.”

“왜. 보고 싶었어? 새삼스레 내 빈자리가 실감 나고 그래? 아니면 예비 신랑 단속이라도 하는 건가.”

“…….”

정서는 잠깐 조용히 견을 바라보았다.

데리러 온 그의 차에 오른 뒤로 둘은 아까의 긴장감을 의식한 듯 실없는 소리로 분위기를 풀었다.

견이 먼저 손을 내밀었으므로, 정서는 그 손을 쥘 수밖에 없었다.

“자꾸 부정해 봐야 소용없어.”

“뭘요.”

“뭐긴 뭐야. 나랑 결혼한다는 사실이지.”

“좀 더 진지해지실 순 없는 겁니까?”

“남편 단속하는 거면 기쁘게 받지. 내가 집착하는 여자는 이때껏 질색했는데, 그게 윤정서면 취향 바꿔 보려고.”

정서는 견이 이럴 때마다 대충 눙치며 넘어갔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조금 동요했다.

견에게 이런 장난 어린 말은 쉬웠다.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 아니므로 진심으로 받아들이거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견이 다른 이의 말보다 제 말을 듣는 것 그리고 자신을 곁에 두는 것 모두 추억 때문이라는 것을 정서도 알고 있다.

견도 혼자였으니까, 외로웠을 테니까.

아주 찰나였지만, 고작 석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어린 마음이자 어리석은 열망일지라도 두 사람은 무언가를 분명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추억은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다.

영원에서 지냈던 시절 중 고작 몇 개월을 반짝거리는 것과 함께했다고 해서 영원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없는 것처럼.

여전히 영원이 그녀에게는 지독하게 싫고 지겨운 것처럼.

“비가 올 것 같네.”

견이 중얼거렸다.

정서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냈다.

견의 말에 의미 부여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까 생각나셨다는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아, 그거.”

“네, 그거.”

“별거 아니었어. 그냥 만나기 전까지는 알려 줄 수 없다고 해서, 그 정도면 나를 움직일 수 없다고 답했지. 전화는 시시하게 끊겼어.”

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

대답의 사실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얼굴을 살피던 정서에게로 견의 시선이 향했다.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저를 믿어 보라는 듯, 은근히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오히려 저런 장난스러움 때문에 그녀는 쉽게 견을 믿지 못했다.

정말로 그랬을까.

견이 누구를 죽일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구태여 전지훈을 해할 동기가 없다는 것도.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듯했다.

견이 알고 정서는 모르는 무엇이 분명히 있었다.

“자, 그럼 내 차례.”

“예?”

“대체 무슨 약점을 잡혔어?”

“약점이라뇨?”

“약점을 잡혔잖아. 그 노친네한테. 그러니까 나한테 지금 이걸 묻고 있는 거고. 아, 대충 감이 온다. 영감이 먼저 약점을 잡혔구나. 그 기자라는 새끼한테.”

“…….”

신호가 바뀌었다.

노란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도 견은 고개를 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바심이 드는 것은 정서였다.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을 할까.

자신이 무슨 약점을 잡혔는지, 왜 하 회장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지.

하 회장이 부탁한 건 무엇이고 그로 인해 그의 곁에 머물고 있다는 것도.

다 솔직히 털어놓을까.

“그래서 노친네는 너에게 전지훈 기자의 행방을 물었을 거야. 왜? 전지훈이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았거든. 나를 움직이려면 윤정서를 쪼아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본부장님.”

빠앙.

뒤에서 클랙슨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서는 무심코 고개를 틀어 뒤를 돌아보려 했다.

“!”

그러나 그것은 곧장 견에 의해 저지당했다.

정서의 턱을 붙잡은 채 눈을 맞춘 견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 약점이 윤정서였네?”

“…….”

“하 회장, 그 영악한 영감이 너를 약점 잡아 나를 잡으려 하는 거구나.”

“본부장님, 아니. 견아.”

“현명한 우리 윤정서가, 똑똑한 윤정서가.”

“…….”

견의 눈동자가 형형히 빛나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울리던 클랙슨 소리도 차선 변경을 한 뒤 지나쳐 가는 차에 의해 멀어졌다.

뒤차의 운전자가 저를 노려보든 말든 지나가며 욕을 퍼붓든 말든. 

그는 아무런 동요 없이 정서를 응시했다.

“…….”

정서는 숨을 죽였다.

악력을 들이지 않은 손은 힘껏 뿌리친다면 얼마든지 밀어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그걸 몰랐을 리 없는데.”

“…….”

“그럼 알면서도 윤정서는 하회장한테 이용당했단 뜻이고, 그 말은 곧 윤정서가 나를 이용했다는 뜻이고.”

“…….”

“내가 이걸 지금 눈치챘다고 생각하는 건 나를 그동안 천치로 생각했다는 거지.”

“…….”

견이 고개를 숙였다.

부쩍 다가온 견을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정서가 눈 한 번 깜짝 못 하고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갑자기 높아진 밀도 탓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농밀한 열기가 어떻게 이렇게 차가운 눈빛을 품을 수 있을까.

정서는 이제 알았다.

자신은 단 한순간도 견을 속이지 못했다.

하 회장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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