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85)

21.

정서가 뒤를 돌아보자 손에 무언가를 든 채 서 있는 은호가 보였다.

오토바이에 무지한 정서가 보기에도 나름 비싸 보이는 오토바이를 옆에 세워 둔 채로 은호는 쓰고 있던 헬멧을 벗었다.

얼마나 달려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까워지는 은호에게선 옅은 바람의 냄새가 났다.

“못 알아볼 뻔했네.”

“이 정도면 잠옷도 아니고 예의 갖춘 거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난 이쪽이 더 마음에 들어요. 그렇게 다 갖추고 만나는 건 지루하고 식상하잖아.”

“…….”

“왜 그렇게 경계해요? 나 그쪽 비난할 마음도, 싫어할 마음도 없는데.”

괜히 찔려서 혼자 공격적으로 말했다.

은호의 속을 영 알 수 없어서도 있겠지만,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좀체 보일 일이 없으니 더욱 그랬다.

“왜?”

“네?”

“내가 성가시지 않나?”

“글쎄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하견을 감시하고 방해하는 게 목적이라면, 내가 걸림돌이 될 테니까.”

은호는 손을 들어 눈썹을 긁적이는가 싶더니 어깨를 으쓱 들었다가 내렸다.

그리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정서에게 내밀었다.

유명 운동복 브랜드의 로고가 적힌 쇼핑백 속에 든 것은 신발 상자였다.

“이게 뭐야?”

“운동화요. 여기 구두 신고 왔을까 봐.”

“운동화 신었는데.”

“그럼 버릴까요?”

“……받을 이유가 없는데.”

“만들면 그만이죠. 만들어 드려요?”

은호의 물음에 정서는 전의를 상실했다.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정서가 손을 뻗어 은호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가져왔다.

“그래, 그럼 잘 받을게.”

“뭐야. 귀찮은 사람처럼. 이렇게 심심하게 받으면 섭섭한데.”

“다른 얘기로 씨름하는 게 낫지 않나? 어차피 우린 씨름해야 하는데.”

“그래요, 그럼. 우선 넘어가 드릴게. 따라와요.”

공원 안으로 들어서는 은호를 따라 정서가 걸음을 옮겼다.

은호는 푸른색 블루종을 입고 있었는데 등에 새가 그려져 있었다.

꼭 그게 어디든 훨훨 날아다니는 그의 자유로운 성격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정서는 무심코 생각했다.

이런 옷을 견은 입은 적이 있을까?

제법 어울릴 것 같은데.

“마음에 들어요?”

“응?”

“외투 말이에요. 빤히 보길래.”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니면 추운가? 바람이 제법 차죠.”

“아니, 그건 더더욱…….”

은호는 정서가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아무렇지 않게 지퍼를 내렸다.

안에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가 드러났다.

흰 무지 티셔츠에 괜히 판판한 가슴이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아 정서는 민망해졌다.

“됐으니까 입어.”

“저는 더운데?”

“바람 차다며.”

“그러니까. 저 어리잖아요?”

은호는 당돌했다.

정서의 어깨에 아무렇지 않게 제 옷을 툭 걸쳐 주고는 제가 줬던 쇼핑백을 다시 거둬왔다.

“줬다가 뺏어?”

“이따 줄 거예요. 생각해 보니 지금 주면 짐이잖아.”

“됐으니까 이제 말 좀 하지?”

“맨입으로?”

“원하는 걸 얘기해. 먼저 연락한 걸 보니 원하는 게 생긴 거잖아.”

“맞아요, 생겼어요. 근데 우선은 저것부터.”

은호가 손으로 가리킨 것은 공원 한편에 위치한 구멍가게였다.

정서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은호는 그녀의 손목을 턱 잡아끌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구멍가게 안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주인은 꽤 나이를 먹은 노인이었다.

은호가 인사를 건네도 고개를 한 번 돌려 쳐다볼 뿐 별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씩씩했다.

기가 죽은 기색이 없이 입구에 걸린 꼬리연을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걸음을 옮겨 두유 두 개를 집어 들었다.

“현금 있어요?”

“있어.”

정서는 호기롭게 말하고는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마저 두고 온 정서가 택시를 잡기 전 머뭇거리자, 자초지종을 들은 미희가 오만 원짜리 두 장을 턱 내밀어 준 것이다.

택시비를 현금으로 내고 거슬러 받은 잔돈이 있어 다행이었다.

“자, 여기.”

“돈 많네. 사장님, 솜사탕은 얼마예요?”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을 뿐인데 그걸 보고 돈이 많다니.

소박한 건지, 비꼬는 건지 영 알 수 없었다.

알아서 돈을 거슬러 주는 노인에 웃어 보인 은호가 두유 두 병과 솜사탕 하나를 챙기고는 정서에게 뭐 하냐는 듯 눈짓을 했다.

정서는 그제야 손을 뻗어 노인에게서 거스름돈을 받았다.

“애도 아니고.”

“나 정도면 애 아니에요?”

“…….”

“여기 앉아요. 여기가 명당이야. 저기 보이죠? 저기 다 불 들어올 걸, 이따가.”

“너랑 한가롭게 이러려고 온 거 아니야.”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목 좀 축여. 설마 두유 편식하는 거 아니죠?”

