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정서’였다.
정확히는 십 년 전의 그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까는 미희에게 끌려가느라, 정신이 팔려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그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비록 뒷모습이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머리끈 때문이었다.
하나로 묶인 머리에 자리한 머리끈은 그 당시 늘어지도록 하고 있던 붉은색 머리끈이었다.
언젠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사 주었던, 동그란 방울이 하나 달린 그 머리끈.
내내 하고 다니다가 잃어버린 줄도 모르게 잃어버린 그 머리끈.
이 그림은 미술 수행평가 시간에 견이 그렸던 그림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그리라는 선생의 말에 다들 좋아하는 연예인을 그리거나, 키우는 반려견을 그릴 때에.
견은 그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대뜸 이젤을 정서의 뒤로 옮겨 앉았었다.
정서가 힐긋 돌아보자 견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가만히 있어. 뒷모습이 그리기 쉬우니까.’
‘날 왜 그리는데.’
‘그럼 너도 나 그리던지.’
‘……보이지도 않는데.’
‘그럼 거울 보고 널 그려.’
됐다.
정서는 그때 더 대화하기를 단념했다.
견이 제멋대로 구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으니 이상하게 볼 것도 없었다.
그렇게 세 번의 수업 시간이 지났다.
늘 뒤집어 두어 확인할 수 없었던 견의 그림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확인하였을 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경했다.
고작 뒷모습인데.
흰 캔버스를 앞에 두고 앉아있는 ‘정서’의 뒷모습일 뿐이었는데.
그릴 것이 없으나 성적을 떨어뜨릴 수 없어 그리기 쉬울 것을 상상하고 있는 뒷모습일 뿐이었는데.
그런 성마르고 영악한 꾀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너라면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고 응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따스한 느낌이, 견답지 않은 따스한 느낌이 그림으로 전해졌다.
견에게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붓터치와 감각적인 색조합 등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림을 이렇게 잘 그렸었나.
수업 시간에 하릴없이 공책 한쪽에 낙서하는 것을 본 것도 같았는데.
기하학적인 무늬나, 의미를 알 수 없는 선들의 나열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재능이 있구나.
견도 좋아하는 게 있구나.
그것을 견의 그림을 보고 정서는 처음 알았었다.
물론 그 얘기를 견에게 하지는 못했다.
학기가 끝나고 수행평가가 마무리되기 전, 견은 떠나 버렸으니까.
“이렇게 보니까 닮았네요.”
어느새 곁에 온 미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서는 그제야 뒤늦게 제 표정을 가다듬었다.
“네?”
“그림 속 여자애랑 닮았다고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대답도 없이 막 웃더라고.”
“…….”
“정서 씨 맞죠?”
“……글쎄요.”
정서는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아직 미희에게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들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미희는 정서의 모호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엄마를 닮아서 그림은 잘 그렸는데.”
“어머니가 그림을 잘 그리셨나요?”
“아, 그랬죠. 미대를 합격했었어요. 돈이 없어서 지원도 못 할 뻔했는데 어디서 원서 접수비가 났는지 꾸역꾸역 합격해서 집안을 발칵 뒤집었었죠. 물론 가지는 못했어요. 나름 좋은 학교였는데, 그때 어떻게 해서든 보낼걸 그랬나 봐.”
“…….”
“어디서 이상한 놈 눈에 들어 배불러 돌아올 줄 몰랐으니까, 그때만 해도.”
이상한 놈.
미희가 말하는 이상한 놈은 보나 마나 하 회장일 것이다.
정서가 침묵하자, 미희가 무안한 듯 웃었다.
“내 정신 좀 봐. 또 무심코 욕을 해 버렸네. 나중에 견이 알면 혼내겠다. 비밀로 해 줘요, 내가 이런 말 한 건.”
“괜찮습니다. 잊었어요.”
“고마워요. 그럼 식사 마저 하죠. 집 구경은 식사 마치면 천천히 시켜 줄게요.”
정서가 자리로 돌아갔다.
남은 죽을 말끔히 비운 정서를 뿌듯한 얼굴로 본 미희는 설거지하겠다는 그녀를 극구 말렸다.
“아직은 손님이잖아요. 손님은 대접받아 마땅하지. 그리고 나 이거 공짜로 해 주는 거 아니에요. 견이가 돈 많이 줘요.”
“그래도 제가 먹었으니 제가 치울게요.”
“이모라고 특별대우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나도 내 일은 해야죠. 그래야 떳떳하게 돈 받을 수 있어요.”
미희는 고집이 완강했다.
하는 수 없이 정서는 자리에서 물렀다.
새 칫솔까지 쥐여주는 바람에 곧장 욕실로 향해 이까지 닦아야 했다.
이를 닦고 나와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정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내내 팽개쳐 둔 것이 생각나 확인해 보니 막 견의 문자가 도착한 것이 보였다.
「빨리 가고 싶은데 늦어질 것 같아. 먼저 자도 돼.」
먼저 자라니.
