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85)

25.

“너, 너……!”

정서는 주저앉은 채로 손을 뻗어 은호의 다리를 움켜쥐었다.

대뜸 주저앉은 정서를 보고 놀란 듯 따라 몸을 굽힌 은호가 손을 뻗어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쥐어왔다.

은호의 손은 따뜻했다. 

정서를 세심하게 살피는 눈빛도 그랬다.

그래서 정서는 잠시 이해할 수 없어졌다.

어째서 이런 눈으로 보는 걸까, 이 아이는.

자신이 전에 했던 무례하고 무모한 부탁을 뻔히 기억할 텐데.

“괜찮아요?”

“일단 여긴 안 돼.”

은호는 이미 하 회장과 아는 사이였다.

정서가 은호와 접촉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됐다.

다리에 힘을 주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버둥거리는 정서를 본 은호가 곤란한 그녀의 상황을 눈치챘는지 손에 힘을 주어 불쑥 정서를 일으켰다.

“알았어요. 여기가 안 된다는 거죠?”

하 회장의 눈이 되어줄 사람이 득시글거리는 이곳이 안 된다는 것쯤은 은호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길 찾아온 것은 어쩐지 이곳에 정서가 올 것 같아서였고.

“기대요, 편히.”

은호가 정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걸음을 조금 걸을 수 있게 된 정서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갤러리 근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향하자 정문에 서 있던 가드들의 형체도 흐릿해졌다.

“……이제 좀 괜찮아요?”

지하철을 느긋하게 오가는 사람들 틈에 자리를 찾아 앉은 정서 앞으로 은호가 물병을 내밀었다.

정서는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미미하게 남아있던 은호의 온기가 비로소 사그라들었다.

“고마워.”

뚜껑까지 친절히 따서 건네준 탓에 정서는 별 생각 없이 물을 꿀떡꿀떡 삼켰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은호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사람을 너무 잘 믿네요.”

“응?”

“저번에 제가 준 선물도 덥석 받고, 이번에 물도 덥석 마시고.”

“왜. 뭐 탔어? 독이라도?”

“그랬으면요.”

“그랬으면 죽겠지.”

정서는 태연히 말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은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그런 말을 쉽게 해요.”

“정말 탄 거 아니잖아.”

“그래도요. 의심 좀 해요. 주위에 믿을만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닐 거 아니에요.”

“누가 날 죽이려고 음료수에 독을 탔어. 그걸 무슨 수로 피해?”

“안 마시면 돼요.”

“이거 마시지 마?”

“그런 말이 아니고…….”

은호가 답답하다는 듯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정서는 그런 은호의 반응이 의아해 빤히 은호를 살폈다.

그러다 손을 들어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불편하게 그러고 있지 말고 앉아서 말해.”

“의심 좀 해요. 하견이 언제까지 당신 편들어줄 것 같은데.”

“너 되게 하견 싫어한다?”

“싫어요.”

“왜?”

“…….”

“단순히 일 의뢰받아서 하는 거면 굳이 악감정까지 가질 필요는 없잖아. 그 정도로 충직한 애는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그렇게 충직한 애는 아니죠. 하지만 모르죠? 충직하고 싶은 사람을 아직 못 만난 건지도.”

은호는 여전히 아래에서 정서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정서의 손에 들린 물병을 도로 가져가더니 뚜껑을 꼼꼼히 닫아 잠가 주었다.

“하 회장님이 뭐라는데요.”

“어떻게 알았어?”

“뻔하죠. 주말에 갤러리까지 와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럼 나 만날 줄 알고 온 거야? 아, 이건 너무…….”

“너무 뭐요? 왜 말을 하다 말아요.”

“뻔뻔한 생각 같아서.”

정서의 대답에 그제야 은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털썩 옆에 주저앉았다.

코끝으로 아직 때가 묻지 않은 비누 향이 스쳤다.

정서는 순간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어린 애랑 뭐하는 건지.

“되게 뻔뻔하게 생겨서 안 그런 것도 신기한 일인 거 알아요?”

“내가 뻔뻔하게 생겼어?”

“그런 편이죠.”

“…….”

“예뻐요.”

“…….”

“귀여워.”

“너 혹시…… 뭐 잘 못 먹었니?”

“예?”

“아니면 아파?”

이번엔 정서가 얼굴을 찌푸린 채로 은호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은호는 그 모습을 보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모습, 이런 의외의 모습이 귀여웠다.

원하는 자료를 갖겠답시고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던 여자가 이런 얼굴로, 이런 표정을 하고 저를 본다는 것이.

그러니까 견이 정서에게 무엇을 보았든, 그건 진짜다.

정서를 향한 견의 감정이 진짜이므로 은호는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아니, 가져야 했다.

“아파 보여요?”

“하도 이상한 말을 하니까…….”

“나한테 하려던 말 있잖아요. 그거나 해요.”

“아.”

생각해 보니 은호가 곧장 나타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원래는 견에게 먼저 그날 전지훈이 정말로 연락을 했는지, 해서 무슨 말을 전했는지 물으려 했다.

그 답을 듣고 나면 전지훈 집에서 나왔던 은호의 행동을 더욱 원활하게 추궁할 수 있어질 터였으니까.

그러나 먼저 은호가 나타난 이상,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어야 했다.

