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정서는 핸드폰을 더 바짝 쥐었다.
침묵이 너무 길면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겠지.
무엇이든 답하는 편이 나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떠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하 회장님을 만난다고?”
― 예. 선약이 잡혀 있어서요.
“설마 그 사진 파일을 가지고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아니지? 어차피 나에게 다시 돌아올 파일이야. 차라리 나랑 만나서 얘기하는 편이 나아.”
― 그런가? 그렇게 두 분이 가까운 사이예요?
“하견 본부장님의 일을 내가 맡아서 하기 때문일 뿐이야. 그러니까…….”
― 그럼 더더욱 안 되겠는데요. 나는 그 사람 별로예요.
“뭐?”
― 받고 싶은 건 차차 고민해 볼게요. 오늘은 보고 싶어도 좀 참아요.
“여보세요? 차은호.”
― 이름 부르는 건 듣기 좋네, 끊어요.
“잠깐만, 저기. 차은호, 차…….”
툭.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정서는 황망한 기분이 되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단순히 심부름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하 회장과 견, 정서가 어떤 관계로 묶여 있는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 회장이 아닐 경우 하 회장을 견제하는 세력이 대체 누가 있지?
띵동.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지는 사이,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 같은 것을 시키지 않아 집에 좀체 누가 찾아오는 법이 없는데.
몸이 긴장감으로 굳었다.
새벽 여섯 시 사십오 분.
이 시간에 그녀를 찾아올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띵동.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렸다.
정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든 채 천천히 바닥을 디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현관으로 가까워지는 와중, 바깥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설마, 아니겠지.
정서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감각을 느꼈다.
돌연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가슴께를 움켜쥐자 입고 있던 티셔츠가 볼품없이 손 안에서 구겨졌다.
쿵쿵쿵.
이제는 문을 두들긴다.
순간 그녀의 몸이 퍼뜩 떨리는가 싶더니 입술 새로 새는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네가 나랑 다를 거라고 착각하지 마.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 봤자, 너는 내 피를 타고 났다고.’
눈앞이 깜빡거린다.
정서가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벽에 손을 짚었다.
그런 기척을 들었는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쿵쿵쿵!
정서는 생각했다.
도망쳐야 한다고.
알지 않았냐고, 언젠가 이렇게 찾아오리란걸.
그걸 알아서 늘 짐도 제대로 풀지 않았던 게 아니냐고.
급하게 안방으로 뛰쳐 들어간 그녀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로 책상에 딸린 서랍을 열었다.
그러곤 안에 있는 것들을 급하게 핸드백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챙기자.
아니야, 그럴 필요도 없어.
그냥 핸드폰하고 지갑만 챙기자.
잠깐만 참으면 돼.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그때에…….
그때였다.
갑자기 바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정서는 다급한 움직임을 멈추었다.
착각이었나?
그럴 리 없는데.
바깥이 조용해진 상태로 몇 분이 흘렀을까.
우당탕탕하고 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사방이 조용해졌다.
간 건가? 갑자기? 왜.
긴장감에 몸이 떨렸다.
그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조심스럽게 다시 문으로 향했다.
그대로 현관문에 달린 어안렌즈로 눈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이었다.
삑 삑 삑 삑.
번호 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철컥하고 손잡이가 돌아갔다.
“!”
놀라 그대로 뒤로 넘어지는 그녀의 앞에 선 것은.
“…….”
“…….”
견이었다.
견은 현관 바닥에 넘어진 채 자신을 올려보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얼핏 해가 뜨고 있었다.
거실의 열린 커튼 사이로 쳐드는 햇빛 때문에 견의 눈이 번뜩였다.
“윤정서.”
이윽고 그의 입술이 열렸다.
견은 정서를 불렀다.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견이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와 저를 마주한 건지, 누가 그토록 거센 기세로 문을 두드린 건지.
그게 견이 아니라면 그 남자는 어디로 간 건지, 옆에 떨어져 내용물이 죄다 쏟아진 핸드백이며 바닥에 팽개쳐진 여권과 통장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왜 견은 번번이,
번번이 자신이 이렇게 엉망으로 망가졌을 때,
남들에게 가장 보이기 싫은 모습일 때 나타나는 걸까.
“정서야.”
견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정서는 몸을 일으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미친 X이니까.
그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이번에도 그냥 그렇게 행동한 것뿐이라고.
미친 X이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이상할 것도 없는 거라고.
그렇게 얼버무리면서 보내야 하는 거라고.
알면서도 정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던 견이 무릎을 굽혔다.
그대로 허리까지 숙여 그녀를 들여다보는 시선은 흔들림 없이 곧기만 했다.
“이러면 어떻게 해.”
“…….”
울컥.
