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85)

24.

고급스러운 외관을 가진 갤러리는 하 회장이 자신의 돈을 세탁하기 위해 애용되는 곳 중 하나였다.

백영 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미술품은 무려 일흔 점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하 회장이 가장 아끼는 그림은 백영 재단 출신의 떠오르는 신예 화가 이중현의 작품으로 제목이 <파멸>이었다.

후원한 대가로 헐값에 넘겨받은 그림의 현재 평가액은 삼십억에 달했고, 하 회장은 자신이 싹부터 알아본 것이라며 주위에 자랑하느라 바빴다.

하 회장은 <파멸> 앞에 서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그를 압도하듯 큰 캔버스 앞에 서서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서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 섰다.

늦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크게 너울거리는 그 물결 안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깊은 바닥 너머로.

그림 속 풍경 안으로 하 회장이 금방이라도 빨려들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림 같은 건 아주 시시한 취미지. 정적이고 지루하고. 그런 취미는 애초에 들이지 않는 게 좋아.’

오래전, 미술 수행 평가로 정서를 그렸던 견을 보고 미대에 갈 생각이냐 지나가듯 물었을 때 견은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대학에 갈 것 같아? 너 생각보다 되게 순진한 구석이 있다.’

그때만 해도, 시험을 치르기 전이었으니 정서는 견의 성적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조금 흥미를 보인 수학을 빼고 나머지 과목은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도 않고 일직선으로 마킹한 뒤 잠을 잔다는 것도.

정작 제 아들이 그리고 제 아들을 낳은 여자의 재능과 실력은 모조리 무시하고 오히려 짓밟기까지 하고선.

태연하게 재단을 설립해 예술에 재능을 보이는 애들을 후원한다는 게 정서의 눈에는 그저 우습기만 했다.

게다가 싹이 보이는 애들은 결과물을 보일 때까지 밀어붙여 어떻게 해서든 좋은 대학에 보내는 백영 재단의 운영 방식을 보면 이중현이 왜 많고 많은 그림 중 <파멸>이라는 그림을 하 회장에게 선물했을지 가늠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저 풍경 안으로 정서가 걸어 들어가기 싫은 이유 또한 명확했다.

하 회장과 한 배를 타고 싶지 않았다. 

그런 위험하고 부도덕한 일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배가 불렀네.’

정서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뇌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돈 되는 일이면 다 했고, 그 결과 사람의 죽음까지 목격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죽음에 일조했다.

그 정도면 더 망가질 게 두렵진 않아야 하는데.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하 회장이 어떤 사람이든 손잡는 것을 망설여서는 안 되었는데.

적어도 그는 그녀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발을 빼게 되는 건.

고작 십 년 전 하견이 윤정서를 그려 줬기 때문일까.

그 구질구질하고 낡은 영원에서, 유일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그였기 때문이었을까.

마치 그 생각이 신호가 된 것처럼 하 회장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정서는 걸음을 옮겼다.

“부르셨습니까.”

“피곤해 보이는군.”

“…….”

“그놈의 씨를 품든 말든,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 개차반 같은 녀석을 아버지로 둘 가여운 아이 생각도 해야지?”

말의 뉘앙스가 미묘했다.

정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가슴께가 치밀어오른 것으로 뜨끈했다.

하 회장은 한 번이라도 견에게 좋은 아버지였나?

이럴 때 견의 편을 들어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아도, 정서는 제 표정이 구겨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미세하게 요동치는 그녀의 입꼬리를 본 듯 하 회장이 작게 혀를 찼다.

“설마 너도 똑같은 거냐.”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그 자식한테 다른 마음이라도 품은 거냔 말이다.”

“아닙니다.”

정서는 틈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이런 답은 확실히 해야 했다.

자신을 배신할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긴다면, 하 회장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어렵게 얻은 자리다. 어렵게 얻은 기회다.

이렇게 쉽게 놓칠 순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문제인가.”

“…….”

“그 자식 곁에 널 둔 건 그나마 그 자식이 네 말은 들어서지, 네가 아니면 아무도 안 돼서가 아니다. 그걸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네가 내게 진 빚이 적지 않다는 것도 알 테고.”

“알고 있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알고 있으면 보여.”

“네?”

“행동으로 보여라. 말로만 보여주는 신뢰는 이제 됐다. 마침 증명할 기회가 생겼어.”

“말씀하세요.”

하 회장은 언제 왔는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 보고 있던 제 비서에게 손짓했다.

하 회장의 뒤에 오래 서 있었다는 것을 들켰을까.

정서는 저의 부주의를 뒤늦게 후회했다.

“이 남자, 본 적 있겠지.”

정서는 하 회장이 내민 사진을 확인했다.

흔들린 사진이었지만, 사진 속 남자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특히 남자가 쓰고 있는 무테 안경, 저거 어디서 봤더라.

“전영데일리 전지훈 기자……?”

“역시 알고 있구나.”

그 사람의 사진을 하 회장이 왜?

의문을 표하는 것도 잠시, 하 회장은 정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뒤로 갤러리를 구경하러 온 대학생 두 명이 감탄하듯 그림 앞에 서는 것이 보였다.

