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85)

18.

고루고루 손봐 준 솜씨로 보나, 망가진 꼴을 하고 찍힌 곳이 호텔방이라는 것으로 보나.

견의 작품임이 분명했다.

대체 언제?

정서는 견의 거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했다.

그런 그녀가 모르게 움직였다니.

“……하, 들켰네.”

견이 쓰게 웃으며 사진을 구겼다.

제법 빳빳한 인화지였음에도 견의 손안에 있으니 얇은 종잇장 구겨지듯 구겨질 뿐이었다.

“저한테 관심이 지대하시네요. 정서도 그 정도는 아닐 텐데요.”

“그게 문제 아니냐? 윤 변호사가 모르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

“…….”

정서는 두 사람의 대화에 화두로 제가 거론되자 더 이상 모르는 척 물러 있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었다.

십 년 전에는 자신을 물어대는 사람들을 똑같이 물어 주는 것만이 정답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윤정서는 이제 없었다.

꺾이지 않는 고개를 가지고 살 수 있으려면, 가진 게 많아야 했다.

자신처럼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면 고개를 숙이는 일을 두려워해서도, 어려워해서도 안 됐다.

정서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하 회장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 회장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정서가 곧장 고개를 숙여올지 몰랐던 모양이었다.

물론, 정서는 저 혼자 살고자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이 이상 견과 하 회장이 충돌하면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마침 영원에서 대형 프로젝트가 진행되려는 때에 견의 입지를 굳히는 편이 좋았다.

설령 하 회장이 그녀를 견을 망가뜨리는데 이용할 생각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그를 따라 견을 망가뜨려야 할지라도.

적어도 이 순간에는 견에게 충실하고 싶었다.

“이상한 타이밍에서 시시하게 구네.”

그러나 견이 그걸 순순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딱딱히 굳은 견의 목소리가 정서의 귓전을 울렸다.

뚜벅뚜벅.

바닥을 울리는 견의 구두 소리가 정서의 옆에서 멎었다.

그녀의 어깨를 쥐어 올리는 그의 손길이 거침없었다.

기분이 나빴음에 틀림이 없다.

알지만 정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윤정서.”

“만약 이 상무께서 문제를 제기하셨다면 제가 직접 가 상황을 마무리 짓고…….”

“윤정서.”

견은 한 번 더 이름을 부르진 않겠다는 듯 낮고도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힐긋.

정서와 견을 번갈아 보던 하 회장이 입을 열었다.

“제 사람이라고 싸고도는 거냐.”

“예. 잘 아시네요. 윤정서는 제 사람인 거.”

“그럼 너도 알 때가 된 것 같은데. 네 사람이 남에게 무릎 꿇지 않기 위해선 네가 처신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가요? 이 상무가 쥐도 새도 모르게 해외로 출국해 안도하셨다 들었는데. 그건 다 헛소문인가?”

정서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견이 이 정도로 확신에 차 있는 것은 정말로 하 회장에게 이 상무의 부재가 도움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추론은 맞은 듯했다.

하 회장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은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상무를 그냥 돌려보내진 않았을 테지.”

“아,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세요? 들키면 곤란한 비밀 장부 관리라든지. 뭐 그런 구린 거라도 맡긴 모양이네.”

하지만 견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하 회장이 불편할 말만 쏙쏙 골라서 하는 것이, 오늘은 작정하고 심기를 거스르려는 것 같았다.

방금 그녀가 섣부르게 사과해서일까?

아니면 하 회장과 다른 일로 이미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나.

구태여 이렇게까지 날을 세울 필요는 없는데.

하 회장의 얼굴이 일순 차게 굳는가 싶더니 눈에 빛이 번득였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견이 정서를 두고 하 회장을 향해 한 걸음 걸어 나갔다.

마치 아래를 내려보듯 고개를 기울인 채로 하 회장의 눈을 응시하는 눈빛이 형형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우실까? 아들이 필요하대서, 아들이 되어주면 된대서. 당신 아들 노릇으로 보낸 게 십 년이야.”

“…….”

“그날. 무작정 나를 끌고 이곳으로 데려온 것도, 나를 이 자리에 앉힌 것도 전부 당신이라고.”

“건방진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감히.”

하 회장은 더는 참지 않았다.

주름진, 그러나 충분히 두꺼운 손으로 견의 뺨을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나자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이 고개를 숙여 벌어진 일이라는 걸.

처음부터 고개를 숙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견을 자극하지도 말았어야 했고 하 회장이 자신의 약점을 잡았다는 도취감에 사로잡히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정서는 씁쓸한 후회를 삼키며 하 회장과 견 사이에 끼어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던 견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만하시죠.”