“어딨어?”

“누구요.”

“전지훈.”

“갑자기 그 사람의 행방을 묻는 까닭은요. 어차피 그 사진은 내 손을 거쳐 하종훈 대표에게 전달됐어요. 알잖아요.”

“알아. 문제는 그게 아니라…….”

번득 생각이 스쳤다.

그럼 전지훈이 견에게 연락했던 것은 은호가 등장하기 전이었던 걸까?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상대를 협박할 수는 없으니, 아마 그럴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자신이 갖고 있는 자료를 빼앗겼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은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들키는 것 정도는 예상했을 테니, 미친개라고 소문난 견이 먼저 자신을 찾아와 해코지하기 전에 손을 쓰려 했을 수도 있다.

그럼 견은 정서의 실패를 알아야만 했는데.

왜 모르는 척 굴었을까?

정서가 은호와 만난 것을 들킨 뒤에 순순히 자백했을 때도 견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단순히 제게 화가 나서 그랬던 것이라 생각했는데,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걸까?

언제, 어디까지?

갑자기 정서는 제가 아는 견이 아득하게 낯설어졌다.

“정신 차려요.”

은호가 정서의 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정서는 일단 생각을 제쳐두었다. 

지금 알아내야 할 것은 다른 것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로 전지훈이 사라졌다는 거지.”

“사진이 없는 전지훈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요. 그게 하 회장이랑 관련 있어요?”

이래서 눈치 빠른 애들은 안 된다니까.

정서는 말을 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둘러댈 말을 떠올려야만 했는데, 어쩐지 은호 앞에서만큼은 그게 잘되지 않았다.

은호가 워낙 투명하고 빠릿하게 대답을 하니 저도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전지훈이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아.”

“그게 뭔지는 모르고요?”

“네가 마지막으로 만났잖아. 그날, 집에서. 근데 왜 어딨는지 모른다는 거야. 설마 너 전지훈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냐?”

“안타깝게도, 아뇨. 만나지 못했어요.”

“뭐?”

“전지훈은 그 집에 없었어요. 내가 그냥 문 따고 들어간 거예요. 그때 마침 당신이 찾아온 거고.”

“빈집을 뒤져서 찾았다고? 거기 사진이 있을지 어떻게 알고.”

“그게 좀 웃긴 얘긴데요. 들어가는 걸 봤거든요.”

“전지훈이 그 집에 들어가는 걸?”

“네. 근데 나오는 걸 못 봤어요. 그래서 찾아갔고, 안에 답이 없길래 답답하니 따고 들어간 거죠.”

“네가 보지 못한 사이에 도망쳤을 가능성은?”

“없어요. 아파트 입구를 지나면 나를 반드시 마주쳐야 했어요.”

“사람이 증발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사라져.”

“그러니까, 저도 그 부분이 의문인데……. 다른 가설이 하나 있긴 해요. 내려오지 않고, 올라간 거죠.”

“뭐?”

“그러니까 우리가 그 난리를 피우는 동안 옥상이나 다른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예요, 전지훈은.”

“왜?”

“우리를 피해서 도망친 거겠죠?”

“굳이? 왜?”

“하견이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견 무서운 사람이잖아요.”

“빈집 딴 네가 할 소리야?”

무심코 뱉은 말에 은호의 표정이 굳었다.

정서는 단순히 제가 무신경하게 말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묘하게 견의 편을 드는 듯한 그녀의 말투가 거슬렸기 때문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전지훈 찾는 거 도와줘요?”

“응?”

“저번에 그랬잖아요. 도와달라고.”

“수락하지 않았잖아, 너.”

“고민해 보겠다고 했었죠.”

“끝났어, 고민?”

“아뇨. 안 끝났어요. 근데 이번 일은 도와줄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알게 되면 나한테도 알려 줘요. 전지훈이 아는 게 뭔지, 왜 우리한테서 도망친 건지.”

“…….”

“약속하면 도와줄게요.”

“찾는 걸 어떻게 도울지 구체적인 방법은 생각했고?”

“하 회장이 못 찾은 거면 웬만한 방법으로는 못 찾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먼저 나타날 수밖에 없는 덫을 놔야죠.”

“그게 뭔데?”

정서는 은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걸까.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어쩐지 얄궂게 생긴 은호의 입술에 향했다.

“사진 우리가 먼저 터뜨려요.”

“뭐……?”

“장소영만 내보내요.”

“…….”

“하견 본부장 이름은 다 빼고 장소영만요. 그럼 자기가 찍은 사진이 풀렸으니, 가만 있진 못할 거예요.”

“이미 그 사진은 네 손을 떠났잖아. 하종훈 손으로 들어간 거 아냐?”

“다른 거래를 하면 돼요. 그건 내가 해결할 문제.”

“…….”

“해결하고 오면 보상이나 톡톡히 해요. 그리고 아까부터 정신 팔린 거 다 티 나요. 보아하니, 하견과 관련된 문제 같은데 그거나 잘 해결하세요.”

은호는 그렇게 말하곤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서는 이대로 은호를 보내도 될지, 은호의 제안을 수락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설령 소영의 열애설만 보도된다고 해도 정말 그 상대가 견이라 유추되지 않을 수 있을지, 그 기사를 본 하 회장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기 전, 은호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고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 정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견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