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85)

23.

‘윤정서. 나와.’

정서는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울그락불그락 한 얼굴에 이마에 바짝 선 핏대가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들의 시선이 전부 저를 향한 것이 느껴졌다.

정서는 걸치고 있던 체육복 상의를 벗어 내려두며 몸을 일으켰다.

저벅저벅.

교실 문으로 향하는 걸음마다 와 붙는 시선 중에 견의 것이 있을까.

정서는 문득 생각하고 그 생각을 곧장 후회했다.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하게.

보고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교실 문에 이르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돌아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불꽃이 튄 것은 덤이었다.

별빛이 아롱거리듯 시야가 깜빡이며 점멸했다.

두껍게 머리를 내려친 것이 출석부인지 매일 끼고 다니는 수학의 정석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이 미친 X이 공부 좀 잘한다고 봐줬더니, 눈에 뵈는 게 없지?’

수학 선생이 봐 준 거라고는 그녀의 가슴팍밖에 없다.

심심하면 한 번씩 그녀를 불러내 문제를 풀게 하고 내내 교복 블라우스만 보고 있는 선생을 정서가 모를 리 없었다.

자란 탓에 블라우스가 꽉 끼어도 새 블라우스를 살 돈이 없었다.

다음에 사야지, 사야지 되뇌며 아이들의 과제를 밤새워 다 해 주었지만, 돈 들 일은 너무나 쉽게 생겼다.

‘네가 감히 우리 집으로 편지를 보내? 그것도 누가, 뭐를, 어떻게, 한다고?’

모든 악행에는 꼬리가 있다.

나쁜 사람이라고 반드시 벌을 받지는 않지만, 그렇게 공평한 세상은 단 한순간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리를 악착같이 끌어당기면, 어딘가에서 반드시 태가 나기 마련이다.

말이 툭툭 끊길 때마다 정서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퍽 퍽 소리가 이어지자, 교실과 복도가 죄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고 나서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입술과 코에서 매캐한 맛이 느껴졌다.

툭, 투둑.

아래로 떨어진 핏방울이 블라우스를 적시고 나서야 알았다.

피가 나고 있다는 것을.

‘……!’

영원은 작은 마을인 데다, 여전히 구닥다리 생각을 가진 어른이 많아서.

그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 역시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도 않는 아이들이었지만, 지금 풍기는 냉담한 분위기와 도를 지나친 듯한 분노에 아무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정서에게 맨 처음 든 생각은 피가 잘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블라우스가 달랑 한 벌이라 학교 끝나자마자 빨아 널리고 마르지도 않은 것을 낡은 드라이기로 몇 분을 말려야 했는데.

그 한 벌마저 피가 묻었으니 이걸 어떻게 지우나 싶은 생각이었다.

손수건을 꺼내 코를 틀어막고 싶지만, 그런 저를 보고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몸을 앞으로 기울여 피가 바닥에 떨어지도록 두는 일뿐.

끼이익.

그때였다.

의자가 시끄럽게 마룻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어 발소리가 들렸다.

마룻바닥이 소리를 머금으며 정서의 몸이 약하게 떨렸다.

분해서일까, 아니면 두려워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뭐가 두려워.

그럴 리 없잖아.

그럼 대체 이 떨림이 어디서 오는 걸까.

정서의 앞에 선 선생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곧이어 정서의 위로 옅은 그림자가 졌다.

그 그림자는 정서를 모조리 덮어 삼켰다.

‘뭐야, 너는.’

‘별건 아닙니다.’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정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쩌면 뒤에서 기척이 느껴질 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기척의 주인이 누군지, 그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

그래서 그녀가 조금 떨었다는 것까진, 그녀 역시 몰랐지만.

‘뭐라고?’

‘별건 아니라고요.’

선생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되묻자 견은 다시 말했다.

그러곤 이번에는 손을 쭉 뻗어 수학 선생이 입고 있는 빳빳한 와이셔츠 주머니에 꽂힌 분필 하나를 집어 올렸다.

아그작, 아그작.

정서는 이어 들리는 믿을 수 없는 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돌아보니 견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분필을 씹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본능적으로 정서는 손을 뻗어 견을 저지하려 했다.

견은 태연한 얼굴로 선생을 응시하며 분필을 씹었다.

입술에 묻은 흰 가루가 슈가 파우더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잔인하고 아름답게만 보일까.

분필을 먹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표정 때문일까.

‘야, 너 뭐 하는 거야.’

선생의 물음에 대답이 없이 씹은 분필을 꿀떡 삼킨 견이 남은 분필을 도로 선생의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정서의 어깨에 둘렀다.

‘……!’

그녀의 몸이 견의 품으로 쏘옥 빨려 들어갔다.

그건 이제껏 그녀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아주 친밀한 접촉이었다.

바짝 굳은 정서의 어깨를 바짝 끌어안은 견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그녀가 느낀 선생에 대한 경멸도, 무관심과 방관으로 일관한 아이들에 대한 지리멸렬함도.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선생님, 학생에게 분필을 먹이면 어떻게 해요.’

‘뭐 이 새끼야?’