하여, 하 회장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기자가 사라졌어. 우리에게 협박 편지를 보낸 뒤에 말이다.”

“협박 편지요? 그게 무슨…….”

“자세한 사안은 밝힐 수 없다만, 찾아와야만 한다.”

사람을 찾는 일은 정서의 일이 아니다.

찾은 사람과 협상하는 것이 정서의 일이다.

사람 찾는 일은 그동안 하 회장의 일을 도와주던 사람을 시켜 하는 편이 훨씬 더 빠르고 안전할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이번 일을 제게 맡기는 걸까?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이 그 자식, 하견이더구나.”

“예?”

하견?

견에게 직접 연락을 했다고, 전지훈이?

전지훈을 해결하겠다고 한 건 정서였다.

견도 그와 관련해 특별히 뭘 더 묻지 않았었다.

동요하는 그녀를 살피던 하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보나마나 또 나를 협박하기 위해 수를 쓰는 모양인데, 이제 그런 수는 먹히지 않는다. 개새끼면 개새끼답게 주인이 시키는 일을 충직히 수행하면 그만이야. 주인을 물려고 굴면 못 쓰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 실제로 본부장님께 전지훈 기자가 연락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협박의 목적이었을 겁니다.”

“협박?”

“예.”

이쯤 되니,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 회장이 견을 지나치게 견제하게 된다면 그건 정서에게도 불리한 일이었다.

정서는 스캔들을 달고 살았던 견이니, 차라리 스캔들을 들켜 협박받았다고 털어놓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배우 장소영과 다투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장소영 씨가 마침 백영미디어에서 준비 중인 드라마에 출연할 예정이었고요. 최근 가장 주목받는 배우이니 눈길을 끌었을 겁니다. 본부장님께도 당연히 타격이 있을 터고요. 그러니 전지훈 기자가 본부장님을 상대로 거래를 제안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배우와 또 스캔들이 나?”

어이가 없다는 듯 하 회장의 언성이 커졌다.

근처에서 작품을 관람 중이던 이들의 시선이 하 회장을 향했다.

하 회장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것 때문에 전지훈이 그 자식에게 연락했다고?”

“예, 아마도요. 저 역시 전지훈 기자가 사진을 찍은 것을 알게 된 후 찾아가 협상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아직 출근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그 자식과 연락한 뒤로 사라진 것은 분명하잖아. 그렇다면 뭔가 알고 있겠지. 무슨 수를 써서든 그 기자를 내 눈앞으로 데리고 와. 알겠어?”

“……알겠습니다.”

이번엔 머뭇거릴 수 없었다.

그간의 일로 이미 하 회장이 자신에게 가진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을 게 뻔했다.

정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돌아서려던 때에 하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아비라는 작자 말이다.”

툭.

정서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 회장은 그런 그녀의 변화를 기민히 살피는가 싶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거만스레 웃었다.

본인이 상대의 약점을 명백히 쥐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태도였다.

“그 작자가 너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은 모양이더구나.”

“……계속 연락하시는 겁니까?”

정서는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어 물었다.

하 회장은 고개를 들어 저를 응시하는 정서와 눈을 맞췄다.

그 눈빛에 새겨진 경멸은 꼭 저를 볼 때 견의 눈빛과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

‘이래서 요즘 것들은 안 돼. 낳아 준 은혜를 모르지.’

직접 낳지도 않은 주제에 그리 생각한 하 회장이 입을 열었다.

“감히 천한 범죄자가 나한테 연락하는 일이 쉬울까. 다만 네 이야기에 흥미가 생길지 모르니 생사 정도는 보고 받을 뿐이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굳이 아버지 일이 아니더라도 저는 회장님의 편이니까요.”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증명해, 네가 내 편이라는 것을.”

정서는 그 말에 더 무어라 덧붙이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틀었다.

갤러리를 빠져나오는 동안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서의 아버지, 윤희창은 정서의 삶에 단 한 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될 때마다 정서의 가슴은 홧홧해지고 손이 떨렸다.

그녀의 주위를 맴돌면서 희창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희창은 하 회장의 돈이 필요해 하 회장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정서를 압박하고 불안하게 하기 위해 접근한 것일 터였다.

윤희창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윤정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

“……저기요.”

정서가 갤러리를 빠져나오자 머리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우선 전화를 해 물어야지, 견에게.

전지훈과 통화했냐고, 전지훈이 무어라 하더냐고.

그리고 어디로 사라진 건지 유추할 수 있겠냐고.

왜냐고 물으면 이번엔 순순히 하 회장이 찾는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지훈이 본 건, 역시.

역시…….

“윤정서 씨.”

정서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정신이 든 사람처럼 느릿하게 돌아섰다.

그녀의 뒤에 서서 슬쩍 얼굴을 찌푸리고 선 것은, 은호였다.

“……차은호?”

“무슨 일이에요? 사람이 종이처럼 하얗게 질려선.”

“…….”

맞아, 차은호다.

이 남자를 찾아야 했다.

그걸 안 순간 정서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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