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85)

17.

이렇게 이마를 맞대고 하라고 하면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드는데.

견이 하라고 하는 게 마치…….

“해 봐, 얼른.”

정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어떻게 입을 맞출 수 있겠어? 

이런 상황에서, 이런 모양새로.

그렇지만 둘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세를 비틀거나 고개를 들어 올린다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입 벌리고.”

정서가 머뭇거리자 견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녀는 이쯤에서 견을 밀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견이 더욱 고개를 숙이려 들자 정서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쥐었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지던 그때.

견이 입을 열었다.

“할 수 있는 것도 부탁해 봐.”

“…….”

“못 한다, 안 하고 싶다 투정 부리고.”

“…….”

“아파 죽겠다고 엄살도 부려 보라고.”

“…….”

견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정서의 윗입술을 제 입술 새로 아프지 않게 물었다가 놓았다.

정서의 숨소리가 잦아드는 것이 느껴지자 그가 작게 웃었다.

“뭘 꼭 바라는 사람 같길래 이건 서비스.”

“……진짜 미쳤어?”

“좀 돌아왔네.”

여상한 목소리로 대꾸한 견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설마 이 모습으로 엘리베이터까지 타려고.

기겁을 하며 몸을 떼어내는 정서를 더 꼭 껴안은 견은 지하층의 버튼을 누른 채 침묵했다.

밀어내고 두드리고 버둥거려도 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람이 무슨 힘이 이렇게 좋은지.

하는 수 없어진 정서는 체념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견이 세워둔 차로 갈 때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조수석 문을 열고 좌석에 조심히 앉히고 나서야 정서를 놓아준 견은 운전석에 올랐다.

운전석으로 향하는 견을 뒤로 한 채 무심코 백미러를 보던 정서는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거울에 비친 그녀는 너무나도…… 평상복 차림이었다.

목이 조금 늘어난 것 같은 티셔츠에 무릎이 나온 트레이닝 바지.

앞에 있는 편의점 정도야 다녀오겠지만 그보다 더 멀리는 결코 나갈 수 없는 스타일.

게다가 그녀는.

“하견.”

“응?”

“신발.”

“……아.”

신발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정서의 목소리가 굳었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견이 그녀의 발을 내려다봤다.

휑하니 드러난 작은 발은 옴싹하니 귀여운 모양새였지만, 그런 견의 감상 따위가 정서의 마음을 풀어 줄 수는 없었다.

“사.”

“옷은?”

“그것도 사.”

“사려면 가게에 들어가야 하잖아. 이 꼴을 하고 어딜 들어갑니까. 다시 내려 주세요, 본부장님.”

“저 집 들어가기 싫잖아. 누가 찾아올 줄 알고?”

“……이미 찾아오셨잖아요, 본부장님께서.”

“그래, 이래야 윤정서지.”

견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예쁘게도 웃었다.

정서는 그런 견을 샐쭉한 눈으로 보다가 그가 손을 뻗어 벨트를 매주자 모든 걸 체념하고 수긍하듯 눈을 내리감았다.

“매장 직원 다 내보내면 되지?”

“소란 부리지 말고 적당한 아울렛 매장 앞에 세워 주시죠.”

“이 참에 커플 티셔츠를 맞추는 건?”

“입을 곳도 없으시면서요.”

“금요일이 자유 복장으로 출근하는 날 아니었나?”

“사내 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기시는 분인 줄은 제가 미처 몰랐네요.”

견은 눈을 지그시 감고 시트 깊숙이 몸을 묻은 정서를 흘깃 보았다.

정서는 모르는 것 같다.

그가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다행인가.

견은 가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아까 무방비한 상태로 넘어져 있던 정서를 보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잔뜩 겁먹고 경계한 모습을 보면서 그의 머리가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녹아내렸는지.

그런 것을 전부 안다면, 결국 너도 도망가겠지.

그러니까 어떤 것은 모르는 편이 나았다.

&

“이것도 챙기죠.”

맨투맨 티셔츠에 슬랙스.

눈에 띌 것도 없는 평범한 옷을 고른 정서는 직원이 챙겨 준 운동화까지 신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그녀를 본 견이 고른 것은 목도리였다.

빨간색의 따뜻해 보이는 목도리는 그녀의 흰 피부에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아직 겨울 아닌데.”

“곧 오니까.”

“……감사합니다.”

“원래 이럴 땐 좀체 입을 일 없던 화려한 원피스며 드레스 같은 거 입고 패션쇼라도 펼쳐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영화를 보신 겁니까?”

“고전을 좋아해서, 프리티 우먼.”

“……계산 부탁드립니다.”

정서는 습관적으로 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지갑은 고스란히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을 테니까.

“…….”

견은 이제 웃음을 숨기기 위해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드러내놓고 입꼬리를 올려 웃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정서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견은 더 짓궂게 굴고 싶은 충동을 겨우 내리누르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넸다.