‘저 분필 알레르기가 있어요. 그래서 뒤에 앉잖아요.’

‘…….’

‘이제 곧 제 기도가 부어오르고 발진이 오를 거예요. 운이 나쁘면 전 죽겠죠.’

정서가 퍼뜩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견은 그런 정서를 향해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물과 같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서 눈빛은 왜 그렇게 뜨거워.

정서는 이 와중에도 그게 궁금해진 자신을 책망했다.

‘내가 언제 먹였어. 어? 여기 있는 애새끼들이 다 봤어. 네가 직접 입에 처넣는 거. 미친놈처럼 분필 씹어 먹는 거 다 봤다고.’

‘정서야, 아니지?’

‘…….’

‘저 선생이 나한테 분필 먹였잖아, 맞지.’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인다.

곧 기도가 부풀고 발진이 돋을 거라면서,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정서가 눈을 크게 치켜뜨며 반사적으로 견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119를 불러야 한다.

알레르기는 무조건 빠르게 반응해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학교니까, 어쩌면 의무적으로 보건실에 약을 구비해 뒀을지도 모르고.

‘야, 하견. 너 오냐오냐하니까 지금 선생이 X으로 보여?’

‘예.’

‘……뭐?’

‘제가 어쩌다 이 학교에 전학 왔는지 들으신 바가 없어 보이셔서요. 설령 제가 자발적으로 분필을 먹었다고 했더라도 책임을 면하실 순 없을 겁니다. 저에겐 이 든든한 증인이 있으니까요.’

견은 정서의 어깨를 한 번 힘주어 끌어안고는 놓아 주었다.

그리고 정서가 쥐고 있는 자신의 팔을 끌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복도를 걷는 둘의 뒤를 따르는 시선 따위는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야, 하견. 너 지금 어디 가? 보건실 가는 거지? 나 핸드폰 없어, 지금. 신고하려면 교무실로 가서. 아니다, 우선 보건실 가서 응급처치부터 하고…….’

‘어지러워?’

‘뭐?’

‘너 지금 말 느려졌어. 뇌진탕일지도 몰라.’

‘…….’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입꼬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발음이 조금 어눌해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말 분필 알레르기라면, 그래서 견이 죽을 수도 있는 거라면.

그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너 지금 죽을지도 모른다며. 어디서 들었는데, 알레르기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없어.’

‘뭐?’

‘그런 알레르기 없다고, 나. 정확히는 분필 알레르기 대신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지.’

‘……뭐?’

견은 뚝 멈춰 선 정서의 앞에 마주 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 보였다.

손가락 끝이 좌우로 느릿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뚝 멈췄다.

‘윤정서.’

‘…….’

‘여전히 손수건 거기 들어 있어?’

손수건이 블라우스 속에 있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진짜 미쳤냐고.

거짓말할 게 없어서 그딴 걸 거짓말을 하느냐고.

잠시나마 네 심장이 진짜로 멈출까 봐, 그래서 그 오만한 얼굴을 다시 올려다보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했던 내 마음은 다 뭐냐고.

그렇게 물어야 하는데.

몸이 기울었다.

쓰러지며 상체가 기우는 그녀의 몸을 붙든 것도, 껴안은 것도.

깜빡이는 정신 속에 들어온 너른 등과 쿵쿵 뛰던 심장도.

전부 견의 것이었다.

아니, 견의 것이었을까.

&

― 윤 변호사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정서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견은 지난밤 세 번째로 그녀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여전히 그 청혼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열이 받은 것은 정서였지만.

‘내 방에서 자도 돼.’

‘거절하겠습니다.’

‘예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네. 씻고 쉬어, 내일 보자.’

견은 가뿐하게 그녀를 놓아주었다.

덕분에 밤새 뒤척인 그녀는 제법 피로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혹시 견이 있을까 조심스럽게 밖을 나왔으나, 견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미희 역시 오늘은 오는 날이 아닌지 집은 조용하기만 했다.

“어디로 가면 되나요?”

일정에 없던 만남이다.

직접 연락하는 대신 수행원을 통해 연락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 자택 앞입니다.

“아, 저 지금 제가 자택이 아니라…….”

― 본부장님 자택 앞입니다.

예?

너무 놀라서 되물음이 튀어 나갔다.

정서의 집 앞이라고 해도 당황했을 텐데, 견의 집 앞이라니.

물론 마음먹으면 정서의 소재지 정도 파악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겠지만, 결혼하겠다는 도발을 듣고서도 구태여 견의 집으로 사람을 보낸 거라면.

이쯤에서 그만하라는 무언의 압박일까?

아니면 어떻게 하려는지 두고 보겠다는 뜻?

어떤 쪽이든 정서에게 좋은 시그널은 아니었다.

계획이라는 것을 세울 여유가 없는 삶이었지만, 적어도 단 한가지는 확실했기 때문이다.

결혼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학창시절 치기 어린 마음에 견을 궁금해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서는 누구에게 한 번도 이끌려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견이라면? 

그렇다고 달라질 게 있나?

― 나오세요. 회장님, 기다리십니다.

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정서는 우선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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