뜨거운 것이 정서의 목구멍으로 치밀었다.
그녀를 달래는 듯한 제법 다정한 말투였으나 속에 단호함이 서려 있다.
실망했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됐다.
견이 이런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견은 약하고 어리숙한 여자를, 감정에 휘둘리는 여자를 경멸했다.
정서를 이때껏 봐 주었던 것은 정서가 그런 여자가 아니라서였다.
그런 견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정서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더 늦을 수는 없다고.
이렇게 엉망인 채로 남겨지는 것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견…….”
그러나 겨우 새어 나온 입술이 부르는 것은 고작 견의 이름에 불과했다.
견은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비틀린 그의 얼굴이 꼭 기울어진 정서와 견의 사이를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네가 와서 반가웠다고.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그 지긋지긋한 남자가 아니라서.
가까스로 숨 쉴 구멍을 만들 때마다 네가 머물 곳은 거기가 아니라는 듯 시궁창 깊은 밑바닥으로 밀어 넣어 버리는 남자가 아니라서.
그래서 다행이었다고.
그 말을 끝끝내 내뱉을 수가 없으니, 그 진심을 전할 수가 없으니.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그의 이름이었다.
세 글자도 되지 못하고 끝나 버리는 그 이름.
“이러면 어떡하냐고, 윤정서.”
“…….”
견이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러곤 엉망으로 쏟아져 내려 얼굴을 가리는 정서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비로소 드러난 정서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 때문인지 투명하게 빛났다.
그럼에도 끝내 울지는 않는다.
눈물 한 방울을 흘리지 않으려 사력을 다해 치켜뜬 두 눈이 견의 시야 안으로 고스란히 와 박힌다.
“이렇게 가엽고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서.”
“…….”
“겁을 집어먹은 얼굴을 하고서.”
“…….”
“그새 이런 걸 챙겼어.”
견이 정서의 옆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그건 아주 작은 접이식 칼이었다.
혹시 몰라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챙겨 둔 것이었다.
“네 이런 점이 나는 미치겠어.”
“…….”
“도와달라는 말은 죽어도 못 뱉으면서 이런 건 잘도 챙겨 다니지.”
견이 버튼을 누르자 칼날이 툭 튀어 나왔다.
견은 칼끝을 햇빛에 비춰 보다가 다시 집어넣고 무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걸로 사람을 어떻게 죽이게.”
“……죽일 생각 아니야.”
“죽일 생각도 아니면서 이런 걸 왜 챙겨 다녀.”
“…….”
견은 툭 던지듯 말하고는 칼을 도로 바닥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서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과거 언젠가, 제가 문득 보고 예쁘다고 생각했던 손.
고생이라고는 전혀 해본 적 없어 보이던 그 손은 여전히 깨끗하고 고결하다.
그의 성정을 견디지 못하고 잘게 난 흉터들은 티끌만큼도 흠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손을 더욱 단단하고 기품 있게 보이게만 해서, 제 거친 손이 어쩐지 창피해지는 것만 같아서.
정서는 그 손을 선뜻 잡지 못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 윤정서겠지.”
견은 헛웃음을 짓는가 싶더니 내밀었던 손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제 가겠지?
정서는 그가 사라진 대문에 앉아 이 모멸감과 수치심을, 상실감과 허탈감을 오래도록 곱씹어야 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지난한 일이었다.
“!”
그러나 그 상상이 무색하게 견은 도로 정서에게 두 팔을 뻗었다.
그리고 정서가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품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세워 그녀를 안아 올리더니 뒤로 손을 뻗어 현관문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긴. 여기 있기 싫을 거 아냐.”
“아니,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하견.”
정서는 자신을 내려 달라는 듯 몸을 버둥거렸다.
견은 단단한 두 팔로 그녀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저것들? 여권은 다시 발급 받으면 그만이고, 돈은 따로 챙기면 그만이고. 아, 그래.”
견이 그녀를 안은 채 허리를 굽혔다.
바닥에 닿으려나 싶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주워들고 곧장 몸을 일으키는 모양새가 품에 아무것도 안지 않은 사람의 몸놀림처럼 가벼웠다.
“이건 챙기든지.”
견은 그녀의 손에 칼을 쥐여주었다.
그리고선 다시 문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견의 등 뒤로 집 문이 닫혔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려 줘. 걸을게. 걸으면 되잖아.”
“아냐, 너. 걸을 힘도 없어. 놀라서 힘 다 빠졌어.”
“뭐라는 거야. 걸을 수 있다니까? 내려 줘.”
견이 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숙였다.
대뜸 견과 정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해 봐.”
“……뭘?”
견은 말없이 고개를 더 숙였다.
그의 이마와 정서의 이마가 맞닿았다.
“해 봐, 윤정서.”