“좋으시겠어요. 이런 멋진 남자친구도 있으시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존댓말을 쓰고 있던 것을 빤히 보고서도 물었다는 건 떠보기 위함인가?

아까부터 점원이 견을 흘깃거리고 있었다는 것쯤은 정서도 알고 있었다.

부정해야 하나?

견이 헛소리를 덧붙이기 전에 부정하는 게 좋겠지,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정서가 입을 연 순간, 끼어든 것은 하 회장이었다.

“보기 좋구나.”

하 회장이 어떻게 여길? 대체 왜?

그런 의문이 마구 튀어 오를 때에도 정서는 견과 떨어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둘 사이 간격이 벌어지자 하 회장의 시선이 정서에게 향했다.

눈빛이 제법 매섭다.

정서는 제 몸이 조금 굳는 것을 느끼면서도 당황하지 않으려 했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약한 모습에 더 날카롭게 이를 세우기도 하니까.

“이런 옷 취향이신 줄은 몰랐네? 여기 캐주얼 매장이신데. 새로운 취미라도 들이셨어요? 골프복 매장은 저 뒤쪽에 있어요.”

견은 멀어진 노력이 무색하게 거리를 다시 좁혔다.

심지어 그녀의 어깨에 친히 팔을 두르기까지 했다.

다정하게 고개를 붙여 오는 견의 행동에 당황한 정서는 몸을 떼어내려 조금 움직였으나 어딘가 위압감을 주며 그녀를 가두듯 안는 그의 팔에 떨어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정서는 견의 품에 안긴 채로 하 회장을 마주하게 됐다.

“업무 시간이 아니었나?”

“요새 총기가 많이 흐려지셨네요. 이사님들의 걱정이 기우는 아니었나 봐요. 오늘 토요일입니다.”

“…….”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살벌했다.

견은 마치 작정한 사람처럼 날카로운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죄 드러내며 말을 내뱉었다.

덕분에 좌불안석이 되는 건 정서의 몫이었다.

침묵하며 견의 얼굴을 훑는 하 회장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저런 말을 듣고 나서도 화가 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법했다.

왜 왔지, 진짜?

정서는 이 상황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 머리를 굴렸다.

저번에 마지막으로 하 회장과 대화를 나눴을 때, 하 회장은 그녀에게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냐고 물었었지.

견이 문제를 일으켰고 그 문제가 그녀의 생각처럼 스캔들이었다면, 그리고 하 회장이 은호를 고용해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면.

하 회장은 지금 ‘윤정서’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굳이 견과 같이 있는 이 자리에서 따지려고 들까?

아니,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번거롭게 이런 식으로 찾아왔을까?

그저 너 같은 건 쓸모없으니 버리겠다 전화 한 통이면 되었을 텐데.

“말하는 본새가 여전히 천박해. 너 답구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죠. 아시잖아요? 저 오래 살 거라.”

이 사람이랑.

견은 그렇게 덧붙이며 정서를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정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얄팍하게 남아있는 사회 생활력이라도 동원해야만 했으니까.

견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그 스캔들이 문제가 아니면, 견이 무엇을 했길래 그렇게 화를 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정서는 알 수 없었다.

항상 붙어 있었는데, 견이 하는 일 중 자신이 모르는 일은 단 하나도 없는데.

“기어이 이 상무를 치웠더구나.”

이 상무?

그게 누군데.

본론이 나오자 갑자기 하 회장 곁을 지키고 있던 수행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자각 없이 이 상황에 놓여 버린 가게 점원 둘이 수행원의 말을 따라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이지 않은 지점에서 막무가내로 군다는 것.

그것이 유일하게 이 부자가 닮은 점인가 보다.

“곤란하셨잖아요? 그 사람 때문에.”

“윤 변호사가 말릴 줄 알았는데, 결국엔.”

설마 하 회장이 그녀를 꾸짖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정서는 머릿속으로 하 회장과 견이 ‘이 상무’라고 부를 사람이 누가 있는지 생각했다.

아마 엔터테인먼트 계열의 인사는 아닐 것이다.

하 회장이 거기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백영 그룹의 다른 계열사일 것이고 상무라는 직급에서 두 사람 모두 알 정도의 사람은…….

아, 백영 제약이다.

들어오면서부터 뷰티 관련 제품을 많이 개발해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해나갔다고 했지.

최근 무슨 문제가 있었나?

부작용 관련 이슈가 있었던 것은 기억한다.

그와 관련해 하 회장이 자문을 구했었으니까.

신고된 사례들은 화장품 사용과 정확한 연관성을 밝혀내기 어려웠고 큰 문제는 없을 거라 말했었는데.

문제가 터졌던 건가?

그런데 견이 언제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진 거지?

탁.

하 회장이 무언가를 견의 얼굴에 던졌다.

날카로운 것이 견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다.

정서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감쌌다.

견은 괜찮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그것을 친히 주웠다.

견의 손에 들린 것은 사진이었다.

안에 피떡이 된 사람의 사진이 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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