이 무슨 간지러운 말이란 말인가.
답을 하지 않고 다른 연락을 확인했다.
하 회장의 부재중 전화 한 통과 연달아 도착한 문자 메시지에는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보나마나 한마디 하려 부르는 것이었다.
“가기 싫다…….”
중얼거린 정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손님방치고는 지나치게 넓은 침대가 낯설게 느껴질 즈음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여기서 깨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손님방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방의 구조를 보았을 때 이 방은 절대 손님방이 아니다.
얼핏 열린 문 안쪽으로 보이는 잘 정리된 견의 양복들과 그 옆에 놓인 욕실 문만 보아도 확실했다.
여긴 견의 침실이었다.
“미쳤어, 하견.”
그럼 자기 이모가 있는 집에 여자를 들여, 제 침실에서 재운 거란 말인가?
그러면서 그녀의 식사를 부탁했다고?
미친 거지, 미친 거.
아마 지금 정서의 눈앞에 견이 있었다면 정서는 그를 노려보는 것만으로는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실수인 척 등이라도 한 대 때려야 속이 시원했겠지.
지이잉, 지이잉.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전화였다.
저장해두지 않은 번호였으나, 이미 눈에 익었다.
은호였다.
차은호가 이 시간에 다시?
전화를 건 이유가 궁금했으나, 오래 고민할 수 없었다.
그러다 끊길지도 몰랐으니까.
“차은호, 나야.”
― ……나 기다렸어요? 되게 반갑게 맞아 주네.
“만나. 만나서 얘기해.”
― 안 그래도 만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보고 싶었던 참이거든요. 내가 준비한 서프라이즈는 잘 받았어요?
“서프라이즈?”
― 이 상무 일 말이에요. 지금쯤이면 차 회장이 노발대발했을 텐데?
“그걸 전한 게 너야?”
― 좀 됐는데 사진이 없었거든요. 갖고 싶은 게 생겨서 연락했더니 받으시던데요? 그쪽도 증거가 있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니까.
“너 대체 뭐 하는 애야?”
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게 정서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정서가 모르는 일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게다가 직접 하 회장을 만나 거래까지 했다는 것을 보니 어쩌면 은호는 정서보다도 더 오래 견의 곁을 맴돌았을지도 모르겠다.
견을 다시 만나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공백의 시간을 정서는 모른다.
견이 어떻게 본부장이 되었는지, 무슨 준비를 했고 무엇을 담보로 하 회장이 그 자리를 넘겨 주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 대학생이라니까요. 아, 전공은 수학교육이요. 근데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요새 애들이 무섭더라고.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야. 가지고 놀 거면 만나서 해.”
― 놀아 주시게요? 알았으니까 어디예요? 데리러 갈게요.
“……됐어, 내가 갈게.”
― 지금?
“지금.”
― 알았으니까 그럼 조심히 와요. 주소는 문자로 보내 줄게.
전화가 끊겼다.
정서가 옷을 갈아입으려 몸을 일으켰으나, 생각해 보니 여긴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너무 캐주얼한데.
맨투맨 티셔츠에 슬랙스, 운동화 차림으로 만나도 되는 걸까?
그동안 자신이 보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다른 옷과 구두를 사는 것도 유난이지.
헤어지고 들어오는 길에 짐을 챙겨와야겠다고 생각한 정서는 하는 수 없이 원래 차림으로 침실을 빠져나왔다.
마침 정리를 마친 미희가 정서를 발견한 듯 다가왔다.
“나가게?”
“아, 잠깐 일이 생겨서요. 저녁 약속 있으시다고 하셨는데…….”
“응, 나도 나가 보려던 참이야. 당분간 여기서 지낸다고 했지? 나는 이틀에 한 번씩 오니까 자주 보겠네, 앞으로.”
“아, 같이 지내시는 건 아니시고요?”
“아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큰 총각이랑 한 집에서 어떻게 지내. 내가 싫어, 내가.”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식사 맛있게 하시고요.”
“그래요. 불편한 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요. 아, 내 정신 좀 봐. 핸드폰 번호도 안 가르쳐 주고 그런 부탁을 했네.”
“제 번호 알려드릴게요.”
정서는 버스 정류장까지 미희와 같이 걸은 뒤 미희가 버스를 타는 것을 보고 나서야 택시를 잡았다.
“아, 이렇게 가까운 거리는 원래 안 태우는데 아가씨가 예쁘니까 특별히 태워 드리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근데 여기가 가까워요?”
“바로 요 앞이잖아. 몰랐어요?”
“아, 몰랐어요. 목적지 이름만 알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다 왔네. 여기로 쭉 올라가면 돼요.”
정서가 설마 견의 집에 있는 것까지 알고 불렀나?
은호가 불러 준 곳은 견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원이었다.
카페도 아니고 공원이라니.
왜 하필 이런 곳으로 불렀나 싶은 정서의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혹시나 해서 일부러 운동화도 챙겨 왔는데. 보람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