정서는 제 속을 긁듯 묻는 은호의 말에 두유 병을 따 바로 입에 가져다 댔다.

꼴깍꼴깍.

잘 넘기는 정서를 본 은호가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재밌는 여자였다, 볼수록.

“이제 말해야겠네. 궁금한 게 뭐예요, 정확히?”

“네가 누군지, 누굴 위해 일했으며 그때 가져간 파일을 누구에게 건네줬는지. 그리고 그 기자 출근 아직도 안 했던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날?”

“질문이 너무 많아요. 두 개로 줄여요.”

“그 사진 파일, 누구한테 줬어?”

정서는 그렇게 물으며 은호를 보았다.

아까 조금 부드러워 보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조금은 날카롭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하종훈이요.”

“하종훈? 그게 누구…….”

아, 생각났다.

정서는 백영 그룹 계열사 중 가장 작은 규모로 하루가 멀다고 매각 얘기가 나오는 백영 식품을 떠올렸다.

창립된 이후 하 회장의 아버지인 선대 회장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유망주로 떠오르던 때도 있었으나 하 회장이 회장에 오른 뒤 지원이 뚝 끊겼다.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하 회장과는 열 살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종훈이 하 회장을 견제하는 것 정도는 이상할 일도 아니었으나.

왜 그 시선이 견을 향했는지는 의문이었다.

종훈이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하 회장과 견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그건 백영에 일하지 않는 사람조차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 대표님이랑 무슨 사이인데?”

“그게 두 번째 질문이에요?”

“아니, 아니야.”

“신중하세요. 질문 하나 남았잖아.”

은호는 그렇게 말하고 두유를 단숨에 비웠다.

뚜껑을 도로 닫으며 생각에 잠긴 정서를 가만히 보던 은호가 솜사탕을 정서에게 건넸다.

“안 먹어.”

“들고만 있어요.”

“왜?”

“보고 싶어서.”

“뭐?”

“솜사탕 같은 부드러운 거 들고 있는 모습 보고 싶어서요.”

“너 좀…….”

“이상하다고요? 알겠어요. 질문 하나 늘려 줄게.”

어째 휘말리는 것 같다.

정서는 그것을 빤히 알고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솜사탕을 들었다.

이상하다.

이 남자애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경계심이 들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더 경계해야 할 사람임이 분명한데.

의심하고 선을 그어야 할 사람인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풋.

더 참지 못하고 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서가 사나운 눈초리로 보자, 은호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잘 어울려서 그래요, 잘 어울려서.”

“질문 하나 더. 그 사진을 넘긴 다음 복사본을 만들거나 별도로 네가 한 행동은 없는 건가?”

“없어요. 귀찮기도 하고, 아직 필요가 없기도 하고.”

은호의 대답은 심플했다.

마지막으로 질문이 하나 남았다.

무엇을 물어야 할까.

종훈의 아래에서 일하면서 왜 하 회장을 만났는지?

대체 백영 그룹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돌아가면서 만나는 건지?

하지만 그런 것을 묻기 전에, 알아내기 전에 물어야 할 것이 따로 있을 것만 같았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다.

정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답답해 습관처럼 가슴께를 문지르자, 힐긋 그것을 본 은호가 손을 뻗었다.

“줘요.”

“응?”

“내가 먹으려고.”

“아, 응.”

은호의 입에서 솜사탕은 녹아 사라졌다.

그 큰 솜사탕이 몇 입 만에 사라지는 것을 보자 조금은 허무했지만, 입가에 흔적을 남긴 은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 마요.”

“응?”

“하견 뒤 봐 주는 일 하지 말라고.”

“……왜?”

“안 어울려요.”

“네가 뭘 알아.”

“내가 모르는 뭔가가 많고 막 그래요? 그건 그거 나름대로 좀 기분 나쁜데…….”

네가 기분 나쁠 게 뭐가 있는지.

정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소리 내 묻진 않았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지자, 은호의 말처럼 아래 동네에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 풍경이 꼭 밤하늘에 별이 켜진 듯 예뻐서 정서는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내뱉었다.

“마음에 들어요? 답답한 안에서 만나는 것보다 낫죠?”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

“뭐가요?”

“왜 연락한 거냐고.”

“그냥요. 그 빌미로 얼굴 보면 좋잖아요.”

“…….”

“안 믿겨요?”

너라면 믿겠냐는 눈빛으로 정서가 은호를 보자 은호가 솜사탕이 달려 있던 나무젓가락과 텅 빈 병 두 개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 와중에 착실하게 분리수거까지 하는 것을 보니 쓰레기를 직접 버리는 습관이 들어 있는 사람이었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해 준다.

정서가 본 은호는 장난기가 다분히 섞인 스물셋의 남자, 생활력은 강해 보이고 능청스러운 것이 제법 고생하며 자랐을지도 모르고.

고급 바이크를 타고 다닐 만큼 씀씀이가 적지 않으면서도 부자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가진 것이 많았다가 잃은 걸까.

그래서 이런 일이라도 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하 회장이나 종훈과의 커넥션도 그때 이미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지막 질문 킵해둘래요? 다음에 생기면 묻든지.”

은호가 선심 쓰듯 뱉은 말에 정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날 도울 생각이 있어?”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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