“윤 변호사, 이런 막돼먹은 자식이니까. 네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런 자식이 사고 치는 거 수습하는 거뿐이니까. 오갈 데 없는 불쌍한 계집 받아 줬더니 할 수 있는 거라곤 남자나 꼬셔서…….”

“결혼해 사람 만드는 거.”

견은 하 회장의 말을 불쑥 자르고 끼어들었다.

하 회장이 정서를 모욕하는 것을 더 지켜보지는 않겠다는 듯이.

“그거면 됐잖아요? 애초에 했던 약속이니까요. 저도 약속은 지킵니다. 윤정서 제 사람 만들어 주시면 원하시는 대로 그럴듯한 사람처럼 굴어 보죠.”

“네가? 아니, 애초에 가당치 않은 제안…….”

“한 달이면 됩니다. 결혼 준비하며 증명해 보이죠. 제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한 달 안에 네가 그렇지 못하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자리도 도로 가져가시려면, 그렇게 하시고요. 그럼.”

견은 그렇게 말하며 정서에게 손을 뻗었다.

정서의 손목을 쥐고 곧장 걸음을 옮기는 견 때문에 정서는 하 회장에게 제대로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뒤에서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알면서도 정서는 견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매장 밖으로 나와 차로 향하는 내내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화가 난 것 같았다.

역시 제 행동 때문이겠지?

하지만 정서라고 그런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신중했어야 한다.

설령 견이 하 회장의 약점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건 숨겨야 마땅했다.

정말 중요한 때에 써야 하니까.

“타.”

견은 짧게 말했다.

이 와중에도 정서를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일은 미루지 않았다.

정서는 그런 견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는 제 말을 듣지 않는 정서 때문에 미간을 좁히다가 그대로 굳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붉게 물들어 조금 부푼 그의 뺨으로.

“…….”

“제 말을 귀 기울이지 않으시는 건 압니다만, 몸은 좀 사리세요.”

“……응?”

“맞고 다니지 말란 말입니다.”

견의 눈이 의아함으로 동그래졌다가 이내 천천히 옆으로 퍼지는가 싶더니, 눈꼬리가 휘었다.

견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아무렇지 않게 조수석에 오른 정서는 어느새 벨트까지 맸다.

“미치겠다, 윤정서…….”

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디서 누굴 때렸으면 때렸다.

그가 맞는 경우는 그를 때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한 행동을 그가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치 힘없는 막냇동생에게 당부하듯이, 그렇게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서.

그를 누구보다 걱정하고 그의 상처를 보는 것이 마음 아프다는 것처럼.

“…….”

견이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탄 정서를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이 밝지 않은 정서는 견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타라는 듯 눈짓했다.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겨 운전석에 올라탄 그가 대뜸 정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서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견의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뜨겁게 달아 오르는 느낌이 생경했다.

입술의 가칠한 감촉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핏 닿는가 싶더니 이가 드러났다.

견의 이가 하얗고 가녀린 정서의 목덜미의 살결을 물었다.

“아!”

정서가 옅은 통정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입술 새로 신음을 흘리자 견이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쥐었다.

움직일 수 없게 꽉 쥔 채로 혀를 내어 그새 붉게 물든 살을 슥, 훑은 견의 시선이 정서의 옆얼굴로 닿았다.

조금 달아오른 듯한 두 뺨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앞만 응시하는 맑은 눈동자. 

어쩐지 아래로 조금 내려온 눈꼬리와 기다랗게 눈을 감싼 속눈썹.

희고 깨끗한 피부, 눈가에 조그맣게 흉터처럼 난 점.

그런 것을 보면서 견이 무엇을 참는지, 여전히 윤정서는 알지 못했고.

“벌이야.”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벌을 주시는 거죠?”

“그것도 모를 만큼 멍청했었나.”

“…….”

“……가자.”

견이 운전대에 손을 올렸다.

당분간 정서는 견의 집에서 지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결혼 준비를 핑계 삼아 오래 볼 수 있다면 오히려 그 편이 좋을 테니까.

“우선 집에서 필요한 거 챙겨 올 테니까, 기다려.”

“직접 가서 챙겨도 됩니다. 그리고 당분간 머물 곳은 찾으면…….”

“어차피 결혼 준비로 시도 때도 없이 만나야 할 텐데, 그냥 같이 사는 게 낫지 않나? 여러모로 효율적이잖아. 효율적인 거, 그거 윤 변호사가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제가 언제 수락을 했던가요?”

끼이익.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견이 고개를 돌려 정서를 보았다.

정서는 무표정을 지은 채로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견으로서는 드물게, 전혀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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